정유재란(丁酉再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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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에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이 1597년(선조 30)에 대규모로 다시 침입함으로써 2년 가까이 계속된 전쟁.

개설

임진왜란 중에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풍신수길(豊臣秀吉)은 대규모 침입을 재차 시도해, 1597년(선조 30) 7월에 15만 명에 가까운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해 해상과 육상에서 전면전을 전개했다. 초기에는 조선 수군이 참패하고 조·명연합군도 남원과 전주를 적에게 빼앗기며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9월에 조·명연합군은 북상하던 일본군을 천안 부근 직산(稷山)에서 일단 저지해 그 기세를 꺾었으며,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활약에 힘입어 명량(鳴梁)에서 적을 대파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에 일본군이 해안지대로 퇴각해 웅거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가, 1598년(선조 31) 8월에 풍신수길이 사망하자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퇴각하는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한 노량(露梁)해전을 마지막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역사적 배경

전쟁의 장기화에 부담을 느낀 명과 일본은 서로 강화협상에 임했으나, 승리를 주장한 풍신수길의 요구가 지나치게 오만하고 비현실적인 이유로 협상은 끝내 결렬되었고, 일본은 대규모로 재침해 왔다. 당시 풍신수길이 명을 중심으로 구축된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제도의 본질에 대해 무지했고, 또한 이미 5년간 진행된 전쟁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군사력이 여전히 강력했기에 이런 대규모 재침이 가능했다.

발단

임진왜란 중에 4년 가까이 진행된 강화협상은 명과 일본의 현격한 입장 차이로 끝내 결렬되었다. 풍신수길이 내세운 대표적인 강화 조건은 명의 황녀(皇女)를 일본 천황의 후비(後妃)로 보낼 것, 명과 일본 사이의 감합(勘合)무역을 재개할 것, 조선의 경기·충청·전라·경상 4도를 일본에 넘길 것,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낼 것 등이었다. 그러나 명 조정에서는 전통적인 조공·책봉제도에 따라 풍신수길을 일본 국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입장이었다. 협상이 결렬되자, 풍신수길은 대규모 침입을 준비했으며, 명과 조선도 병력을 증강해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경과

협상이 결렬된 이후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1596년(선조 29) 12월부터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다시 부산에 상륙하기 시작해 이듬해인 1597년(선조 30) 4월까지 도합 14만 명이 넘는 전투 병력이 경상도 해안지대에 집결했고, 7월부터 수륙 양면에서 전면적인 총공세를 취했다.

대규모 전쟁의 재발 가능성이 높아지자 명과 조선도 병력을 증강하고 전쟁에 대비했다. 명에서는 새로 지휘권을 잡은 양호(楊鎬)마귀(麻貴)가 조선에 들어와 명군을 요해처에 나누어 주둔시켰으며, 조선도 8도에서 병사를 징발해 요해처에 주둔시켜 일본군의 북진을 차단하고자 했다. 한편 이순신의 뒤를 이어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선 수군의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7월부터 시작된 전면전에서 원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칠천량(漆川梁)해전에서 일본군에게 참패해 거의 궤멸됨으로써 초기의 전황은 조선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조선 수군을 제압한 일본군은 기세를 올리며 북상해 남원(南原)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남원성에는 명의 부총병(副總兵)양원(楊元)이 이끄는 3,000여 명군(明軍)과 전라병사이복남(李福男)이 이끄는 조선군 1,000여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5만이 넘는 대군으로 공격해 온 일본군을 막지 못하고 8월 16일에 남원성이 함락되었다. 남원에 이어 전주(全州)를 점령한 일본군은 충청도 지역으로 진입해 북상해 올라왔다.

급박한 정세는 9월에 들어서면서 호전되었다. 9월 5일에 명군이 충청도 직산(稷山) 인근의 소사평(素沙坪)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고, 이어 9월 16일에는 이순신이 다시 지휘권을 잡은 조선 수군이 전라도 명량(鳴梁)에서 일본군을 대파함으로써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켰다. 육상과 해상에서 패퇴한 일본군은 울산(蔚山)에서 순천(順天)에 이르는 해안지대로 퇴각해 이른바 왜성(倭城)을 쌓고 웅거했고, 전쟁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울산 등지에 대해 거센 공격을 감행했으나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한 채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일본군이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해안지대를 거점으로 삼아 항전하는 사이에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1598년(선조 31) 2월에 전라도 고금도(古今島)에 사령부를 새로 세우고 병력을 증강했다. 조선 수군의 궤멸과 남원의 함락으로 위기를 느낀 명에서 파견한 중원군도 속속 조선에 도착해 전선에 배치되었다. 특히 7월에는 진린(陳璘)이 이끄는 명의 수군도 바다를 건너 도착해 고금도에서 이순신의 조선 함대와 합류했다. 또한 초기 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파직된 양호의 뒤를 이어 새로 지휘권을 잡은 만세덕(萬世德)은 대규모 반격 작전을 세우고 남하했다. 이에 따라 조·명연합군도 여러 경로를 따라 남하해 일본군을 도처에서 압박했다.

조·명연합군의 전방위 공세로 곤경에 처한 일본군은 마침 8월 18일에 풍신수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총퇴각을 시작했고, 조선군은 일본군의 퇴로를 막고 최후의 일전을 벌이고자 했다. 그러나 순천에 주둔하던 소서행장(小西行長) 등 일본군 장수로부터 뇌물을 받고 일본군의 퇴로를 열어주려는 명군 지휘관들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많은 일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순신의 강경노선에 따라 결국 조·명연합군은 순천을 빠져나가려던 일본군을 맞아 11월 18일과 19일에 걸쳐 격렬한 해전을 벌였다. 이때 노량(露梁)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했으나,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의 병선 500여 척 가운데 200여 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순천을 빠져나온 일본군 지휘부가 부산을 거쳐 한반도에서 완전히 퇴각함으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때 일부 조선 신료가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이듬해인 1599년(선조 32) 초부터 명군도 조선에서 순차적으로 철군을 시작해 그해 9월에 완전히 떠났다.

참고문헌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징비록(懲毖錄)』
  •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임진왜란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7.
  • 이경석, 『임진전란사』, 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 1976.
  • 기타지마 만지, 김유성·이민웅 옮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경인문화사, 2008.
  • 한명기, 「정유재란 시기 명 수군의 참전과 조명연합작전」, 『軍史』38,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