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청전(穆淸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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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잠저(潛邸)이자, 태조 사후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진전(眞殿).

개설

목청전은 개성에 있었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거처하던 곳이다. 그의 사후 어진을 봉안한 진전으로 사용되었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후 중건되지 못하다가 1669년(현종 10) 수리되었다(『현종실록』 10년 1월 4일). 그러나 어진을 봉안하지는 않아 황폐화되었다. 1693년(숙종 19)에는 비(碑)를 세우고 어제시(御製詩)와 액자(額字)를 내리기도 했으나(『숙종실록』 19년 8월 30일), 그 이후로도 더 이상 건물을 중수하지는 않았다.

위치 및 용도

『세종실록』에 따르면, 목청전의 위치는 개경의 서대문인 숭인문(崇仁門) 안쪽 안정방(安定坊) 어배동(於背洞)으로 기록되어 있다[『세종실록』 지리지 구도개성유후사]. 목청전은 본래 태조의 잠저였으나 태종대 이후에는 태조의 어진을 모시는 진전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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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및 현황

목청전의 터는 본래 태조의 잠저가 있던 곳이다. 태조 사후인 1418년(태종 18) 태종의 명으로 전우(殿宇)를 짓고 계명전(啓命殿)으로 칭하였다. 태조의 화상을 모시며 전직(殿直) 2인을 두어 관리하게 했다. 1419년(세종 1)에는 전우 옆에 숭효사(崇孝寺)라는 절을 세워 명복을 빌게 했고 천태종(天台宗)에 붙여 밭 200결과 노비 100명을 주었다(『세종실록』 1년 5월 22일). 1422년(세종 4)에는 고려 시조의 진전 이름을 피하기 위하여 계명전을 목청전이라 바꿨다(『세종실록』 4년 1월 26일).

임진왜란 당시에는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잠시 봉안하는 곳으로도 사용하였으나 정작 이곳에 봉안한 어진은 소실되고 진전은 폐허가 되었다. 1617년(광해군 9) 개성부에 사는 진사 전대년(田大年) 등이 목청전을 다시 중건하자고 상소하였으나, 다른 공역에 밀려 중건되지 못하였다. 1669년(현종 10)에 송시열의 건의로 수리하기에 이르렀지만, 어진을 봉안하지는 않았다(『현종실록』 10년 1월 4일). 어진을 봉안하지 않은 목청전은 점점 황폐화되어 담장도 허물어지고 민간이 침범하기도 해서 1693년(숙종 9)에는 숙종이 비(碑)를 세우게 하고 어제시와 액자를 내리기도 했다(『숙종실록』 19년 9월 8일).

영조, 정조, 고종 연간에도 목청전을 중수하여 어진을 봉안하자는 유생들의 상소가 있었지만, 태조의 어진을 더 모사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왕들의 입장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대한제국 건립 후 고종의 황권 강화를 위한 황실 추숭 사업의 일환으로 목청전이 재건되고 어진이 재차 봉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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