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합(養心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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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대조전 영역을 둘러싼 ‘口’자형 행각 중 남동쪽의 집채.

개설

양심합의 옛 이름은 정종 때 집현전(集賢殿)을 고쳐 부른 ‘보문각(寶文閣)’이다(『정종실록』 2년 1월 10일). 보문각은 고려 때부터 궁궐의 도서관으로 쓰인 건물의 이름이다. 양심합은 창덕궁의 ‘재전(齋殿)’으로 사용되었는데, 경희궁에서 인선왕후(仁宣王后)를 장례 지내고 창덕궁으로 돌아와 재실로 삼았기 때문이다. 현종, 원빈홍씨(元嬪洪氏), 순원왕후(純元王后) 등이 이 집에서 승하하였다.

현종 때는 신하들이 드나들며 소대하여 사용 빈도가 매우 높았다. 대조전(大造殿), 즉 내전의 영역에 딸려 있으면서 이렇게 쓰인 것은 위치상 모순되어 보인다(『태종실록』 17년 1월 19일)(『세종실록』 11년 4월 27일). 양심합은 희정당(熙政堂) 후면과 연접한 장순문(莊順門)으로 드나들게 되어 있어, 중궁전보다는 편전인 희정당과 건물의 관계가 더 밀접해 보인다.

위치 및 용도

양심합은 대조전의 남동쪽 행각이며 희정당의 후원과 연접해 있다. 필요에 따라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 왕이 신하를 소대하고 경연하는 장소, 책을 보관하는 서고, 왕이 치료를 받는 장소, 대비 승하 후 왕이 삼가하며 지내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망곡례를 행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정조 때 홍국영(洪國榮)의 누이동생인 원빈홍씨가 후궁으로 입궁하였는데 입궁한 지 불과 1년여 만에 양심합에서 사망했다. 이곳이 원래 원빈홍씨가 머물던 처소인지, 사망 직전에 옮겨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후궁의 처소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綏嬪朴氏) 또한 순조와 가까이 통행하기 위해 양심합에 머물렀다[『순조실록』부록 행장]. 철종 때는 순원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변천 및 현황

언제부터 대조전의 이곳을 양심합으로 불렀는지 알 수 없지만 건립 시기는 대조전의 영건과 함께 이루어졌던 것 같다. 1833년(순조 33) 10월 내전의 화재로 대조전을 비롯한 주변 건물이 소실되어 다음 해 9월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1917년 11월 다시 대조전에 화재가 있어 내전이 모두 탔고, 3년 뒤 경복궁 내전 건물을 이건하여 창덕궁 내전의 중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옛 제도와는 다른 지금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형태

「동궐도(東闕圖)」와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에서 보이는 양심합은 조금 다른 형태를 보인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전면 기둥열의 초석이 장초석으로 변화된 것과 지붕의 구성이 팔작지붕으로 된 것이다. 집의 규모는 정면 9칸으로 「동궐도형(東闕圖形)」을 포함하여 「동궐도」, 『창덕궁영건도감의궤』 모두 일치한다. 다만 측면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동궐도형」에 의하면 전·후면에 모두 툇마루를 두었고 동쪽 세 번째 칸부터 2칸이 마루로 되어 있으며 양쪽에 방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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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
  • 『한중록(閑中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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