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립(崔岦)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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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최립 |
한글표제 | 최립 |
한자표제 | 崔岦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학자/문학가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명종~선조 |
집필자 | 김구진 |
자 | 입지(立之) |
호 | 간이(簡易), 동고(東皐), 간이당(簡易堂)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39년(중종 34) |
사망 | 1612년(광해군 4) 7월 11일 |
본관 | 통천(通川) |
주거지 | 서울 근교 통진(通津), 평안도 평양(平壤)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고양(高陽) 압도(鴨島) |
증조부 | 최상(崔湘) |
조부 | 최세영(崔世瀛) |
부 | 최자양(崔自陽) |
모_외조 | 무송윤씨(茂松尹氏): 윤운필(尹芸弼)의 딸 |
처_장인 | 예안 이씨(禮安李氏): 이사종(李嗣宗)의 딸 →(자녀)1남 1녀 |
자녀 | (1자)최동망(崔東望) (1녀)이성원(李誠元)의 처 (서1자)최동문(崔東聞) (서2자)최동관(崔東觀) |
저술문집 | 『간이집(簡易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최립(崔岦) |
총론
[1539년(중종 34)∼1612년(광해군 4) = 74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문장가. 행직(行職)은 승문원(承文院) 제조(提調)·형조 참판(參判)이다. 본관은 통천(通川)이고 주거지는 서울 근교 통진(通津)인데, 만년에 평양(平壤)에서 살았다.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동고(東皐), 또는 간이당(簡易堂)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로 병조 참판에 추증된 최자양(崔自陽)이고, 어머니 무송윤씨(茂松尹氏)는 윤운필(尹芸弼)의 딸이다. 증조부는 증 종부시 정최상(崔湘)이고, 조부는 증 좌승지최세영(崔世瀛)이다. 최립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서 그 이름을 떨쳤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55년(명종 10) 17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1561년(명종 16)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3세였다.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고, 여러 외직을 지낸 뒤에, 1577년(선조 10)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581년(선조 14) 황해도에 기근이 들었을 때 재령 군수(載寧郡守)최립 등이 구황(救荒)을 잘하였는데, 황해도관찰사가 이 사실을 계달하여, 명종이 표리(表裏) 한 벌씩을 내려 주었다.(『명종실록(明宗實錄)』 참고.)그해 김장생(金長生)의 아버지 김계휘(金繼輝)가 변무 주청사(辨誣奏請使)에 되자, 고경명(高敬命)을 서장관으로, 최립을 질정관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는데, 두 사람이 사령(辭令)에 능하였으나 밀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참고.) 이리하여 최립은 다시 주청사의 질정관이 되어서, 중국에 다녀왔다.(『아계유고(鵝溪遺稿)』 연보 참고.)
1584년(선조 17) 호군(護軍)으로 있을 때 이문(吏文) 정시(庭試)에 수석을 차지하여,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 이문은 중국과 왕래하는 외교 문서에만 사용되는 특별한 글이다. 1592년(선조 25) 공주목사(公州牧使)가 되었다가,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선조실록』 참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외교 문서를 보내는 일이 많아졌으므로, 최립을 승문원 제조에 임명하여, 외교 문서를 전담하게 하였다.
1593년(선조 26) 세자 광해군(光海君)의 책봉(冊封)을 요청하는 주청사(奏請使)를 명나라에 보낼 때 선조가 최립을 정사(正使)로 추천하였으나, 대신들이 반대하여, 1594년(선조 27) 최립은 주청사의 부사(副使)가 되었다.(『선조실록』 참고.) 1595년(선조 28)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가 되고 승문원 제조를 겸임하였는데, 최입은 승문원 제조에서 물러나기를 간청했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1596년(선조 29) 행호군(行護軍)이 되어 승문원 제조를 겸임하였는데, 병으로 물러나고자 하니, 조정에서 최립을 안변부사(安邊府使)에 임명하였다. 1597년(선조 30) 사간원이 아뢰기를, “안변부사최립은 지난번에 신병 때문에 승문원 제조의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지금 중국의 문서가 나날이 누적되고 있어서, 제술(製述)하고 응답하는 데에 한 사람이라도 중요하니, 도로 승문원에 불러주소서.” 하니, 선조가 최립을 불러서 승문원 제조에 다시 임명하였다.(『선조실록』 참고.)
1598년(선조 31)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에 있을 때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영위사(迎慰使)로 나갔다가, 임금에게 복명(復命)하지 않은 채 병이 났다고 핑계대고 통진(通津)의 집으로 내려가 버렸다. 선조가 노하여,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의 도리인가? 설사 실지로 병이 났더라도, 부축을 받고서라도 와서 복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집은 하루 일정이면 내려갈 수 있다. 최립의 마음속에는 나라에 임금이 있다고 여기는 것인가, 아니면 없다고 여기는 것인가?” 하였으나, 선조는 곧 용서하였다.(『선조실록』 참고.) 1599년(선조 32) 여주목사(驪州牧使)가 되었는데, 6년 동안 재임하면서 붓을 들지 않았으므로, 율시(律詩) 단 1수(首)만을 지었다고 한다.(『선조실록』 참고.) 1605년(선조 38) 호군이 되었고, 1606년(선조 39) 다시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다.
1606년(선조 39) 사헌부에서 전의 일을 가지고 탄핵하기를, “중추부 동지사최립이 양계(兩界) 지방의 관기(官妓)를 데려다가 첩으로 삼았으니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推考)하소서.” 하였다. 그는 평양 기생 첩 때문에 파직되었다. 1607년(선조 40)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갔다가, 1608년(선조 41) 형조 참판이 되었는데, 나이가 70세가 넘었다고 하여,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만년에 평양에서 관기 출신 첩과 함께 살다가 1612년(광해군 4) 7월 11일 노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4세였다.
문장과 저서
최립은 중국 한(漢)나라 반고(班固)와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문체를 본받아 의고문체(擬古文體)에 뛰어났었다. 그는 문장을 수련하려고, 여러 차례 궁벽한 고을의 수령을 자청하여, 반고의 『한서(漢書)』를 수천 번 정독(精讀)하고, 그 문장을 익히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 최립은 조선 중기 의고체 문장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그러나, 만년에는 송(宋)나라 소식(蘇軾)과 구양수(歐陽脩)의 문장을 몹시 좋아하여, 항상 그들의 글을 가지고 다니면서 문장을 연마하였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4년 7월 11일조 최립(崔岦)의 「졸기(卒記)」에서는, “그의 문체를 살펴보면, 논란의 소지가 없지 않으나, 중국의 여러 대가와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최립의 문장은 날카로운 의지와 담박한 의사를 가지고 있어서 그 격조가 상당히 뛰어나서, 마침내 문체(文體)의 일가를 이루었다. 그 결점을 논한다면, 문체가 좀 협착한 느낌이 있다는 점이다.” 하였다. 그는 의고문체에 치우쳤기 때문에 평이한 문체를 멀리하고 선진(先秦) 시대의 고문(古文)을 본떠서 어렵게 글을 꾸미려는 경향이 있었다.
1561년(명종 16) 23세 때 식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바로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에 보임되자, 여러 승지(承旨)들이 그를 시험해 보려고 승정원에 있던 풀[草]·나무[木]·꽃[花]·돌[石] 등 40여 가지를 운(韻)으로 매기고 각각 한 수의 율시를 짓게 하였다. 그때 최립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수씩 글을 완성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그의 시(詩)는 보통 쓰지 않는 어려운 시구(詩句)가 많았다.
선조 때에 최립의 문장[文]과 차천로(車天輅)의 시(詩), 한호(韓濩)의 글씨[書]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일컬었다.(『성호사설(星湖僿說)』 권28 참고.) 당대 문장가 교산(蛟山)허균(許筠)이 논평하기를 “최립은 문장이 간결하고도 고풍(古風)스러워서 당대의 대가가 되었다.” 하였다.(『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26 참고.) 그러나 정조 때 사평(史評)을 보면, “최립은 고문(古文)을 가장 잘 지어 ‘해동(海東)의 대가(大家)’라고 불리어졌으나, 풍부하고 민첩한 글은 차천로를 따라가지 못하였다.” 하였다.『정조실록(正祖實錄)』정조 16년 4월 3일조 기사 참고.)
1631년(인조 9) 10월 인조 때 교서관(校書館)에서 아뢰기를, “최립은 문장으로 한 시대를 울렸는데, 논자는 ‘근대 문인의 작품 가운데 후세에 전할 만한 것으로는 이 사람의 작품만한 것이 없다.’ 합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로 유고(遺稿)가 흩어져서 장차 완전히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지난번에 조정의 신하들이 상의하여 통문(通文)을 돌리고 사재(私財)를 모아서, 활자를 사용해서 책으로 간행하였습니다.” 하고, 최립의 문집 『간이집(簡易集)』 2책을 인조에게 바쳤다.(『인조실록(仁祖實錄)』 참고.) 그때 상촌(象村)신흠(申欽)이 쓴 『간이집』「서문」에서 조선 시대의 문장가로 괴애(乖崖)김수온(金守溫)·점필재(佔畢齋)김종직(金宗直)·간이재(簡易齋)최립 세 사람을 거론하면서, “점필재가 가장 우수한 것은 그의 글에는 논리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간이집』의 글은 좋은 곳은 가끔 선인(先人)들을 능가할 만하나, 나쁜 곳은 속에 감추어진 것이 모조리 드러나서 사람을 쉽게 싫증나게 만든다.” 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14 「문예전고」 참고.)
최립의 문집 『간이집』은 인조 때 편찬 간행되었고, 그 밖에 『십가근체시(十家近體詩)』와 『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등이 남아 있다.
이문(吏文)과 역학(易學)
최립은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으나, 원래 가난하고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를 보거(保擧: 보증 천거)해 줄 만한 배경이 없어서 출세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오로지 남들이 어려워하는 중국 선진(先秦) 시대 문장이나, 이문과 『주역(周易)』 해석에 매달려 문장을 갈고 닦거나, 또는 독특한 자기 이론을 내세워서 그 이름을 드날렸다.
이문은 조선 시대 중국 명(明)나라와 외교문서를 왕래할 때 사용하던 특수한 문체로 승문원에서 특별히 교재를 만들어 담당 관원들에게 가르쳤다. 최립은 젊어서 이문을 혼자 학습하여, 이문에 통달하였다. 1586년(선조 19) 10월 조정의 백관들에게 이문을 시험보일 때 호군최립이 이문 정시에서 수석을 차지하였으므로, 선조가 그를 종2품하 가선대부로 승품하고, 승문원의 일을 맡겼다.(『선조실록』 참고.)
1591년(선조 24) 10월 조선에서는 진주사(陳奏使)한응인(韓應寅) 등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당시 일본이 조선을 위협하고 명나라로 쳐들어가려고 한다는 정보를 알렸다. 그때 주문(奏文)을 최립이 지었는데 내용이 매우 상세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명나라에서 조선과 일본이 내통한다고 의심할까봐 두려워 조선 통신사(通信使)가 일본에서 문답한 내용을 자세히 진술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국조보감(國朝寶鑑)』 권30 참고.)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이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면서, 외교 문서의 왕래가 더욱 잦아졌다. 승문원 제조최립이 외교 문서를 전담하면서 선조의 신임을 받았는데, 당시 명나라에 보낸 국서(國書)들이 모두 최립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최립 묘갈명(崔岦墓碣銘)」 참고.) 이수광(李睟光)이 말하기를, “승문원의 제조는 반드시 당세의 문장가로서 명망이 있는 사람을 엄격히 선발하여 임명하였는데, 비록 최립과 같이 문장의 재주를 가진 사람도 <임진 왜란> 이후에 비로소 승문원 제조에 임명되었다. 당시 부제조(副提調)를 ‘공사 제조(公事提調)’라고 불렀는데, 3~4명에 불과하였다.” 하였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24 참고.)
1593년(선조 26) 2월 좌의정윤두수(尹斗壽)가 아뢰기를, “전주부윤최립은 사대(事大) 문서 작성에 필요한 사람이니, 지금 불러와야 합니다.” 하니, 선조가 최립을 불러서 승문원 제조에 임명하였다.(『선조실록』 참고.) 이때부터 1599년(선조 32)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부임하기까지 6년 동안 승문원 제조로 있으면서 외교 문서를 전담하였다. 당시 승문원 도제조로서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윤근수(尹根壽), 중추부 지사이덕형(李德馨), 중추부 지사심희수(沈希壽) 등이 있어서, 최립이 혼자서 외교 문서를 만들지 못하고, 이들의 의견을 참작하여 만들었다. 그때 중국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咨文)과 주문(奏文)의 외교 문서를 작성할 때 대신 이하 여러 사람들은 최립이 만든 글을 지우고 고치며 어지럽게 수정하여 거의 완전한 글귀가 없었으므로, 최립이 이것을 몹시 안타깝게 여겼다. 최립은 승문원 제조에 임명되고 전후 세 차례나 명나라 북경에 가서 명나라 예부(禮部)에 글을 바쳤는데, 그때마다 명나라 여러 학사(學士)들이 최립의 글을 보고 무릎을 치면서 탄복하였다.
최립은 제자백가(諸子白家)의 글에 정통하였고, 또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최립 묘갈명」 참고.) 그는 역학(易學)에 심취한 나머지 스스로 깊이 그 본지를 터득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선조가 『주역』 교정의 책임을 그에게 맡기자, 그는 일하기 편한 고을의 수령으로 나가서 그 일을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마침내 간성(杆城) 고을의 수령으로 나갔는데, 부임하자 책을 완성하는 데 전심하고, 고을의 정사는 돌보지 않았다. 송사(訟事)가 이를 때마다 그는 항상, “내가 너의 고을에 온 것은 책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하고, 이를 물리치고 돌보지 않았다.
마침내 『주역본의(周易本義) 구결부설(口訣附說)』 2권을 완성하여, 선조에게 바쳤는데, 정자(程子)의 전(傳)과 주자(朱子)의 본의(本義)와 내용이 달랐기 때문에 당시 널리 통용되지 못하였다.(『광해군일기』최립의 「졸기」 참고.) 1709년(숙종 35) 6월 영의정최석정(崔錫鼎)이 상소하기를, “형조 참판최립이 저술한 『주역구결(周易口訣)』은 정자의 전과 주자의 본의를 인용하지 않았지만, 그가 편찬하여 선조에게 바쳐서 간행(刊行)되었는데, 그때 선조가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였으나, 그 당시 이를 배척하였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 보궐정오 참고.) 최립의 『주역본의 구결부설』은 정주학(程朱學)과 다른 자신의 독특한 이론을 내세웠기 때문에 당시의 주자학자들에게 배척을 당하였던 것이다.
성품과 일화
최립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간결하고 고귀하여,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를 찬양하고 존경하였으나,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서 너무 거만하다고 욕하였다. 『광해군일기』최립의 「졸기」를 보면, “최립은 출신이 몹시 한미하였으나, 위인이 교만하여 일찍이 당시 문사(文士)들의 실력을 인정한 적이 없었다. 비록 예원(藝苑)의 우두머리가 지은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한번 훑어보고 거만스럽게 내던지면서 한 마디의 말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난을 많이 받았다.” 하였다. 최립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나라 문단에 제일인자로 군림하던 봉주(鳳州)왕세정(王世貞)을 만나서 문장을 논하였는데, 명나라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았다. 특히 명나라 병부(兵部) 찬획(贊畫)유황상(劉黃裳)과 같은 사람은 최립의 글을 읽어볼 때마다 반드시 향을 피우고 손을 씻은 다음에 경건한 자세로 글을 읽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최립이 전주부윤으로 있다가 중추부로 불려와 중국과의 외교 문서를 전담하였다. 당시 승문원에는 윤두수·이덕형 같은 거물급 제조(提調)가 많아서 각자 자기 의견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외교 문서를 하나 만들 때마다 여러 사람들의 토막글을 짜깁기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므로, 최립은 무척 고심하였다. 당시 그가 이것을 풍자한 시의 한 구절을 보면, “난세에 글을 쓰는 것이 바야흐로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데[亂世用文方釋馬] 남의 구미에 맞춰 글자를 짜깁기하니, 더욱 똥파리가 와글거리는 것 같도다.[從人安字轉成蠅]”라고 하였다. 상촌신흠은 이 시를 논평하기를, “매우 해학적인 표현을 근사하게 구사하면서도, 시의 율려(律侶)가 자연스럽게 들어맞았다.” 하였다.(『상촌집(象村集)』 권60 참고.)
1593년(선조 26) 10월 선조가 이르기를, “주청사로 누가 합당하겠는가? 최립이 어떻겠는가?” 하니, 병조 판서이항복(李恒福)이 아뢰기를, “최립이 글을 잘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입니다만, 임기응변을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선조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최립의 품계를 더 올려 보내도록 하라. 이는 국가의 존망이 달린 일이니, 비록 저지당하더라도 그는 죽기로 기약하고 기필코 주달할 것이다, 중로에서 돌아오지 말라는 뜻을 일러서 보내라.” 하였다.(『선조실록』 참고.) 11월 최립은 정사로 떠날 준비를 하려고 중국에 주청할 내용을 문의하였으나, 윤11월 승문원 도제조가 아뢰기를, “이번의 사은(謝恩) 행차는 관계되는 바가 아주 중대하므로, 이조로 하여금 상사(上使)를 차출하게 하고, 최립을 부사(副使)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선조가 그대로 따랐다.(『선조실록』 참고.) 이때 최립은 자신의 한계성을 절감하고, 현실의 장벽을 넘어보려고 몸부림쳤는데, 이것이 그의 시문(詩文)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고양(高陽) 압도(鴨島)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부인 이씨(李氏)와 합장하였다. 존와(存窩)최석정(崔錫鼎)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예안이씨(禮安李氏)는 이사종(李嗣宗)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최동망(崔東望)은 문과 출신으로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를 지냈고, 딸은 별좌(別坐)이성원(李誠元)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 서자 2남을 두었는데, 최동문(崔東聞)·최동관(崔東觀)이다.(「최립 묘갈명」 참고.)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간이집(簡易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간이집(簡易集)』
- 『아계유고(鵝溪遺稿)』
- 『율곡전서(栗谷全書)』
- 『명곡집(明谷集)』
- 『계곡집(谿谷集)』
- 『계산기정(薊山紀程)』
- 『국조보감(國朝寶鑑)』
- 『난중잡록(亂中雜錄)』
- 『담헌서(湛軒書)』
-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석주집(石洲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심전고(心田稿)』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열하일기(熱河日記)』
-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 『오음유고(梧陰遺稿)』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우계집(牛溪集)』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죽창한화(竹窓閑話)』
- 『청성잡기(靑城雜記)』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해유록(海游錄)』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