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릉(泰陵)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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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태릉 |
한글표제 | 태릉 |
한자표제 | 泰陵 |
상위어 | 능원(陵園) |
관련어 | 강릉(康陵), 만석(滿石), 인석(引石), 정릉(靖陵) |
분야 | 왕실/왕실건축/능·원·묘 |
유형 | 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전기 |
집필자 | 이경미 |
장소 |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태강릉 내 |
좌향(坐向) | 임좌병향(壬坐丙向)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태릉(泰陵)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명종실록』 17년 1월 8일, 『명종실록』 20년 4월 12일, 『숙종실록』 20년 윤5월 24일 |
조선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의 능.
개설
문정왕후윤씨는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모후이다. 명종이 1545년(명종 즉위) 12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동생 윤원형(尹元衡) 등과 더불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태릉은 이러한 문정왕후의 강력한 권력이 반영된 큰 규모의 능이다. 혼유석은 물론이고 문인석과 무인석도 다른 능에 비해 큰데, 다만 당시 시대 상황을 보여 주듯 표정이 경직되어 있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 곁에 묻히기 위해 생전에 무리하게 정릉을 옮기기까지 했지만, 결국에는 홀로 안장되었다. 그 대신 아들 명종의 능인 강릉(康陵)이 같은 능역에 조성되었다. 이후 태릉은 1960년대에 능역 내에 국가대표 운동선수의 훈련장이 들어서면서 왕릉으로서의 면모를 잃었다.
조성 경위
반정을 통해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공신들의 요구에 따라 원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를 폐위하였다. 왕후의 부친인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의 처남으로, 반정을 반대하다 반정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 중종은 첫 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를 맞았다. 그러나 장경왕후는 1515년(중종 10)에, 뒷날 인종으로 등극하는 세자를 낳은 뒤 산후병으로 일찍 승하하였다. 이후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승하하자, 장경왕후의 능침 곁에 능을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이라 하였다.
문정왕후는 1517년(중종 12)에 중종의 두 번째 계비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 뒤 1545년에 자신의 아들인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자, 모후로서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런데 문정왕후는 1562년(명종 17)에, 장경왕후의 능은 그대로 둔 채 중종의 능만을 한강 남쪽 봉은사(奉恩寺) 옆으로 옮겼다(『명종실록』 17년 1월 8일). 이는 자신이 죽은 뒤 중종과 함께 묻히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전한다. 실제로 1565년(명종 20)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뜨자, 명종은 능호를 신정릉(新靖陵)이라 하고(『명종실록』 20년 4월 12일), 정릉 곁에 능을 마련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릉은 가까이에 있는 한강 지류가 자주 범람하여 새로 능을 조성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릉을 본래 있던 원당으로 옮기자는 여론이 많았지만, 명종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다만 정릉 곁에 능을 조성하려는 계획은 포기하고, 도성 북쪽 노원(蘆原)에 터를 마련하고 능호를 태릉이라 하였다. 문정왕후는 중종과 함께 묻히기 위해 무리하게 중종의 능을 봉은사 옆으로 옮겼지만, 결국에는 세 사람이 각기 다른 곳에 묻히고 말았다.
조성 상황
『태릉지(泰陵志)』에 따르면, 태릉은 양주 남쪽 노원면 대방동에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조성되었다. 봉분 뒤 삼면에 곡장을 둘렀으며, 봉분에는 12면 병풍석을 두고 난간석을 설치하였다. 혼유석은 길이가 15자 4치에 폭이 10자 2치이며, 높이는 2자 5치였다. 이는 『세종실록』에 전하는 상석(象石) 크기인 길이 11자, 폭 6자 3치나, 『춘관통고(春官通考)』에 기재된 광릉(光陵)의 혼유석 규모인 길이 14자에 폭 9자보다 큰 것이었다. 장명등 역시 높이가 17자 5치로, 광릉의 13자보다 4자 5치나 높다.
그밖에 망주석, 문인석과 무인석, 마석(馬石) 각 1쌍에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이 2쌍 배치되었다. 특히 문인석과 무인석은 몸체가 사각형에 가깝고 육중하며, 체형이 둔중하면서 목이 뻣뻣이 서 있는 모습이다. 생기는 없어 보이지만 크기에서 압도적이다. 봉분과 병풍석 사이에는 봉분의 흙을 지탱해 주는 만석(滿石)과 인석(引石)이라는 긴 석재가 깊숙이 박혀 끝부분만 돌출해 있는데, 돌출한 면에 십이지의 문자가 양각되어 있다. 석물의 크기뿐 아니라, 곡장으로 둘러싼 봉분 주변 면적도 다른 단릉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넓다. 이러한 태릉의 장대한 석물과 넓은 규모는 문정왕후가 누렸던 막강한 권력을 잘 보여 준다.
태릉은 그 곁에 명종의 능인 강릉이 조성되면서 한층 위상이 높아졌다. 1567년(명종 22) 명종이 승하하자, 모후의 능인 태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에 따라 태릉과 강릉은 하나의 능역으로 인식되었고, 후대의 왕들은 강릉을 참배하러 가서는 자연스럽게 태릉에도 절을 올리곤 하였다. 1574년(선조 7) 4월에 선조는 강릉에 직접 제사하러 가면서, 먼저 태릉에 들러 제사하고 뒤이어 강릉에 참배하였다.
변천
17세기와 18세기를 지나면서 사소한 보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능제에 변화가 생길 정도의 대대적인 수리는 없었다. 숙종 때는 정자각을 고쳐지었다(『숙종실록』 20년 윤5월 24일). 건물이 낡고 오래된 까닭에 정자각 중건청을 두고 완전히 새롭게 지었다. 『일성록』 1694년(숙종 20) 3월 25일 기사에 따르면, 기존의 정자각은 정전 3칸에 좌우에 퇴가 반 칸씩 있고 배위청이 2칸 반이었다.
그런데 중건청에서 예종의 능인 창릉(昌陵)의 전례를 들어, 좌우의 퇴는 불필요하므로 철거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에 따라 새 정자각은 정전 3칸에 배위청 2칸 반의 규모로 건립되었으며, 좌우 퇴를 없애는 대신 좌우 벽에 풍판을 달아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았다. 태릉의 정자각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으며, 오늘날 전하는 것은 정전 3칸에 배위청 2칸의 평범한 모습으로 199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1723년(경종 3)에는 태릉을 봉심하고 온 관리가, 병풍석에 기울어지거나 깨진 곳이 있고 틈이 많이 벌어져 있으므로 차제에 철거할 것을 청하였다. 신하들의 의견이 찬반으로 갈리자 왕은 더 논의해 보라고 하였는데, 결국에는 그대로 두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고종 때는 봉분 위 만석이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가 있어서 한 차례 크게 손을 보았다.
관련 사항
태릉은 1970년에 강릉과 더불어 사적 제201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1966년에 태릉 내에 국가가 운영하는 선수촌이 건립되어 이미 왕릉으로서의 면모를 상실한 뒤였다. 최근에 들어와서 조선 왕릉의 문화적 가치가 재인식되면서, 선수촌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태릉을 왕릉 본래의 모습으로 되살리려는 노력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춘관통고(春官通考)』
- 『태능지(泰陵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