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린(陳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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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나라 장수.

개설

광동성 출신으로 광동의 도적들을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 사묘의 건설에 병사를 징발하고 돈을 거두는 등의 비리를 저질러 두 차례나 파직을 당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98년 조선에 출정하여 노량해전에서 일본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개선 후 1600년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의 하나인 양응룡의 난, 일명 파주(播州)의 역(役)에 참여하여 반란군을 진압하였고 묘족의 난을 진압하는 데도 큰 공을 세웠다. 1607년 그가 사망하자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추증되었고 음직으로 백호(百戶)가 내려졌다.

가계

아들 진구경(陳九經) 등은 위(衛)의 지휘(指揮)직을 세습했다. 그의 손자인 진조(陳詔)는 명이 망하자 경상남도 거제시 장승포에 들어와 조부의 군대가 주둔했던 완도군 고금도로 옮겨 정착했고, 그의 아들 석문(碩文)이 해남 황조 마을로 이주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활동 사항

가정 연간(1522~1566) 말 지휘첨사(指揮僉事)에 임명되었다가 뒤에 광동성 영덕(英德)의 도적을 토벌한 공으로 승진하여 광동(廣東)의 수비(守備)가 되었다. 다시 도적을 토벌하여 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가 되었고 광동의 도사(都司)에 임명되었다. 1574년 조주부(潮州府)에서 도적떼가 창궐하자 진린이 참장(參將)직에 임시로 임명되어 도적떼의 토벌에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진린은 조경(肇慶)의 유격(遊擊)으로 발탁되었다가 이후 고주부(高州府)에서 참장에 임명되었다.

1576년 진린은 총독능운익(淩雲翼)을 따라 광서(廣西) 대등협(大藤峽) 지구에서 중국 남부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묘족의 요민(瑤民) 반란을 정벌하고 부총병이 되었고 동안현(東安縣)의 참장을 대리했다. 얼마 후 다시 도적들이 관민을 살상하니 진린이 평정하고 동안현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동안현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진린은 토목공사를 일으켜 사묘를 건설했는데 그 부역을 병사들에게 맡게 하고 돈을 거두면서 원성을 샀다. 이에 사병들이 격노하여 난을 일으키고 주현을 위협하고 약탈하니 이 일로 파직당했다. 난이 평정된 후 진린이 낭산(狼山)의 부총병으로 임명되었으나 재차 파면당하였다. 이후 진린은 오랫동안 등용되지 못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구의 전법에 능하다고 하여 계진(薊鎭)을 지키게 하였다. 진린은 1593년 정월 군대를 거느리고 요동에 이르렀으나 당시 명 조정은 일본과 강화를 준비하였기에 진린은 장주(漳州)·조주(潮州)로 가서 해안방어를 담당했다. 이때 또다시 진린은 병부 상서 석성에게 뇌물을 주었다가 파면되었다.

1597년에 강화교섭이 실패하자 진린은 다시 임용되어 광동병 5천 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1598년에는 어왜총병관(禦倭總兵官)으로 승진하여 마귀(麻貴)·유정(劉綎) 및 동일원(董一元) 등과 네 길로 나누어 조선 남쪽으로 전진해 내려왔다. 진린의 군대는 육로군의 남하에 맞추어 바다에서 일본군의 보급을 차단하는 역할을 맡아 사병 1만 3천 명과 전함 수백 척을 거느리고 충청·전라·경상의 각 해구에 포진했다. 당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병으로 죽고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끄는 대병이 철수하는 가운데 유정은 소서행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일본군의 퇴로를 열어주었다. 소서행장은 진린·이순신에게도 각각 뇌물을 주며 퇴로를 열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진린과 이순신 등은 이를 거절하고 이들이 남해를 통해 퇴각할 것을 대비했다. 진린은 처음에는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전공을 자신에게 돌리고 진심을 다해 전투에 임하는 이순신에게 감동하여 노량해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선조실록』 31년 8월 13일) (『선조실록』 31년 11월 27일).

노량해전에서 소서행장군의 대부분의 병력이 관음포 포구에 갇히면서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은 격전에 격전을 거듭하였다. 진린과 이순신은 각각 한 차례씩 상대방을 위기에서 구해주기도 했지만 이 해전으로 진린의 부하 등자룡(鄧子龍)이 전사했으며 이순신과 그의 부장 10여 명이 전사했다. 진린은 진잠(陳蠶)·계금(季金)으로 하여금 일본군의 퇴로를 막게 하며 분전하였다. 노량해전으로 조선과 명의 수군은 큰 성과를 올렸다. 또한 그의 아들 진구경(陳九經)은 일본군 장수 석만자(石曼子)를 잡아 죽였다고 보고되었다. 석만자는 도진의홍(島津義弘)의 일본어 발음을 음차한 것으로 실제로 도진의홍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지 않았다(『선조실록』 31년 12월 21일).

개선 후 진린은 호광(湖廣)의 총병관으로 임명되어 파주(播州)의 역(役)에 참여했다. 파주의 역은 1592년 몽골 귀화인 발배가 영하(寧夏)에서 일으킨 발배(哱拜)의 난, 임진왜란과 함께 만력삼대정의 하나로 선위사(宣慰使)양응룡(楊應龍)이 묘족을 끌어들여 반란을 꾀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란군은 사천(四川)·귀주(貴州)·호광(湖廣)의 산세가 험한 곳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둔보(屯堡)와 성진(城鎮)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진린은 반란군의 수장인 양응룡 부자와 교전하며 적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반란군이 용계산(龍溪山)으로 달아나 적군이 산 위에서 진을 치고 나머지 적군과 더불어 명군에 저항하였으나 진린은 두려워하지 않고 산에 올라 후퇴하는 적을 공격하는 등 용맹하게 싸워 적군을 대패시켰다. 이후 적들이 귀주(貴州) 해룡돈(海龍囤)에서 저항하자 이곳을 포위하여 반란군을 괴멸시켰다. 양응룡이 분신하여 사망하면서 반란이 평정되자 그 공로로 진린은 좌도독(左都督)으로 승진하였다.

이 무렵 오국좌(吳國佐)가 다시 호광·귀주의 교계지에서 난을 일으키고 70여 개가 넘는 둔영을 침략하고 성들을 약탈하는 등 변란이 일어났다. 명 조정은 진린에게 진압하게 하니 부장 등을 7개의 길로 나누어 공격하게 하여 묘족의 수령을 잡아들이는 등 공을 세웠다. 오극좌가 달아나자 진린의 군대가 끝까지 추격하여 잡아들였다. 1604년 다시 묘족의 반란이 일어나자 1605년 진린이 1만의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기도 했다.

묘소

광동성(廣東省) 운안현(雲安縣) 육도진(六都鎮)연화산(蓮花山)에 묘지를 조성했다.

상훈 및 추모

파주의 역으로 좌도독(左都督)에 임명되었으며 지휘사(指揮使)를 음직으로 받았다. 다시 묘족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태자태보에 추증되었고 백호에 음봉되었다. 만력제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국장의 일종인 제장(祭葬)을 하사하였다. 만력제는 또한 진린의 고향 광동(廣東) 옹원(翁源) 용전촌(龍田村)에 용전성(龍田城)을 건설하고 성안에 사당을 두어 그의 공을 기렸다. 본래 전라도 강진(康津) 고금도(古今島)에 있던 관왕묘(關王廟), 즉 관우를 제사 지내는 사당인 탄보묘(誕報廟)는 1597년 진린이 건립하였는데 뒤에 이순신과 함께 진린이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명사(明史)』
  • 이민웅, 「조·명 연합함대의 형성과 노량해전 경과」, 『역사학보』178, 역사학회, 2003.
  • 吳如蒿, 『中華軍事人物大辭典』, 新華出版社,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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