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관(試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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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거 시험의 운영과 감독을 맡았던 관원.

개설

시관(試官)은 맡은 역할에 따라서 고시관(考試官)·감시관(監試官)·차비관(差備官)으로 세분화되었다. 시험의 공정하고도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고시관은 시험의 출제와 채점을, 감시관은 부정 적발을, 차비관은 시험장 안과 바깥에서 필요한 잡무를 각각 맡았다. 시관에 대한 규정은 『경국대전』에서 고시관에 대한 것으로 한정되었다가 『속대전』에서는 감시관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과거의 공정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시관의 종류가 늘어났지만, 시관의 부정행위는 계속되었다.

내용과 특징

시관은 고려시대 958년(광종 9)에 과거제를 처음으로 실시하면서 쌍기(雙冀)를 지공거(知貢擧)로 삼은 데서 비롯되었으며, 1083년(문종 37)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더 두어 지공거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고려후기에 이르러 시관인 지공거 및 동지공거와 급제자 사이에 형성된 좌주(座主)와 문생(門生)의 관계가 부자(父子) 관계 못지않게 강고한 결속력을 지니면서 관료 사회 내부에 사당(私黨)을 형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즉위교서(卽位敎書)에서 좌주-문생의 풍속이 과거제를 실시한 본래 취지에 크게 위배되기 때문에 혁파하겠다는 원칙을 천명하였다. 그 뒤 1413년(태종 13)부터 시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성과가 나타나는데, 조처의 핵심은 각종 과시(科試)를 주관하는 관서와 참여하는 관서를 확정하고, 시관의 품계를 종전보다 낮추는 대신 숫자를 3∼8명으로 늘인 것이었다(『태종실록』 13년 1월 6일). 이는 시관의 권한을 분산시키고 선발의 공정성을 확보하여, 급제자가 시관에게 사적으로 은혜를 입었다는 의식을 가지지 않도록 하려는 정책적 의도였다.

조선시대 시관은 기능상 크게 고시관·감시관·차비관으로 분류되었다. 고시관은 고관(考官)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다시 해당 과시의 총책임자라 할 수 있는 상시관(上試官)과 그를 보좌하는 참시관(參試官)으로 나뉘었다. 고시관의 임무는 소정의 절차에 따라서 시험문제를 출제하여 시험을 실시하고 과장의 질서를 유지하며, 답안지를 채점하여 합격자를 발표하는 일이었다. 감시관은 과거가 실시되는 과정에서 자행되는 부정을 적발하고, 차비관을 감독·규찰하는 업무를 맡았으며, 사헌부 및 사간원에서 차출되었다. 차비관이란 녹명관(錄名官)·입문관(入門官)·수협관(搜挾官)·금란관(禁亂官)·수권관(收卷官)·등록관(謄錄官)·봉미관(封彌官)·사동관(査同官)·지동관(枝同官) 등으로 구성되고, 시험의 각 단계마다 시험장 안팎에서 필요한 온갖 일들을 도맡아 하였으며, 여러 관서에서 동원되었다.

문반 관료를 선발하는 문과(文科)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式年試)와 부정기적으로 실시하는 별시(別試)가 있었는데, 『경국대전』에서는 식년시에 대한 규정이 마련되는 가운데 시관에 대한 것도 구비되었다. 식년시는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의 세 단계를 거쳐서 33명을 선발하는 시험이었으며, 초시는 다시 응시 대상과 실시 주체에 따라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로 구분되었다. 관시는 성균관에 거관(居館)하면서 출결 점수인 원점(圓點) 300점을 획득한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대상으로 성균관에서 실시되었으며, 한성시는 서울에 거주하는 유생과 당하관(堂下官) 관원을 대상으로 서울에서 시행되었고, 향시는 전국 8도에서 각각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유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그런데 초시 시관에 대한 『경국대전』의 규정은 상세하지 않아서 관시와 한성시는 시행 주체 관서에서 알아서 시관을 정하고, 과거장에 등록하는 녹명(錄名)을 하도록 하였으며, 향시에서도 각 시험 장소마다 3명의 고시관을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각도의 관찰사가 임시 차출 관료인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녹명하도록 하였다. 초시 합격자들을 서울에 모아 장소를 두 곳으로 나누어 시험을 치르는 식년시의 복시에서도 정3품관 이상에서 1명을 골라 상시관, 통정대부(通政大夫) 이하와 5·6품관 이상에서 2~3명을 골라 참시관으로 각각 임명하게 하게 하는 등 대체로 시관에 대한 규정은 고시관에 대한 것에만 국한되고 감시관·차비관에 대한 것은 마련되지 않았다. 복시에서 선발한 33명을 전정(前庭)에서 시험 보아 등제(登第)를 결정하는 전시에서는 상시관을 독권관(讀券官), 참시관을 대독관(對讀官)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송대(宋代)의 전시에 시권을 채점할 때 왕 앞에서 독권관이 시권을 낭독하고 대독관이 그 옆에서 오독(誤讀)이 있는지를 살핀 데서 유래하였다. 전시의 독권관과 대독관에 대해서도 『경국대전』에서는 규정이 명확하지 않았으나, 2품 이상의 3명을 권독관, 3품 이하의 5명을 대독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다[『중중실록』 23년 10월 14일 11번째기사].

변천

식년시의 시관에 대한 규정이 보다 상세하게 구비된 것은 『속대전』에서였다. 이 법전에서는 관시에서 정3품 이하 3명을 고시관으로, 사헌부의 감찰(監察) 1명을 감시관으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한성시에서는 한성부 낭관(郎官)과 사관(四館)의 7품 이하관 각 1명이 녹명을 담당하고, 두 곳으로 나누어 실시되는 시험장에는 1명의 상시관과 2명의 참시관을 보내고, 감찰 1명을 감시관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향시에서는 충청·전라·경상도의 좌도(左道)와 평안도의 남도(南道)에는 상시관을 서울에서 내려 보내는 경시관(京試官)으로 임명하도록 하고, 충청·전라·경상도의 우도(右道)와 황해·강원·함경·평안도의 북도(北道)에는 도사(都事)를, 함경도의 남도에서는 평사(評事)를 각각 상시관으로 삼도록 하였다. 복시에서는 종2품 이상 3명을 상시관, 정3품 이하 4명을 참시관,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각각 1명씩을 감시관으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전시에서는 의정(議政) 1명을 명관(命官), 종2품 이상 2명을 독권관, 정3품 이하 4명을 대독관으로 삼게 하였다. 『경국대전』 반포 이후 과거가 여러 차례 실시되면서 시험의 공정하고도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서 식년시의 고시관에 대한 것은 물론 감시관의 임명에 대한 규정이 마련되어 『속대전』에서 법제화된 것이며, 이러한 식년시의 규정은 별시의 시관에 대한 규정을 마련하는 토대가 되었다.

시관의 임명 절차를 보면, 예조에서 3배수의 시관 후보자를 골라 승정원에 명단을 제출하면, 승정원에서 후보자를 궁궐에 불러 모여 있게 하는 동시에 후보자 명단을 왕에게 올려 낙점을 받았다. 그 뒤 낙점을 받지 못한 후보자는 집으로 돌아가고, 낙점을 받은 자는 왕에게 감사하는 뜻의 숙배(肅拜)를 올린 뒤에 시험 장소로 직행하였으며, 시관이 일단 시험 장소에 들어간 다음에는 가령 기년복(朞年服)이나 대소공친(大小功親)의 상을 당하더라도 부음을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 관시와 전시를 제외한 나머지 시험에서 시험 장소를 두 곳으로 나눈 것 역시 응시생이 가족과 친지일 경우 시관이 공정하게 시험을 운영할 수 없기 때문에 응시생과 상피(相避)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러나 조선의 핵심 엘리트이자 중요 정치 세력인 문반 관료를 선발하는 문과에서는 시관과 응시생의 부정이 계속되어 급제 자체가 취소되는 파방(罷榜)도 나타났다. 따라서 파방으로 인한 급제자들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선조대에는 부정의 원인을 분명히 가려 ‘시관에게 과오가 있으면 시관을 징계하고, 거자에게 문제가 있으면 거자를 처벌하도록’ 원칙을 정하였다. 그럼에도 정치 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이 깊은 시기일수록 문과를 실시할 때에는 시관의 불공정한 운영과 과거 응시생의 부정이 계속되었는데, 숙종대에 일어난 대규모 시험 부정 사건인 과옥(科獄)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숙종실록』 26년 2월 6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개정증보판), 집문당, 1994.
  • 조좌호, 『한국과거제도사연구』, 범우사, 1996.
  • 차미희, 『조선시대 과거시험과 유생의 삶』,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12.
  • 허흥식, 『고려과거제도사연구』, 일조각, 198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