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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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간행의 경위를 서술하면서 작가 자신의 견해를 함께 드러내는 문체.

개설

서(序)는 대개 책의 앞부분에 수록하는 것으로, ‘서(敍)’라고도 한다. 언설이나 서사가 실이 뽑혀 나오듯 조리가 정연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경』의 전체 내용을 개괄한 「대서(大序)」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후 서적이나 문장의 내용을 소개하거나, 작가의 일생·사적을 소개하고 저작의 동기·경위를 설명하거나, 저작의 내용·체제를 밝히고 평가하는 글을 모두 ‘서’라고 부르게 되었다. ‘서’는 대개 권두(卷頭)에 두지만 간혹 서적의 권말(卷末)에 두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후서(後序)라고 부른다. 당나라 때는 전별연을 하면서 시를 지은 뒤, 권질(卷帙)로 엮을 때 서를 지었다. 이것을 시서(詩序)라고 한다. 한편 ‘서’는 ‘인(引)’이라고도 한다. 원래 ‘인’은 시가에서 박자에 맞춘다는 뜻인데, 북송의 문인 소식(蘇軾)이 조상의 이름을 피하려고 이 명칭을 사용했다.

내용 및 특징

‘서’는 작가 자신이 직접 지은 자작과 다른 사람이 지어 준 타인작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자작의 예로는 사마천이 『사기』의 서언(序言)으로 삼기 위해 직접 지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를 들 수 있다. 남에게 서문을 구하는 일은 서진의 시인 좌사(左思)가 「삼도부(三都賦)」를 지은 뒤 황보밀(皇甫謐)에게서 서문을 받은 데서 비롯되었다. 한편, 시문집 이외에 고서적·방지(方志)·정서(政書)·주의(奏議)·족보·연보·연표·창화시권(唱和詩卷) 등에도 서문을 붙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중엽 이후에 발달하였으며, 사림파가 등장한 조선 중종 이후에는 철학성을 띠게 되었다. 특히 이황(李滉)이 쓴 여러 ‘서’에서는 근거를 살피고 사실을 궁구한다는 ‘고거핵실(考據覈實)’의 요건을 지키면서 경(敬)의 자세를 담았다. 윤선도(尹善道)는 1651년(효종 2)에 「어부사시사후서(漁父四時詞後敍)」를 지어, 조선 어부사의 계보를 탐색하고 자신이 창작한 「어부사시사」의 형식과 의의에 대해 소개하였다.

변천

17세기 이후에 유집(遺集) 간행이 활발해지자 ‘서’도 더욱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특히 학문과 사상의 연원, 문집 작가의 삶과 내면 의식을 고찰한 글이 많이 등장하였다. 장유(張維)는 「지천집서(芝川集序)」에서 황정욱(黃廷彧)의 시문을 평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인생론·문명론도 함께 개진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은 「포은선생집중간서(圃隱先生集重刊序)」에서 유교의 도통(道統)을 밝힌다는 의도를 담아 글을 쓰기도 했다. 또 1812년(순조 12)에 유희(柳僖)는 「도협서(盜俠敍)」를 통해 도협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고, 조선 도협의 일화를 집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대개 각 조대(朝代)의 첫머리에 총서(總序)를 두었다. 즉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 대부분 맨 앞에 총서가 배치되어 있는데, 다만 『광해군일기』·『현종개수실록』·『숙종실록』·『경종실록』·『경종수정실록』에는 총서가 없다. 『조선왕조실록』의 총서에는 왕의 휘(諱), 출생과 붕어(崩御) 사실, 비빈(妃嬪)의 생몰년 등이 일괄적으로 제시되어 있고, 그 뒤에 왕통을 잇는 정당성이 서술되어 있다.

참고문헌

  • 심경호, 『한문산문의 미학』(개정증보), 고려대학교출판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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