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독서(賜暇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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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현직에 있는 관리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

개설

사가독서제는 현직에 있는 관리들에게 군왕이 특별 휴가를 주어 직책은 유지한 채 직무에서 벗어나 경서의 독서 및 학문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현직 관리를 대상으로 한 권학진흥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제도인 것이다. 이 제도는 주로 세종, 성종, 중종 등과 같이 문치에 관심이 많았던 군왕들의 비호 아래 발생되고 발전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건국 초기의 정치적 혼란이 태종을 거치면서 안정되었고, 정치적 안정 속에 세종대에 들어서면서 집현전을 중심으로 인재 양성에 집중하였다.

인재 양성은 관리의 재교육을 통한 계속적인 학문 연구를 진작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현직에 있으면서 업무에 종사하다 보면 자칫 학문을 게을리할 수 있으므로 일정 기간 직무에서 벗어나 학습에 전념할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세종실록』 8년 12월 11일). 집현전을 설치하고서도 집현관원 중 일부를 다시 선발하여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과다한 직무 때문에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업무와는 상관없이 당시의 풍조가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관리로 등용되면 더 이상 학문에 정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에 학문에 정진하도록 하는 문신권학정책을 내놓았는데 사가독서제는 이 중 하나였다. 인재 양성이라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설치 목적은 대용론(大用論)으로 그 성격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현재의 능력으로는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적재적소에서 실력을 발휘하기에는 미흡하지만 학문 연구를 통해 훗날 국가에 필요한 인재로 양성하여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게 한다는 것이다(『세종실록』 8년 12월 11일). 이러한 목적은 세종대뿐 아니라 이후로도 사가독서제의 실시와 관련하여 필요성을 언급할 때마다 등장하는 초지일관하는 목적이었다(『성종실록』 7년 5월 15일). 이때 대상이 되는 관리들은 주로 학문 연구와 관련된 부서의 젊은 문신들이었다. 이와 함께 대외적인 측면에서 외교를 위한 관리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조선은 고려말 대명 사대외교 방침을 그대로 계승함으로써 정치적으로는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 경제적으로는 물자 교역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나아가서 문화적으로는 이를 선진 문화의 내원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원활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대표적인 의사 전달 수단이었던 사대문서를 훌륭하게 작성하는 것은 국가 차원의 중요한 과업이 되었고, 이를 전문적으로 담당할 관리가 필요하였다.

내용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젊고 재예가 있는 문신이었다. 『대전회통』에서는 ‘통훈(通訓) 이하의 문신으로서 문학이 특이한 자’로 사가독서자의 자격을 규정하고 있다. 즉 정3품 당하관 이하의 문신 중에 문장력이 있는 자로 한정한 것이다. 여기서 정3품 당하관 이하의 규정은 허용하는 최고 품계를 명시한 것이고 실제로는 종6품 전후의 참상·참하직(參上·參下職) 관원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사가독서자들은 전원이 예외 없이 문과 출신자였다.

사가독서자들은 선발을 하면서 기간을 정해 휴가를 준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현실적으로 현직을 유지한 채 독서를 하였기 때문에 독서 기간 중이라도 소속 관서에 불려 나가는 경우도 있었고, 외임으로 나가거나 상중이라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도 있어서 사람마다 그 기간은 달랐다. 즉 사가독서의 기간에 대해서는 정해진 규정이 없어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실제 운영에서 독서 기간은 시행된 왕대의 정치·경제적 여건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화나 전쟁 등으로 오랜 기간 중단되는 경우도 있고 전국적인 가뭄이나 흉년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한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중단한 경우도 있었다. 독서를 하는 기간에 대한 특별한 규정은 없고 형편에 따라 길게는 10여 년에서 짧게는 3개월에서 1년까지 신축적으로 운영되었다.

사가독서 문신들이 읽는 책의 종류에 대한 별다른 규제는 없었다. 다만 읽은 책의 권수를 3개월마다 보고서로 제출하게 하였으며, 예문관 관원들의 월과와 동시에 1달에 3번은 글을 지어 제출하고 그 성적을 채점하였다. 이 외에 오직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정월과 동지 및 큰 행사와 같이 전 관원들이 모두 참석하는 경우 외에는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특전이 있었다. 사가독서자들에 대한 교육은 매우 유연하였다. 기본적으로 선발과 운영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대제학이 있었지만, 이들이 직접적으로 독서에 간섭하거나 지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는 기대할 수 없었다. 또한 인재 양성이라는 원대한 목적만 있었을 뿐이어서 구체적인 학습 목표는 세울 수 없었고 자연히 이에 기초한 세부적인 교육 과정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독서 내용도 사가독서자들의 의사를 반영하여 다양하게 운영하였다. 사서와 오경은 기본 교육 과정이었으며, 이외에도 두보와 한유, 유종원 등의 글도 익히게 하여 폭넓은 독서를 유도하였다. 또한 교육의 방법에서도 일차적으로 독서인들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우는 자기주도학습의 한 형태였고, 틀에 박힌 제한된 독서 외에도 풍류를 통해 선비의 기풍을 기를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형식을 택하였다.

변천

사가독서제는 세종대 처음 변계량에 의하여 입안되었다. 세종이 사가독서제를 실시한 기본적인 의도는 사장학(詞章學)의 흥기에 있었다. 초창기 사가독서는 주로 산사에서 이루어졌는데, 세종대에 어느 정도 정착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세조대에 집현전을 폐지하면서 사가독서도 함께 폐지되었다. 이후 성종이 홍문관을 열고 사가독서제를 다시 실시하였다. 이때까지도 사가독서가 도성 인근의 사찰에서 진행되었기에 여러 병폐가 있었다. 이에 1492년(성종 23)경에 비로소 용산의 빈 절터에 건물을 짓고, ‘독서당’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독서당을 건립하였다. 성종은 이때 술과 안주, 음악과 더불어 수정으로 만든 술잔인 수정배(水精杯)를 하사였다. 이 수정배는 이후로 독서당을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독서당은 얼마 되지 않아 문을 닫게 된다. 연산군 때 사가독서제가 폐지되고 독서당은 궁인의 소유가 되었으며, 독서당의 상징인 수정배도 승정원으로 넘어갔다. 이후 중종이 반정으로 등극하면서 세종과 성종의 위업을 회복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홍문관을 다시 일으키고, 사가독서제를 부활시켰다.

사가독서제는 원래부터 문학 공부를 중시하는 사장학이 중심에 있었는데, 사림의 힘이 커지면서 경학이 점차 중시되었다. 그러나 중국 사신의 접대와 같은 실용적인 문제 때문에 여전히 문학적 소양이 빼어난 인재의 배양이 사가독서제의 기본적인 목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독서당은 임진왜란으로 잿더미가 되고 사가독서제도 또한 폐해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한강의 옛 군영을 독서당으로 삼아 사가독서제를 실시하려 하였으나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하다가,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제학유근의 건의에 의하여 비로소 다시 시행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인재가 고갈되었기 때문에 전란 후 경제난이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가독서제를 시행하였던 것이다. 다만 경제를 고려하여 한강의 별영을 수리하여 독서당으로 썼고, 새로운 독서당의 건립은 효종 때를 기다려야 했다. 효종 때 비로소 동호에 독서당이 다시 세워졌다. 그 사이에도 지속적으로 한강 별영에서 사가독서제가 실시되었고, 숙종 때에도 네 번 사가독서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사가독서는 전대의 성대함에 비할 바가 못 되며, 숙종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사가독서제가 실시되지 못하고 만다. 다만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것이 사가독서제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 서범종, 「조선시대 사가독서제의 교육적 성격」, 『한국교육학연구』 9권 2호, 한국교육학회, 2003.
  • 이종묵, 「조선시대 서울의 문화공간과 한시: 사가독서제와 독서당에서의 문학 활동」, 『한국한시연구』 8권, 한국한시학회, 2000.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