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론(禮論)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이 책은 효종 사후 자의대비(慈懿大妃: 장열왕후(莊烈王后), 곧 조대비(趙大妃))의 복제(服制)에 대하여 여러 신하가 변론한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개설

이 책은 조선 현종 때 자의대비의 복제를 둘러싸고,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논쟁을 엮은 것이다. 1659년(효종 10) 효종이 승하하자, 자의대비의 복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해석이 대립되었다. 송시열(宋時烈, 1608~1687)은 기년설(朞年說: 1년)을 주장했으며, 허목(許穆, 1595~1682)은 3년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의 대립은 단순히 유교적 의례에 대한 학문적 해석을 넘어 당파의 이해관계로 발전했다.

서인은 기년설을, 남인은 3년설을 주장했다. 양 파벌은 서로의 학문적 정통성을 통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결국 이 논쟁은 서인이 우세를 보여 서인세력이 강화되었다. 1674년(현종 15) 며느리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복제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번에는 서인은 대공설(大功說: 9개월),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했다. 남인은 이 논쟁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고, 서인은 실각했다.

편찬/발간 경위

조선 후기에 사림정치가 전개되면서, 주자학을 신봉하는 사림이 붕당을 형성하여 상호 경쟁적으로 정국주도의 쟁패를 벌이게 되었다. 붕당은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사활을 걸고 싸울 만한 주자학적 명분의 정당성을 논변하는 이념투쟁이었다. 이와 같은 사림집단에 의한 붕당간의 갈등을 배경으로 17세기에는 예학이 현실정치와 직결된 이른바 ‘예론’으로 쟁점화 되었다.

기해예송(己亥禮訟)은 1659년 5월에 승하한 효종에 대해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간의 ‘예론’ 논쟁이다. ‘예론’은 17세기 조선조 예학(禮學)의 발달과 더불어 나타난 조선조 사림정치 특유의 정치적 갈등을 의미한다. 당시는 예의 학문적 정리나 해설이 왕성하였을 뿐 아니라 예의 실제적 실천을 철저히 하려는 정신이 드높았었다.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왕실의 복상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제기되는 각 붕당의 예론은 모두 다 예와 관련된 예학의 이념적 논쟁과 그들의 논쟁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표방하고 있었다. 이러한 예론을 통해 명분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각 정치세력들은 정치적 대결을 벌였다.

기해예송이 발생하자,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1606~1672) 등 서인은 ‘사종지설(四種之說)’과 고례(古禮)에 입각하여,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였고, 윤휴(尹鑴, 1617~1680)를 비롯한 남인은 3년설을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하였는데, 이는 효종을 장자로 보느냐, 차자로 보느냐 하는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영의정정태화(鄭太和, 1602~1673)의 중재 하에 장, 차자의 구분이 없는 국제에 의거한 기년설이 왕에게 건의되며, 부왕의 상을 당해 정황이 없었던 현종은 자의대비의 복제를 기년복으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듬해에 3년복으로 개정할 것을 주장하는 허목의 상소로 인해 논쟁이 본격적으로 재연된다. 이 때 송시열, 송준길과 허목의 치열한 논쟁의 와중에서 현종은 점차 3년설에 기울어지게 된다. 왕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제왕가로서의 예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허목, 남인의 예송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과정의 논쟁을 엮은 것이다.

서지 사항

8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필사본이다. 크기는 30.4×20.6cm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1814년(순조 14) 필사되었으며, 편자는 미상이다. 권두에 윤치영(尹致英)·현도원(玄道源)의 서문이 있다. 송시열·허목·이경석(李景奭)·원두표(元斗杓)·송준길·윤휴·박손제(朴遜齊)·이세필(李世弼)·송상민(宋尙敏) 등의 상소와 승정원의 계(啓) 등이 시기순으로 편집되었다.

우선 송시열은 예관의 문의에 국제(國制)는 장자·서자를 막론하고, 모두 기년복으로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허목은 이에 반박하여 효종이 대비의 적자가 되고, 천조즉위(踐阼卽位)하였으니, 당연히 3년으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 이와 관련하여 각 당파의 정치적 이해가 ‘3년설’과 ‘기년설’로 대립·충돌하였다. 원두표·송준길 등은 나름대로의 고례해석과 조선왕조의 기왕의 관례를 들어, 송시열의 ‘기년설’을 지지하는 상소를 남겼으며, 윤휴·박손제·윤증(尹拯) 등은 ‘3년설’을 주장하였다.

이 논쟁의 과정 속에서 예론에 대한 단순한 학문적 판단을 넘어 상호 간 선유(先儒)를 공박하였다고 하여, 학문적 정통성 및 정치적 문제로 비화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책에 실려 있는 논쟁들은, 왕권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로 당쟁의 본질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참고문헌

  • 박동인,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책판의 종합적 검토-가의(賈誼) 체론(禮論)의 정신과 그 근거로서의 맹(孟), 순(荀) 종합적 인성론-」, 『대동문화연구』 제70호,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2010.
  • 박종천, 「다산 예론(禮論)의 실천적 함의」, 『한국실학연구』 제13호, 민창문화사, 2007.
  • 이승연, 「다시 읽혀지는 『朱子家禮』-星湖·李瀷의 禮論을 중심으로-」, 『동양예학』 제2집, 동양예학회, 1999.
  • 정옥자, 「17세기 思想界의 再編과 禮論」, 『한국문화』 제10호,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1989.
  • 차동운, 「荀子의 禮論에 關한 硏究」, 대구한의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7.
  • 한성구, 「李覯의 義利思想 및 禮論과 의의」, 『한국철학논집』 제31집, 한국철학사연구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