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시(御製詩)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왕이 몸소 지은 시.

개설

어제시(御製詩)는 왕이 손수 지은 시를 가리킨다. 따라서 공적이건 사적이건 왕이 지은 시면 모두 어제시의 범주에 든다. 조선시대에 역대 왕의 시문을 모아 편찬한 책으로는 『열성어제(列聖御製)』가 대표적이다. 여기에는 역대 왕이 세자 시절부터 창작한 여러 시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어제시는 대부분 왕이 조정의 공식적인 행사에서 그 행사의 의미를 되새기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의미로 창작한 것들이다. 왕·왕비·대비 등의 장수 또는 쾌차를 기원하는 행사, 탄신·가례·환도(還都) 등을 기념하는 행사를 비롯해, 사직·종묘 등에서의 제향이나 능원으로의 행행(行幸), 궤장(几杖)의 진상, 문무과·기로과 등의 시행, 서적의 편찬과 간행, 활쏘기 및 내원(內苑)의 꽃구경, 기로연·양로연 등의 설행, 세자의 상견례 등의 행사에서는 왕이 시를 짓는 것이 상례였다. 따라서 어제시를 살펴보면 왕의 문학적 소양은 물론이고, 당대의 정치적 상황 및 각종 의식의 진행 사항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왕이 시를 지어 신하들에게 내려주면 신하들은 이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는데, 이를 ‘갱재(賡載)’ 또는 ‘갱운(賡韻)’이라고 한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부터 어제집(御製集)을 지속적으로 편찬하였다. 1463년(세조 9)에 세조는 형조 참판서거정(徐居正)에게 명하여, 태조·태종·세종·문종의 어제 시문(詩文)을 거두어 모으게 했다. 세조 이후의 왕들은 전대 왕의 어제집을 꾸준히 편찬했는데, 인조·숙종 연간에는 전대 왕의 어제집을 역대 선왕의 어제집에 합부(合附)하여 ‘열성어제’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이후 새로 왕이 즉위할 때마다 『열성어제』의 편찬 작업이 지속되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영조·정조·순조·고종·순종 등의 문집이 차례로 간행되었다. 여기에 수록된 어제시의 성격에 대해서는 최근에야 숙종과 정조를 중심으로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문치주의를 표방한 조선시대에는 어제시의 창작이 매우 성행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어제시’를 검색해 보면, 국역본과 원문에서 각기 200건 이상 총 500여 건의 기사가 추출된다. 이 검색 건수에 중국 황제가 지은 시가 일부 포함된 점, 같은 기사이지만 국역본과 원문 둘 모두에서 검색된 것이 포함된 것 등을 감안하더라도 어제시가 상당히 빈번하게 창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실제 양상을 살펴보면 왕에 따라 창작 횟수에 차이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정종·문종·단종·예종·인종·명종·효종·경종·헌종·철종·순종 등의 경우에는 어제시를 창작했다는 기록이 한 건도 보이지 않는다. 그 외의 왕들 또한 대개 서너 건에 그치는 데 비해, 국역본을 기준으로 세조가 19건, 연산군이 90건, 숙종이 16건, 영조가 47건, 정조가 22건에 이른다. 이는 기본적으로 이들 왕이 문예적 성향이 강해 시 짓기를 즐겨 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아울러 험난한 정치 상황에서 군신 간의 결속을 다지는 데 어제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어제시는 조정의 공식적인 여러 행사에서 지어졌으며, 그 내용은 대개 행사의 의미를 되새기고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세조는 경회루 후원에서 종친 및 입직(入直)한 여러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를 한 후 어제시를 지었다. 그 시에는 공신들의 도움으로 정변에 성공하여 왕위에 오른 일에 대한 회고와, 정사에 힘써 수성에 성공하리라는 다짐이 드러나 있다. 세조는 또 이 자리에서 사시도(四時圖) 족자(簇子)를 내어 보이며 이를 노래한 시를 짓고, 성임(成任)으로 하여금 족자에 쓰게 한 뒤 여러 신하들에게 차운하여 시를 지으라고 명하였다(『세조실록』 3년 11월 27일). 이때 지은 시를 편찬한 『사후어제시(射侯御製詩)』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전해지는데, 여기에는 신숙주가 지은 서문과 세조의 어제시를 비롯해 61명의 신하가 차운한 시 등 총 210수의 시가 실려 있다.

어제시는 왕이 자신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연산군은 황음무도하고 포악한 군주로 알려져 있지만 시 짓기를 즐겨 해서, 『조선왕조실록』에는 많은 어제시가 전한다. 연산군의 어제시에는 간관의 간언에 대한 불편한 심기나 신하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어 신하들을 경계하는 내용이 많다. 예를 들어 1504년(연산군 10)에 대간이 간언을 올리자, 연산군은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시로 표현하였다. 그러고는 승지들에게 시의 뜻을 해석해 올리고, 정승 및 의금부 당상관에게 차운하여 시를 지어 바칠 것을 지시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10월 15일). 연산군은 신하들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수단으로 어제시를 활용한 것이다.

영조는 경연에서 강론할 때나 세자를 가르치고 이끄는 자리에서도 어제시를 자주 지어,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예컨대 1741년(영조 17)에 세자에게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올리는 자리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당파에 따른 폐단을 일으키지 말고 세자를 잘 섬길 것을 당부하고, 이어서 어제시를 내리면서 근신(近臣)으로 하여금 화답하여 지어 올리게 하였다(『영조실록』 17년 6월 22일). 정조 또한 학문을 좋아한 군주답게, 어제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차운하도록 명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정조실록』 2년 9월 3일). 영조와 정조가 신하들과 수창한 시를 모아 놓은 갱재류(賡載類)의 시문첩(詩文帖)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상당히 많은 양이 전해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어제시는 왕 개인의 순수한 감회를 노래한 것과, 조정의 행사 및 의례 석상에서 지은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순수한 감회를 노래한 시를 통해 왕의 문예적인 취향과 인간적인 면모를 살펴볼 수 있으며, 공식적인 행사 자리에서 지은 어제시는 당시 정국의 동향과 조정의 행사 및 의례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조선의 왕은 기본적으로 상하의 정을 통하고, 문학과 학문을 진흥하려는 의도에서 어제시를 창작하였다. 그런데 한편으로 왕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시를 짓는 행위는 그 자체가 정치적인 의미를 띠는 행위이기도 하였다. 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신하들을 결속시키는 수단으로 어제시를 활용하였으며, 신하들은 때때로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성학(聖學)을 강조하면서 왕의 어제시 창작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1477년(성종 8)에 정언(正言)권경우(權景祐)가 경연 석상에서, 덕행이 근본이고 문예는 말단이라면서 성종이 어제시를 지어 신하에게 내린 일을 경계한 것이 그 예이다(『성종실록』 8년 9월 28일).

참고문헌

  • 『열성어제(列聖御製)』
  • 『사후어제시(射侯御製詩)』
  • 김남기, 「조선시대 君臣의 唱和와 그 의미」, 『한국한문학연구』38, 2006.
  • 이종묵, 「장서각 소장 『列聖御製』와 國王文集의 편찬과정」, 『장서각』1, 1999.
  • 이종묵, 「조선시대 어제시의 창작 양상과 그 의미」, 『장서각』19, 2008.
  • 이현지, 「성종·연산군대 왕실문학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