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자(簇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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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궁중에서 당악정재(唐樂呈才) 연행 시 정재의 내용을 글씨로 써서 배접한 의물(儀物).

개설

족자(簇子)는 당악정재를 공연할 때 사용한 의물로, 해당 정재의 치어(致語)와 창사(唱詞) 내용의 일부를 적어놓았다. 족자를 받든 사람은 무대의 가운데에 위치하는데, 정재가 시작할 때에는 무대 앞쪽 죽간자 사이에 위치하며, 춤의 진행에 따라 뒤쪽 가운데로 이동하기도 한다(『세종실록』 10년 5월 26일).

연원 및 변천

고려시대에는 족자가 의물로 쓰이지 않았으나, 조선시대 전기에 새롭게 창작된 근천정(覲天庭)·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성택(聖澤)·수명명(受明命)·하황은(荷皇恩)·하성명(賀聖明) 등의 당악정재를 상연할 때부터 족자가 의물로 사용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후기에는 순조대에 창작된 경풍도(慶豐圖)·만수무(萬壽舞)·제수창(帝壽昌) 등의 정재에도 사용되었다.

형태

족자의 형태는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자세히 전한다. 족자의 바탕은 생초(生綃)로 하였고, 아래위는 얇은 비단인 홍릉(紅綾)·백릉(白綾)으로 잇대어 꾸몄다. 가장자리는 자줏빛 생초로 선을 두르고, 족자 뒤는 홍초로 배접하였다. 족자의 축(軸)은 옥으로 하거나, 화리(華梨) 또는 오매(烏梅)를 사용하였다. 족자 위 좌우에 고리가 있고, 아래에 백릉으로 만든 유소(流蘇)를 연결해 늘어뜨렸다. 또 고리 밖에 각각 작은 고리를 두어 색실 매듭을 늘이도록 하였다. 깃대는 나무로 만들어 주홍칠을 했으며, 위에는 갈고리를 달아 족자의 녹색 실끈을 걸 수 있도록 하였다.

족자는 정재에 따른 구분 없이 모두 같은 형태였으나, 다만 족자에 쓰는 글자 수에 따라 너비는 달랐다. 몽금척 정재에 사용된 족자의 크기는 생초가 1자 6치 3푼, 홍릉 위가 7치 2푼, 백릉 위가 2치 4푼, 백릉 아래가 1치 3푼, 홍릉 아래가 3치 6푼이었으며, 족자의 너비는 9치 4푼, 족자 축의 지름은 7푼이었다.

한편 경풍도 족자는 다른 족자와 달리, 대나무에 걸지 않고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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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민속 관련 사항

1901년(광무 5)에 편찬된 『고종신축진연의궤(高宗辛丑進宴儀軌)』에는 경풍도 족자, 만수무 족자, 제수창 족자를 각각 제작한 내역이 실려있다. 모두 바탕감은 백공단(白貢緞)으로 하였는데, 제작에 들어간 비용은 경풍도 족자가 55냥 9전, 만수무 족자와 제수창 족자는 145냥 2전 9푼씩이었다.

참고문헌

  • 『악학궤범(樂學軌範)』
  •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
  • 『고종신축진연의궤(高宗辛丑進宴儀軌)』
  • 국립국악원,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 성현 저, 렴정권 역, 『악학궤범』, 평앙국립출판사, 1956.
  • 한국예술학과 음악사료강독회 역주, 『고종신축진연의궤: 권3』,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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