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예(司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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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던 성균관(成均館)의 정4품 관직.

개설

성균관 소속의 정4품 관직으로, 처음에 정원이 3명이었다가 조선후기에 2명으로 줄었다. 당초 악정(樂正)이 개칭된 것으로 주로 성균관 유생들의 음악 교육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종친의 교육을 담당하여 종학(宗學)의 관직을 겸하기도 하고 또 그 외의 각종의 업무에 차출되기도 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성균관 제도가 개편되면서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담당 직무

건국 초기 악정이라는 명칭으로 설치되었다가 사예(司藝)로 개칭되었는데, 이로 보아 육예(六藝) 즉 예절[禮], 음악[樂], 궁술[射], 승마술[御], 글 쓰는 법[書], 수학[數] 중 음악의 교육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예는 이 밖에도 원자(元子)나 세자의 성균관 입학례 때 박사(博士)로 차출되어 제자가 스승에게 예물을 올리는 속수(束脩)의 예를 주관하거나(『태종실록』 3년 4월 8일), 동짓날 중국 황제가 사는 곳을 향하여 절을 하는 망궐례(望闕禮) 때에 전문(箋文)을 읽는 독전관(讀箋官)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년 11월 27일). 또한 경차관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민원을 파악하기도 하였고(『태종실록』 13년 12월 21일), 임금에게 의견을 아뢰는 윤대(輪對) 관원으로 참석하기도 하였다(『세조실록』 4년 4월 18일). 1430년(세종 12) 3월 종학(宗學)을 설치하면서 성균관 관원으로 박사를 겸해 종학의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2년 3월 6일).

변천

사예는 고려후기 국학(國學)이나 성균관에 소속된 관직이었으나,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관제 반포 당시에 악정으로 개칭되어 설치되었다. 악정은 정4품으로 정원은 2명이었다. 이후 1401년(태종 1) 7월 13일 관제 개편 때 악정이 사예로 개칭되었다(『태종실록』 1년 7월 13일). 『경국대전』에서는 정원이 3명이었으나, 조선후기 영조대 간행된 『속대전』에서는 1명이 감축되어 2명으로 규정되었다. 한편 사신이 성균관 문묘 배알 때에 일시적으로 가사예(假司藝) 즉 임시 사예로 차출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년 4월 11일). 사예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성균관 제도가 개편되면서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