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직(副司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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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앙의 오위(五衛)에 소속된 종5품 서반직.

개설

조선초기에는 섭사직(攝司直)으로 불렸으나 1466년(세조 12)에 관직 체계가 정비되면서 부사직(副司直)으로 고쳤다. 5위 체제를 정립하며 정비된 직제였으나 5위 체제가 유명무실해지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현직에 있지 않는 문관, 무관 그리고 잡직에 있는 자들에게 녹봉을 주기 위한 구실로 전락하였다.

담당 직무

일반적으로 부사직은 1466년에 관직을 정비했을 때 섭사직을 바꾸면서 비로소 성립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조선 건국 직후에 문무 관제를 처음으로 정하면서 훈련관(訓鍊觀)의 종6품 관직으로 설치되었다. 뿐만 아니라 1394년(태조 3)에 정도전의 주도로 군제를 개편하면서 고려의 남은 제도로 간주되었던 낭장(郎將)을 부사직으로 고쳤다. 낭장은 정6품으로 200명씩으로 구성되는 단위 부대의 지휘관으로 추정된다. 이 조치를 계기로 무반직으로 널리 제수되었다. 그리고 1409년(태종 9)에는 훈련관의 부사직을 주부(注簿)로 고쳤다.

한편 섭직(攝職)은 고려 관직 체계에서는 폭넓게 사용되었다. 초창기에는 ‘대신하여’ 어떤 일을 처리하는 직위라는 의미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점차로 정규적인 관직 체계의 한 단계로 성장하였다. 한편 고려 의종 말년까지는 주로 문반직에 설치되었는데 그 이후에는 거의 모두 무반직에 두어졌다. 이는 섭직의 성격 변화와 함께 매우 주목되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전신격이라고 할 수 있는 섭중랑장(攝中郞將)의 제수 사례도 드물게나마 보인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섭직은 무반직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제수되었다. 섭사직의 경우에는 기록상 세종 때부터 나타난다. 1394년에 중랑장을 사직으로 고쳤는데, 그 이후에 섭직 체계가 활용됨에 따라 섭사직이라는 관직명으로 제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섭사직과 부사직이 동시에 제수되었다는 기록도 나온다(『세조실록』 8년 7월 14일). 중앙군 조직을 5위제(衛制)로 개편한 뒤, 1466년에 대대적으로 관직을 정비하면서 섭사직을 부사직으로, 부사직은 사과(司果)로 고쳤다. 새로운 부사직으로 탈바꿈하면서 법제화되었다.

변천

『경국대전』에서는 종5품, 정원 123명으로 규정되었다. 부사직의 경우 『속대전』에서는 정원 23명을 줄여 100명이 되었다. 원록체아(原祿遞兒) 17명, 승습군(承襲君) 3명, 공신적장(功臣嫡長) 7명, 미설가수령(未挈家守令) 3명, 훈련도감(訓鍊都監) 장관(將官) 6명·군병(軍兵) 4명, 금위영(禁衛營) 장관 5명, 내의원(內醫院) 의원(醫員) 5명, 사자관(寫字官) 1명, 사역원(司譯院) 역관(譯官) 4명, 관상감(觀象監) 술자(述者) 1명, 포토군관(捕討軍官) 12명, 금군(禁軍) 33명 등으로 규정되었다.

『대전회통』에서는 정원을 2명 줄여 102명이 되었다. 원록체아 17명, 승습군 3인, 13인, 미설가수령 3명, 훈련도감 장관 6명·군병 4명, 금위영 장관 5명, 내의원 의원 6명, 사자관 1인, 사역원 역관 7명, 관상감 술자 1명, 포토군관 12명, 금군 30명 등으로 규정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박용운, 『고려시대 관계·관직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1997.
  • 천관우, 『근세조선사연구』, 일조각, 1979.
  • 윤훈표, 「5위체제의 성립과 중앙군」, 『한국군사사 5 조선전기Ⅰ』, 육군본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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