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康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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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종과 비(妃)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능.

개설

명종은 1567년(명종 22) 6월 28일에 창덕궁의 양심합(養心閤)에서 승하하였다. 양주(楊州)에 위치한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태릉(泰陵) 동쪽 언덕에 강릉(康陵)을 조성하고 그해 9월 22일에 장사지냈다. 1575년(선조 8) 2월에 인순왕후가 승하하자, 명종의 능 동쪽에 나란히 합부하여 쌍릉으로 능침을 마련하고 4월 28일에 장사지냈다. 강릉의 두 능침은 해방(亥方)을 등지고 사방(巳方)을 바라보는 방향, 즉 북북서를 등지고 남남동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배치되었으며, 봉분 주변은 병풍석 12면으로 둘러싼 뒤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여 20칸 규모로 조성하였다. 봉분의 동·서·북 삼면은 곡장이 둘러싸고 있으며, 혼유석은 각각 설치하여 2개가 놓였다. 혼유석을 제외한 나머지 석물은 모두 합설하여 하나의 능침 제도로 조성하였다. 따라서 중앙에 장명등을 하나 배치하고, 그 좌우에 망주석 1쌍을 놓았다. 그 남쪽으로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문·무인석에 각각 마석 1쌍을 두었으며, 봉분의 둘레에 양석과 호석을 2쌍씩 번갈아가며 배치하였다.

정자각은 능 아래 59보 정도에 위치하며, 정자각 남쪽으로 74보 정도에 홍살문이 자리하고 있다. 정자각의 동쪽에는 표석이 있는데, 1753년(영조 29)에 비각을 세웠다. 정자각의 남쪽으로 수라간 3칸, 동쪽으로 수직방 3칸이 있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다.

『춘관통고(春官通考)』가 기록된 1788년(정조 12) 무렵에는 홍살문의 서쪽 300보 정도에 전사청이 8칸 규모로 조성되었으며, 그 곁에 제기고가 있고, 안향청 6칸, 재실 10칸의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는 소실되어 그 모습을 알 수 없다.

조성 경위

1567년(명종 22) 9월에 강릉이 완성되고 그달 22일에 장사를 지내고 신탑을 정자각에 모시고 안릉전(安陵奠)을 지낼 수 있었다. 3년간의 상례를 모두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571년(선조 4)에 정자각이 화재로 소실된다. 소실된 정자각을 새로 중건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찾기 못했으나, 1578년(선조 11)에 강릉의 정자각을 지은 지 7∼8년도 못 되었는데 추녀와 선자연이 모두 빠졌으므로 공장(工匠)과 감동제조(監董提調)를 추고하고 도청색(都廳色) 낭(郞)은 파직하였다는 기록(『선조실록』 11년 1월 11일)을 통해 정자각이 중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575년(선조 8)에 인순왕후를 합부할 때는 이미 명종의 신탑을 모시고 있던 정자각이 있으니, 가정자각(假丁字閣)만 조성하여 왕후의 상례를 지내고 철거하였다. 이후 명종과 인순왕후의 신탑을 기존 정자각에 합하여 모신 것이다. 능을 구성하는 건축물 중 봉분을 제외하면 정자각이 가장 중심이 된다. 정자각은 목조건물이므로 화재와 물에 취약하다. 강릉의 정자각도 여러 차례 소실되고 재건되면서 1567년에 조성된 모습과 다른 형태로 유지 보수된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왜적에 의해 조선의 왕릉을 도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로 인해 대왕릉의 여기저기에 불탄 흔적이 있고, 왕후릉은 모두 불에 탔으며 정자각 또한 소실되었다(『선조실록』 26년 2월 20일). 또 1695년(숙종 21)에 중건공사가 있었는데, 당시 예조 판서 겸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박태상(朴泰尙)이 지은 「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이 최근 발견되었다.

오늘날 강릉의 정자각은 정전 3칸, 배위청 3칸으로 총 6칸이다. 조선시대 정자각은 정전 3칸에 좌우 익각을 갖추고 배위청을 3칸으로 조성한 8칸 규모와 정전 3칸에 배위청 2칸으로 5칸 규모로 조성되었다. 8칸으로 조성된 정자각 중에서 일부 수리과정에서 정전의 좌우 익각이 제거된 채 6칸으로 남겨진 사례가 있는데, 강릉의 정자각이 그러한 사례로 보여진다.

1706년(숙종 32)에 선릉(宣陵)의 정자각을 중건할 때 1695년(숙종 21)에 있었던 강릉 정자각의 중건 사례를 살펴보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을 통해 강릉 정자각의 본래 규모는 8칸으로 조성되었으나, 1695년에 중건과정에서 익각이 사라지고 정전 3칸에 배위청 3칸으로 유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753년(영조 29)에 정자각 동쪽에 세워진 표석을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세웠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강릉개수도감의궤(康陵改修都監儀軌)』
  • 『강릉지(康陵誌)』
  • 『춘관통고(春官通考)』
  •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0.
  • 김왕직, 「조선왕릉 8칸 정자각 고찰」, 『한국건축역사학회춘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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