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창(崔慶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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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9년(중종 34)∼1583년(선조 16) = 45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대시인. 행직(行職)은 종성부사(鍾城府使)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최수인(崔守仁)이며, 어머니 해평윤씨(海平尹氏)는 윤필경(尹弼卿)의 딸이다. 사암(思庵)박순(朴淳)의 문인이고, 당시 백광훈(白光勳)·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리었다.

선조 시대의 활동

1561년(명종 16)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수학하다가, 1568년(선조 1)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방목』 참조.)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1573년(선조 6) 호당(湖堂)에 들어가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조·예조에서 홍문관(弘文館)대제학(大提學)과 의논하여 독서당(讀書堂)의 선발 인원을 정원보다 늘렸는데, 이때 최경창은 정원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김효원(金孝元)·김우옹(金宇顒)·민충원(閔忠元)·허봉(許篈) 등과 함께 정원 이외로 뽑혔다. 당시 정원 이외로 더 뽑힌 사람들은 당대의 촉망 받는 젊은 인재들이었다. 사간원(司諫院)에서 “민충원·최경창은 본래 명망이 없는데도 그 선발에 끼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합당하지 않게 여기니, 그들을 삭제하소서.”라고 하였으나(『선조실록(宣祖實錄)』 참조) 그의 시를 좋아하던 선조가 그대로 두었다. 허균(許筠)의 중형 허봉은 최경창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하여 찾아가서 10일 동안 서로 교유(交遊)하기를 간청하였으나, 최경창은 그를 싫어하여 만나주지 않았다. 이때부터 허봉은 최경창을 매우 원망하여, 학관(學館)의 전랑(銓郞)을 선발할 때 영의정박순의 추천을 받은 그를 여러 번 저지하였다.(『고죽집(孤竹集)』「서(序)」 참조.) 결국 최경창은 지방의 관직으로 쫓겨났는데, 가장 근무 조건이 나쁜 북평사(北評事)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북영(北營)이 있던 경성(鏡城)에 가서 근무할 때 홍원(洪原) 출신 관기(官妓) 홍랑(洪娘)을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다.

조정으로 돌아와서 예조 좌랑(佐郞)·병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1575년(선조 8)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는데, 1576년(선조 9) 사헌부에서 탄핵하기를, “전적최경창은 식견이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고 북방(北方)의 관비(官婢)를 몹시 사랑한 나머지, 불시(不時)에 데리고 와서 버젓이 데리고 살고 있는데, 이것은 너무도 거리낌이 없는 행동이니, 파직하소서.” 하니, 선조는 그를 파직시켰다.(『선조실록』 참조.) 최경창은 북평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올 때 홍랑을 같이 데려와서 첩(妾)으로 삼았다고 하여 파직되었고, 홍랑은 서울에서 쫓겨나서 경성의 관기로 돌아갔다. 최경창은 성절사(聖節使)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 뒤에 전라도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나갔으나, 그 이듬해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고죽집』「서」 참조.)

벼슬없이 몇 년 동안 지낼 때 최경창은 송강(松江)정철(鄭澈)과 만죽(萬竹)서익(徐益) 등 유명한 문사(文士)들과 어울려서 시작(詩作)에 열중하였다. 당대의 문사 28명이 모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28수회(二十八宿會)’라고 불렀다. 최경창은 중국 당시(唐詩)의 시풍(詩風)에 뛰어났는데, 문장에 중국 선진(先秦) 시대 고문(古文)을 따르던 최립(崔岦)과 함께 조선 중기 문단(文壇)에 복고풍(復古風)을 일으켜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그들은 삼청동(三淸洞)의 숲속에서 번갈아 모여서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서로 친밀해졌는데, 대부분 서인(西人)이 많았다. 그가 서인의 인맥을 통하여 청요직(淸要職)에 의망(擬望)될 때마다 동인(東人)들은 집요하게 그와 홍랑의 이야기를 거론하여 그를 낙마시켰다. 최경창은 건강도 나빠지고, 또 가세(家勢)도 기울어져서, 외방의 말직(末職)이라도 얻어서 나갈 수 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다. 『상촌집(象村集)』에는 그가 1580년(선조 13) 대동 찰방(大同察訪)이 되었고, 서익(徐益)은 평양서윤(平壤庶尹)이 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다고 하였다.( 『상촌집』 권60 참조.) 찰방이나 서윤의 외직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정철 등 ‘28수회(二十八宿會)’ 서인들이 그들을 밀어주었던 결과였다.

1582년(선조 15) 봄에 선조가 특별히 종3품의 종성부사(鍾城府使)에 임명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강력히 천거하여 종성부사로 삼을 때 종성(鍾珹)은 두만강 변에서 오랑캐의 침입을 방어하는 변방 지역이었므로, 선조는 그를 특별히 종3품으로 승품(陞品)하여 부사(府使)에 임명하였던 것이다. 양사(兩司)의 대간(臺諫)들이 함께 들고 일어나서 최명창을 논박하고, 그 관직과 계품을 개정하라고 요청하였다. 선조는 평소부터 최경창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간(臺諫)에서 무려 3개월 동안 최경창을 논핵했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방의 방어를 맡은 북병사(北兵使)가 동인의 사주를 받고 장계(狀啓)하기를, “최경창이 군정(軍政)을 닦지 않고, 창기(娼妓)에만 빠져 있습니다.” 하니, 대간(臺諫)에서 다시 그 논의를 제기하자, 선조는 비로소 종3품의 부사를 면직시키고 정5품의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에 임명하여, 곧장 서울로 돌아오게 하였다.(『고죽집』「서」 참조.) 이를 보면, 최경창은 종성부사에 부임하여 기생 홍랑과 재회하여 한 동안 행복하게 지냈던 것 같다. 최경창은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에 경성에 들렸다가, 1583년(선조 16) 3월 어느 꽃피는 날 경성의 객관(客舘)에서 갑자기 쓰러져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겨우 45세였다.(『고죽집』「서」 참조.)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을 보면, “최경창은 본래 서인이라고 지목된 인물도 아니었으나, 그 당시 비변사의 당상관(堂上官)에 서인의 선배들이 많았기 때문에 동인들이 최경창에 대한 논박이 특별히 준절(峻節)하였던 것이다.” 하였다.(『선조수정실록』 권13) 이를 보더라도, 최경창과 기생 홍랑의 사랑은 동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에 당쟁의 실마리를 제공한 셈이고, 두 사람은 당파 싸움의 희생물이 되어 비극을 맞았던 것이다. 또 동인들이 최경창을 집요하게 공격한 것은 최경창이 최립과 함께 당대를 주름잡는 문인이어서, 젊은 신진(新進) 사류(士類)들이 대다수 흠모하고 추앙하였기 때문이다.

삼당시인 최경창

최경창의 시(詩)는 깨끗하고 담백하다는 평을 들었다.(『고죽집』「서」 참조.) 당시 복고풍이 일어나서 시는 중국 당시(唐詩)를 본 뜬 새로운 시풍이 풍미하였는데, 최경창이 백광훈·이달과 함께 이를 주도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당시의 시풍에 뛰어난 최경창과 백광훈·이달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상촌집』 권6 참조.) 그때 문장에서는 동고(東皐)최립이 중국 선진(先秦) 시대 고문(古文) 체제를 본떠서 새로운 의고체(擬古體)의 문장을 주도하였다. 최립의 문장은 선조 시대 초반기에 한 시대를 풍미하여, 모든 사류(士類)들이 최립을 추앙하였고, 그 문장체를 모방하여 글을 지었다. 그보다 조금 뒤에 최경창과 백광훈·이달의 ‘삼당시인’이 나타나서, 당시의 시풍 운동을 전개하자, 신진 사류들이 그들을 추종하여 새로운 시풍이 일어났다. 조선의 문학이, 조선 전기에는 송나라 소식(蘇軾)과 구양수(歐陽脩)의 시풍을 따라서 시와 문장을 아름답게 수식하는 데에 주력하였으나, 조선 중기 선조 시대에 이르러 당나라의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풍을 따라서 인간의 순수한 감정을 반영하려고 노력하는 새로운 풍조가 나타났던 것이다.

최경창은 약관의 나이로 사암박순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옥봉(玉峯)백광훈과 손곡(蓀谷)이달을 만났다. 스승 박순이 역설하기를,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를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송나라 소식은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벌써 이류로 떨어진다.” 하였으므로, 세 사람은 당나라의 이백과 두보의 시체(詩體)를 연구하였다. 또 이들은 송천(松川)양응정(楊應鼎)과 청련(靑蓮)이후백(李後白)를 찾아가서 전적으로 문학(文學)만을 수학하였다. 또 봉은사에서 자주 만나서 당시(唐詩)를 토론하고, 전국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면서 당시를 모방한 작품을 많이 지었다. 이때 전라도에서 임제(林悌)·허봉(虛封) 등을 만나서 지은 시(詩)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수작(酬酌)하였다. 백광훈은 과거를 보지 않고 참봉(參奉) 벼슬을 지내다가 최명창보다 1년 앞서 46세의 나이로 죽었고, 이달은 서자 출신이므로, 일찍부터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평양에서 74세로 객사(客舍)하였다. 그러나 최명창과 백광훈·이달이 조선의 시(詩)를 송시(宋詩)의 풍조에서 당시(唐詩)의 풍조로 바꾼 큰 업적을 남겼다.

교산(蛟山)허균이 「손곡(蓀谷) 산인전(山人傳)」에서 세 사람을 평하기를, “최경창·백광훈·이달 세 사람의 시는 모두 정시(正始) 인륜의 법을 본받았다. 최경창은 깨끗하고 예리하며, 백광훈은 팍팍하고 담백(淡白)한데, 이것은 귀하게 여길 만하나, 기력(氣力)이 미치지 못하는 결점이 있다. 그러나 이달은 가멸고 아름다운데, 앞서 두 사람에 비하면 범위가 조금 크고 넓다. 최경창·백광훈은 일찍 죽었고, 이달은 늙어서 문장이 크게 진보하여 자기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었다.” 하였다. 허균은 서자 출신 이달을 최경창·백광훈보다 높이 평가하고, 그 전기까지 지었다. 한편, 상촌(象村)신흠(申欽)은 『옥봉집(玉峯集)』 서문에서, “우리나라에 시로 명성을 날린 분이 한두 사람이 아니지만, 오로지 최경창과 백광훈 두 사람만이 시의 정음(正音)을 터득하였다. 그 후대에 여러 학사(學士)와 대부(大夫)들 가운데 문장으로 자처하려는 자들이 반드시 이 두 분을 소중히 받들고 내세우면서 들먹여왔다.”고 하여, 서자 이달은 무시하고 최경창과 백광훈만을 추켜세웠다.

1580년(선조 13) 최경창이 대동찰방(大同察訪)이 임명되어 떠날 때 친구 서익과 작별하는 송별연에서 채련곡(採蓮曲)을 지어서 서로 주고받았다. 이 시에서 “길고 긴 강가에 수양버들 늘어지고[水岸悠悠楊柳多], 조각배 저 멀리 연꽃 따는 노래 소리 들려온다[小船遙唱採菱歌]. 붉은 꽃잎 모두 지고 가을바람 일어나는데[紅衣落盡西風起], 해 저물녘 텅 빈 강에 저녁 물결만 일어난다[日暮空江生夕波].”라고 하여, 호수에서 연꽃을 따는 아낙네들의 정겨운 모습을 가을 바람과 저녁 물결과 연계하여 자신의 서글픈 마음을 읊었다.

최경창이 젊었을 때, 율곡(栗谷)이이(李珥)를 비롯하여, 귀봉(龜峯)송익필(宋翼弼), 동고최립 등 당대의 재사(才士)들과 무이동(武夷洞)에서 모여, 시를 지어서 서로 주고받았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8문장계(八文章稧)’라고 일컬었다. 선조 시대 시문에 뛰어난 ‘8문장가’는 최경창을 비롯하여 이산해(李山海), 백광훈, 최립, 이순신(李純臣), 윤탁연(尹卓然), 하응림(河應臨)을 말한다.(『선조수정실록』, 『청성잡기(靑城雜記)』권3 참조.)

중국 명나라 장수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우리나라 시집을 보여 달라고 하여, 우리나라 역대 유명한 시인들의 걸작을 모운 『시선(詩選)』을 보여주었더니, 그가 훑어보고 나서 “문장의 기운이 너무 약해서 좋지 않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최경창과 백광훈의 시집을 보고 감탄하기를, “내가 돌아가서 강남(江南)에서 이 시집을 간행하여 조선의 문물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널리 보여주겠다.” 하였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17 참조.)

유고로 『고죽유고(苦竹遺稿)』를 남겼는데, 기생 홍랑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그가 남겨 놓은 유고(遺稿)를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최경창의 자손에게 넘겨 주었다. 그 뒤에 반세기가 지나서, 최경창의 증손자 최석영(崔碩英)이 『고죽집(孤竹集)』을 간행하였는데,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가 그 서문을 지었다.

성품과 일화

최경창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호방한데다가 풍채가 남보다 뛰어나서, 보는 사람들이 마치 신선(神仙) 세계 사람처럼 여겼다. 그는 재주가 뛰어나고 기개가 호방하여, 공명(功名)을 탐탁하지 않게 여기고, 더욱 청렴하고 고귀하게 행동하여,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였다. 최경창은 시(詩)에 대해 재주가 너무나 뛰어나서, 후세의 문장가들은, “조선왕조 건국 이래로 이러한 대시인은 없었다.” 하였다. 또 그는 글씨에도 능하여, 그 필체는 깨끗하고 힘차서 옥봉백광훈과 거의 막상막하였다. 그는 풍류에도 뛰어나서 거문고도 잘 타고 피리도 잘 불고, 또 활도 무신(武臣)보다 더 잘 쏘았다.

1555년(명종 10) 최경창이 17세일 때, 친구 백광훈·이달과 함께 전국을 떠돌다가, 전라도 영암(靈岩)에 머물고 있었는데, 왜구(倭寇)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배를 타고 피하려고 하였으나, 왜구의 배가 갑자기 몰려와서 포위당하였다. 그때 달빛이 대낮처럼 밝고 파도가 일지 않았으므로 최경창은 품속에서 옥퉁소를 꺼내서 처량하게 한 곡조를 불었는데, 소리가 매우 맑고 구슬펐다. 왜구의 무리가 그 아름다운 피리소리에 반하여 모두 고향 생각이 나서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여기 포위된 사람 가운데 반드시 신인(神人)이 있다.” 하고, 슬그머니 한쪽의 포위망을 풀어주어, 마침내 최경창 일행이 탈출하여 돌아올 수 있었다.(『고죽집』「서」 참조.) 최경창의 피리 솜씨는 적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큼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최경창이 북병사의 막하에 북평사(北評事)로 있을 때 삼군(三軍)의 원수(元帥)김우서(金禹瑞)가 또한 활을 잘 쏘기로 이름이 났었다. 두 사람이 활로써 기량을 겨루기로 약속하고, 활쏘기를 하는데, 두 사람이 각각 49개의 화살을 명중시키고, 최후에 김우서가 다시 화살 한 대를 명중시키자, 최경창이 갑자기 큰소리로 외치기를, “장군님이 졌습니다.” 하고, 이내 마지막 화살을 쏘아서 과녁에 꽂힌 김우서의 화살에 다시 명중시켰다. 그 뒤에 선조가 어느 날 문무 백관들을 모아놓고 활쏘는 재주를 시험할 때 활을 잘 쏘는 어떤 무신이 마음속으로 그를 두려워하니, 최경창이 웃으며,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오늘 팔에 병이 좀 났습니다.” 하고, 화살 한 대를 일부러 허공을 향해 헛되게 쏘았다. 이리하여 그 무신이 장원을 차지하여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고, 최경창은 그 다음을 차지하여 호랑이 가죽과 말 한 필을 하사받았다.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 이야기는 홍랑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언문(諺文) 시(詩)가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무척이나 감동시키고 있다. 같은 시대에 동고최립도 평양 기생을 사랑하였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남긴 시가(詩歌)가 없기 때문에 그 기생의 이름조차 모른다. 홍랑의 지은 언문 시를 보면,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대(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쇼셔(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밤비에 새 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하였다. 최경창은 이 시를 읽어보고, 다시 한시(漢詩)로 옮기기를, “折楊柳寄與千里/ 人爲試向庭前種/ 須知一夜生新葉/ 憔悴愁眉是妾身” 하였다. 사람들은 홍랑의 원작 언문 시도 훌륭하지만, 최명창의 한역(漢譯)한 시가(詩歌)도 그에 못지 않게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하였다.

묘소와 명기 홍랑의 사랑

묘소는 경기도 파주군 월롱면(月籠面) 영태리(英太里)에 있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홍랑의 무덤은 최씨 부부의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맞은편 산등성이에 있었다. 현석(玄石)박세채(朴世采)가 지은 『고죽집(孤竹集)』「서문(序文)」이 남아 있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전라도 강진(康津) 서봉서원(瑞峯書院)에 제향되었다.

한국 전쟁 때 그의 묘소 부근에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 파주군 교하읍 다율리(多栗里)로 이장하였다. 해주최씨 문중에서 명기(名妓) 홍랑의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최씨 부부의 무덤 아래 ‘시기(詩妓) 홍랑(洪娘)의 묘(墓)’를 만들고, 그 시비(詩碑)를 세워서 기념하고 있다.

최경창과 명기 홍랑의 사랑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에서 누구나 모두 알 만큼 유명하다. 1573년(선조 6) 가을에 최경창이 북평사(北評事)에 임명되어 함경도 경성에 부임하였을 때 홍원 출신 관기 홍랑이 그 환영하는 자리에 불려나갔다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 뒤 최경창이 임기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올 때 홍랑을 데리고 돌아와서 그 첩으로 삼아서 함께 살았다. 1576년(선조 9) 성균관 전적이 되었을 때 그 사실이 알려져서,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최경창은 파직당하고, 홍랑은 서울에서 쫓겨나서 경성의 관기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생이별하여 6년 동안 지냈는데, 이때 홍랑이 최경창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면서 시(詩) 한 수를 적어 보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전하는 홍랑의 언문 시이다. 1582년(선조 15) 봄에 선조가 최경창을 종성부사에 임명하였는데, 그때 두 사람은 경성에서 재회하였다. 그러나 북병사가 최경창이 군정을 소홀히 하고 창기에만 빠져있다고 장계하여 선조는 최명창을 면직시키고 곧 서울로 돌아오게 하였다. 최경창은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에 경성 들렸다가, 1583년(선조 16) 3월 경성 객관에서 갑자기 쓰러져서 죽었다. 당시 홍랑이 경성의 관기로 있었으므로 그곳에서 홍랑의 품에 안겨 죽었을 것이다.

최경창이 죽었을 때 그의 친구 율곡이이가 반장(返葬)할 것을 주장하여 경기도 파주에 장사지냈다.(『선조실록』 참조.) 파주 지역 민담(民譚)에 의하면, 상여를 따라온 홍랑은 그의 무덤 옆에서 3년 동안 수묘(守墓) 살이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그가 남겨 놓은 유고를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최경창의 자손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홍랑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주옥같은 최경창의 시(詩)들이 임진왜란의 병화(兵禍)를 면하고 후세에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에 홍랑은 최경창의 무덤을 지키다가 그 무덤 앞에서 죽으니, 최명창의 후손들이 홍랑의 무덤을 최씨 부부의 묘소가 보이는 맞은편 산등성이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홍랑의 사랑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헌신적 사랑의 본보기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고죽집(孤竹集)』
  • 『간이집(簡易集)』
  • 『고봉집(高峯集)』
  • 『사상록(槎上錄)』
  • 『상촌집(象村集)』
  • 『서계집(西溪集)』
  • 『석주집(石洲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열하일기(熱河日記)』
  •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
  • 『청성잡기(靑城雜記)』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해동역사(海東繹史)』
  • 『홍재전서(弘齋全書)』
  • 『미암집(眉巖集)』
  • 『구봉집(龜峯集)』
  • 『옥봉집(玉峯集)』
  • 『만전집(晩全集)』
  • 『고담일고(孤潭逸稿)』
  • 『지호집(芝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