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靖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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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의 능.

개설

성종과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안장된 선릉(宣陵)의 동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두 능역을 합해 ‘선정릉’이라 부른다. 정릉은 처음에는 고양시에 위치한 희릉(禧陵) 곁에 조성되었으나, 1562년(명종 17) 가을에 지금의 자리인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으로 천장되었다.

조성 경위

중종은 1544년(중종 39) 11월 15일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승하하였다. 중종의 산릉을 조성하기 위해 우의정(右議政)윤인경(尹仁鏡)을 총호사(摠護使)로 삼아 산릉도감을 설치했는데, 공조(工曹) 판서(判書)유인숙(柳仁淑),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황헌(黃憲), 이조(吏曹) 판서신거관(愼居寬)을 제조(提調)로 임명하였다. 산릉의 터를 선정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풍수에 대한 논란이 있어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12월 13일이 되어서야 희릉의 서쪽에, 서북쪽을 등지고 동남쪽을 향해 앉은 자리로 능을 조성하기로 정하였다.

희릉은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이다. 이미 마련되어 있는 왕비의 능과 같은 골짜기에 왕의 능침을 조성하는 것이므로, 희릉의 정자각을 새로 조성하는 중종의 능침 중간 지점으로 옮겨 함께 사용하도록 하였다(『중종실록』 39년 12월 23일).

중종의 능호에 대한 논의도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내상(內喪), 즉 왕비의 초상이 먼저 있어서 능호와 전호를 이미 정한 경우에는 왕이 승하하더라도 호를 바꾸지 않은 전례가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왕과 왕비의 위계에 어긋나므로 장경왕후의 능호였던 희릉을 왕릉의 능호에 따라 정릉이라 바꾸어 부르게 하였다.

한편 중종의 장례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545년(인종 1) 7월 1일, 중종을 계승한 인종이 승하하였다. 인종은 부왕의 삼년상을 마치지 못하고 병을 얻어 효를 다하지 못했으니 자신을 부모 곁에 묻어 달라는 유교를 남겼다(『인종실록』 1년 7월 4일). 그에 따라 정릉의 백호(白虎) 언덕 너머에 인종의 능인 효릉(孝陵)이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성상황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12면으로 둘렀고, 그 앞에는 혼유석과 장명등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장명등 좌우에는 망주석 1쌍을 배치하였으며, 그 남쪽으로 문인석과 무인석 각 1쌍과 마석 2쌍을 두었다. 봉분 주변으로는 석양과 석호가 2쌍씩 배치되었다.

능 아래 84보 위치에 정자각이 정전 3칸, 배위청 2칸 규모로 조성되었으며, 그 동쪽에는 수복방이, 서쪽에는 수라간이 건립되었다. 1755년(영조 31)에 정자각의 동북쪽에 표석과 비각을 세웠다. 수복방과 수라간은 소실되어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변천

1562년(명종 17)에 현재의 위치로 천릉하면서 단릉이 되었다. 정릉의 천릉은 1549년(명종 4)에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정릉의 산세를 다시 살피도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 문정왕후는 정릉의 주산(主山)이 좋지 않다는 말이 인종대부터 있었다며, 자리를 잘 보는 사람을 골라 다시 살필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우의정상진(尙震), 예조 판서윤개(尹漑), 관상감 제조김익수(金益壽) 등이 정릉을 살펴보고 흠잡을 데가 없다고 아뢴 까닭에 천릉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 뒤 1552년(명종 7)에 또다시 풍수설을 들어 정릉의 길흉을 논한 익명의 글이 승정원(承政院)에 내려졌다(『명종실록』 7년 4월 15일). 결국 몇 차례의 논란 끝에 1562년(명종 17) 8월 20일에 옛 능에서 재궁을 옮겨 9월 4일에 새로 조성한 정릉에 장사지냈다.

문정왕후가 강력히 주장해 실행에 옮긴 정릉의 천릉은 뒤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명종실록』을 편찬한 사관은 이때의 천릉에 대해, 문정왕후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중종이 이미 장경왕후와 같은 능에 있으므로 자기가 죽은 뒤 중종과 같은 곳에 묻힐 수 없을 것이라 여기고 풍수설을 핑계로 천릉을 행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또 요승 보우(普雨)와 윤원형(尹元衡) 등이 결탁하여 보우가 주지로 있던 봉은사(奉恩寺)에 가까운 선릉의 동쪽 언덕으로 옮긴 것이라고 평하였다. 실제로 새 정릉은 수시로 침수되어, 천릉이 잘못된 일이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지대가 낮아 매년 장마철이 되면 정자각 아래부터 홍살문과 재실까지 물이 고여 건물이 침수되었는데, 제물(祭物)을 수송하느라 작은 배로 정자각까지 왕래할 정도였다고 한다(『선조실록』 26년 4월 28일). 해마다 비가 많이 내리면 보토와 보수 공사를 해야 했으므로 비용도 많이 들었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왜적이 침입하여, 선릉의 능침을 불태우고 정릉의 능침을 파헤치기도 하였다. 게다가 명종은 문정왕후의 국장 때, 능을 옮긴 뒤 나라에 길한 일이 없었다면서 문정왕후의 능침을 정릉 곁에 모시지 않고 따로 길지를 택해 현재의 태릉(泰陵)에 조성하였다.

참고문헌

  • 『선정릉지(宣靖陵誌)』
  • 문화재청, 『선정릉 재실 및 행랑채 보수공사 수리보고서』, 문화재청, 2005.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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