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익필(宋翼弼)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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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송익필 |
한글표제 | 송익필 |
한자표제 | 宋翼弼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명종~선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운장(雲長) |
호 | 구봉(龜峯) |
시호 | 문경(文敬)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34년(중종29) |
사망 | 1599년(선조32) |
본관 | 여산(礪山) |
묘소소재지 | 충청도 당진(唐津) 원당동(元堂洞) |
조부 | 송인(宋璘) |
부 | 송사련(宋祀連) |
모_외조 | 연일정씨(延日鄭氏) |
형제 | 송한필(宋翰弼) |
처_장인 | 창녕성씨(昌寧成氏) |
자녀 | (1자)송취방(宋就方) (서1자)송취대(宋就大) (서2자)송취실(宋就實) |
저술문집 | 『구봉집(龜峯集)』, 『현승집(玄繩集)』, 『태극문답(太極問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송익필(宋翼弼) |
총론
[1534년(중종29)∼1599년(선조32) = 66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유학자.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인데, 서출(庶出) 가계로 인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고, 벼슬길이 막혀서 평생 고난을 겪었다. <신사무옥(辛巳誣獄)>의 일등 공신 송사련(宋祀連)의 아들이고, 송한필(宋翰弼)의 형이다.
가계 혈통과 신사무옥
송익필(宋翼弼)의 할머니 감정(甘丁)은 사예(司藝)안돈후(安敦厚)의 천첩 소생이고, 좌의정안당(安塘)의 서출 누이였다. 감정이 직장(直長)송린(宋璘)과 결혼하여 송사련을 낳았다. 송사련은 안당의 아들 안처겸(安處謙)과 고종사촌 간이었으나, 서출 집안과 적장자 집안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1515년(중종10) 안당은 이조 판서가 되어 조광조(趙光祖) · 김식(金湜) 등의 사림파(士林派)를 천거하여,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서 조광조 등 사림파가 화를 당할 때, 좌의정안당은 영의정정광필(鄭光弼)과 함께 사림파를 구원하려다가 파면되었다. 1521년(중종16) 안당의 아들 안처겸이 훈구파 남곤(南袞) · 심정(沈貞) 등을 숙청하려고 모의하다가, 송사련의 고발에 의하여, 동생 안처함(安處諴)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 일로 아버지 안당도 사사(賜死)되는 등 안씨 일가가 멸망하였는데, 이것이 <신사무옥(辛巳誣獄)>이다. 이 옥사는 남곤 등 훈구파가 송사련을 사주하여 꾸민 사건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송사련은 그 공으로 일등 공신이 되어 당상관(堂上官)절충장군(折衝將軍) · 시위대장 등의 지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그 아들 송익필과 송한필은 어려서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학문적 재능과 예학 발전의 공로
송익필은 7, 8세에 이미 시(詩)를 짓는 재능이 매우 뛰어나서, 조금 큰 후에 동생 송한필과 같이 향시에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하니, 이때부터 명성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매우 영민(英敏)하고 벗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여, 젊어서부터 당대 명문 출신 이산해(李山海) · 최경창(崔慶昌) · 백광훈(白光勳) · 최립(崔岦) · 이순인(李純仁) · 윤탁연(尹卓然) · 하응림(河應臨)과 폭넓게 교제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팔문장(八文章)’이라고 불렀다. 집안 가계 때문에 정거(停擧)를 당하고 나서 과거를 단념하고 오로지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여 도학(道學)으로 명성이 높았다. 율곡(栗谷)이이(李珥)와 우계(牛溪)성혼(成渾)도 송익필이 학술이 뛰어난 것을 알고 깊이 교유하였다. 그들과 성리학의 이치를 서로 논변할 때, 송익필의 식견은 투철하고 논리는 기발하였다고 한다. 이산해는 그에게 과거를 볼 기회를 주자고 간청하였다. 이이가 일찍이 ‘서얼(庶孼)의 허통(許通)’을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송익필에게 벼슬길을 열어 주기 위한 주장이라는 반대파의 비난을 받았다. 그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연구하여 예학(禮學)의 이론을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과 독신재(獨愼齋)김집(金集) 부자에게 전수하여 서인(西人)의 예론(禮論)을 형성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젊은 인재들을 많이 키워 이이와 성혼의 문하로 보내어, 서인(西人)의 인물을 키워내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아동을 가르치는 방법은 아동 중심의 자발적 학습이었다. 그는 아동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잘 유도하여 스스로 감동하고 분발하여 학업을 자립하게 하였으므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는 자가 많이 나왔다. 그가 한때 고양(高陽)의 구봉산(龜峯山) 아래 살면서 학도들을 가르치니, 글을 배우러 오는 자가 날로 많아져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구봉선생(龜峯先生)’이라고 불러서 이것이 그의 호가 되었다. 김장생의 아들 김집도 13세 때에 그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업을 깨우쳤다고 한다. 송익필이 이끌어서 학업을 성취시킨 유명한 인물은 김장생과 김집 부자, 정엽(鄭曄), 서성(徐渻), 정홍명(鄭弘溟), 강찬(姜燦), 허우(許雨), 김반(金槃) 등이다. 그 중에서 김장생 · 김집 · 허우 등은 유학자로 대성하였고, 강찬 · 정엽 · 서성 · 김반 등은 고관(高官)으로 출세하였다. 당시 그를 추종하는 학자들도 매우 많았다.
동인· 서인의 당파 싸움과 도피 생활
송사련은 중종~선조 4대에 걸쳐 벼슬을 하였다. 그 집안이 번창하여, 아들 5형제는 명문 집안과 결혼하였으며 딸은 종실(宗室)에 시집갔다. 그러나 1586년(선조9) 안당의 증손 안노(安璐)의 처 윤씨(尹氏)가 <신사무옥(辛巳誣獄)>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65년 만에 재심이 이루어졌다. 송씨 집안도 이에 대항하여 상소하여 싸웠으나 안당-안처겸 등 안씨 일가는 무죄가 밝혀져서 신원(伸寃)되고, 송씨 일가는 패배하여 안씨 집안의 노비로 적몰(籍沒)당할 처지가 되었다. 당시 이발(李潑)과 백유양(白惟讓) 등의 동인 일파가 이이와 성혼을 미워하고 원수로 여기다가, 이이가 세상을 떠나자, 평소 이이와 가까웠던 송익필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으려고 안씨의 자손들을 사주하여 송사(訟事)를 벌이고 송씨 일가를 멸망하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이때 송익필은 53세였는데, 성명을 바꾸고 형제의 가족 1백여 명과 함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을 쳐서 몸을 숨겼다. 선조가 그들의 숨은 곳을 찾아내어 체포하여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대사헌김계휘(金繼輝)의 동생 김은휘(金殷輝)가 송익필의 가족들을 10여 년 동안 자기 집에 숨겨주고 보살펴 주었는데, 그는 아마도 송익필의 제자였던 것 같다. 조헌(趙憲)은 송익필과 이이를 위해 선조에게 상소하였고, 이산해와 정철(鄭澈)도 송익필을 숨겨 주었다. 그러나 선조의 엄중한 명령이 내려졌으므로, 1591년(선조24) 송익필이 관가에 나아가 자수하니, 아우 송한필과 함께 극변(極邊)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정인홍(鄭仁弘) 등은 성혼과 이이가 비천한 송익필과 교유했다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왜적을 피하여 유배지를 희천(熙川)에서 명문(明文)의 산중으로 옮겼다가, 1593년(선조26) 특별히 사면을 받았다. 풀려나서는 떠돌아 다녔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그의 담론(談論)을 듣거나 학문을 배우려는 자들이 많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1599년(선조32) 8월 8일 충청도 면천(沔川)의 임시 거처에서 죽으니, 향년이 66세였다.
저서로는 『구봉집(龜峯集)』, 『현승집(玄繩集)』, 『태극문답(太極問答)』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송익필은 천성적으로 영민(英敏)한 자질을 타고난 데다, 분석 능력이 정밀하여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또 그의 시가(詩歌)와 사부(詞賦)는 아주 절묘하여 세상에 많이 전해져서 후세까지 암송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좋지 못한데, 『홍재전서(弘齎全書)』에는 그의 선세(先世)에 흠이 있었는데도 그는 그 허물을 덮어서 만회해 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으며, 그 자신으로 말하면 천인(賤人)의 신분이었는데도 지나치게 자기를 내세우고 고자세를 취하였다고 했다. 또 그는 자신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스스로 고자세를 일관하였고, 아무리 고관 · 귀족이라도 하더라도 한번 만나면 ‘자(字)’를 부르고 관명(官名)을 붙이지 않았다. 『택당집(澤堂集)』 별집에서는 송익필이 이산해(李山海)에게 편지를 보낼 때면 ‘여수(汝受)’라는 그의 자만 썼고, 심우(心友)였던 이이와 성혼과는 아무 거리낌 없이 “너”니 “나”니 하고 함부로 불러서 제자들을 민망하게 만들었다고도 했다. 이러한 태도로 말미암아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묘소와 추증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묘소는 충청도 당진(唐津) 북쪽 원당동(元堂洞)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墓碣)이 남아 있다. 영조 때 홍계희(洪啓禧)가 청하여 사헌부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구봉집(龜峯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송자대전(宋子大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중봉집(重峰集)』
- 『우계집(牛溪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임하필기(林下筆記)』
- 『상촌집(象村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계곡집(谿谷集)』
- 『기축록(己丑錄)』
- 『택당집(澤堂集)』
- 『홍재전서(弘齎全書)』
- 『계갑일록(癸甲日錄)』
- 『석담일기(石潭日記)』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시정비(時政非)』
- 『연암집(燕巖集)』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청성잡기(靑城雜記)』
- 『한수재집(寒水齋集)』
- 『혼정편록(混定編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