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학(道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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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유학의 정통 이념이자, 선비 정신과 의리 사상의 근원이 된 사상 체계.

개설

도학(道學)은 송대(宋代)에 새롭게 체계화된 정주학(程朱學) 또는 주자학(朱子學)의 다른 명칭이다. 도학이라는 용어는 『대학』과 『중용』의 서문에서도 보이지만 선진 유가에서는 거의 쓰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대두하게 된 것은 송대에 이르러 공맹의 도를 계승한 새로운 유학이 수립되면서부터이다. 송대의 유학자들은 공자가 집대성한 근본유학이 맹자 이후 약 천여년간 이른바 ‘도통(道統)’이 끊어지고, 도가나 불교의 영향 등으로 학풍도 크게 훼손되었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문제 제기와 비판 의식에 기반하여 북송의 주돈이(周敦頤), 소옹(邵雍), 장재(張載), 정호(程顥), 정이(程頤), 남송의 주희(朱熹) 등 일련의 유학자들은 공맹유학의 정통성을 회복하고 그 근본정신에 투철한 새로운 유학을 완성하였다. 이 새로운 학풍의 유학은 도학, 정주학, 주자학, 성리학, 송학(宋學), 성학(聖學)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각각 그 명칭이 담고 있는 내용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도학은 송대 유학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지칭이기도 하지만 특히 그 기본 성격을 매우 본질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뚜렷한 이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높은 도덕적 수양을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본령으로 하면서 동시에 사회의 제반 현실 문제에도 깊이 관계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이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도학은 학자들로 하여금 올곧은 기개로써 현실 문제에 깊이 참여하게 하는 매우 실천 지향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도학은 수기안인(修己安人), 혹은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는 유학의 본령을 가장 충실하게 실천하고자 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다. 뿐만 아니라 그런 유학의 본령을 올바르게 지켜온 선현들을 선정하여 유림의 표상 혹은 진리를 실천한 사표(師表)로 숭모함으로써 그 정통적인 통서(統緖), 즉 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을 수립하였다.

우리나라에는 고려말 원나라로부터 처음 도학이 수용된 후 당시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 교체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고, 조선 왕조 개창 이후에는 정교(政敎)의 정통 이념이 되어 한말까지 유가의 정통적인 흐름으로 존숭됨으로써 우리의 정신사와 학술 문화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내용 및 특징

도학이라는 말은 송대에 본격적으로 대두하게 되어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 유학의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의미로 쓰였다. 이 용어가 처음 쓰인 것은 원대(元代)에 기록된 『송사』였다. 『송사』에는 「도학전(道學傳)」이라는 별도의 편명을 두어 주돈이와 정호, 정이, 주희 등 당대의 중요한 유학자들을 일반 유림과 구분하여 ‘도학자(道學者)’로 지칭하였다. 「도학전」에 수록된 인물들은 공맹의 도를 계승하여 유학의 본령을 엄정하게 인식하고 올바르게 실천한 사람들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 속에는 도통의식(道統意識)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후 도학은 특히 유학의 정통적 통서를 중시하는 의미에서 매우 존숭되었다.

송대의 도학자들은 유학의 도통이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주공(周公)-공자(孔子)-맹자(孟子)로 전하여져 왔으나, 맹자 이후 단절된 심법(心法)을 계승하여 후세에 전하는 ‘계왕성개래학(繼往聖開來學)’의 임무를 스스로의 중대한 책무라고 인식하였다. 유가의 도통에 대해서는 후대의 학자들마다 조금씩 견해차가 있기도 하였으나 송대의 도학자들에 의해 이어졌다는 공통된 인식을 보였다.

도학은 선진 유학의 경전 속에서 고도의 철학적 이론 체계를 보완함과 동시에 오랜 기간 도가와 불교로부터 희석되고 오염된 유교의 본령을 회복하고자 벽이단론(闢異端論)을 전개하였다. 이단에 대한 경계와 비판은 공자는 물론 맹자에게서도 강력하게 제기되었는데, 이러한 비판 정신과 벽위(闢衛) 사상은 도학의 핵심 요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현실 정치나 사회 정의 측면에서 도학은 왕도정치(王道政治)에 기반한 지치(至治)를 지향하였다. 도학자들은 군주가 폭압과 술수로써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패도(覇道)를 철저히 배격하고 인의와 도덕을 베푸는 순정(純正)한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제시하였다. 그들은 지치의 정사(政事)를 베푼 전형적인 임금으로 요(堯)·순(舜)을 들었다.

또한 도학자들은 진리를 수호하고 실천하는 점에서 공자와 맹자가 강조한 살신성인(殺身成仁)과 사생취의(捨生取義)의 마음과 태도를 현실에서 실행에 옮기는 것을 중요한 과업으로 인식하였다. 도학은 인간과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인간 주체의 윤리를 실현하되, 그것은 궁극적으로 천도(天道) 혹은 천리(天理)에서 근원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도학자들은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로 선(善)을 밝히고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으로 자신을 수양하여 현실에서 인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학문의 본령으로 삼았다. 그것은 인간의 구체적 현실에서 진리와 인륜적 규범이 올바르고 굳건하게 구현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강건한 수양을 통하여 진리의 실천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칠, 이른바 ‘이신순도(以身殉道)’의 사생관(死生觀)으로 진리의 파지(把持)를 몸소 실천하는 종교적 태도를 견지하게 되었다.

변천

고려말 신진 사대부들은 우리나라에 수용된 도학을 당시 침체의 늪에 빠져 정치적·사상적·종교적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기존의 유(儒)·불(佛)·도(道) 삼교를 대체할 수 있는 혁신적인 이념으로 확신하였다. 당시 신진 사대부들은 역사적 현실 상황을 판단하는 점에서는 견해차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개혁의 필요성에는 공통의 인식을 보였다. 그러나 여말선초의 지식인들은 점점 정치적·역사적 입장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 일부는 고려 왕조가 정치적 명운을 다하였으므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여야 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하게 되었고, 다른 학자들은 춘추대의(春秋大義)의 강상론적(綱常論的) 입장에서 왕조 자체는 유지하면서 추진하는 개혁을 주장하게 되었다. 결국 혁명론자들에 의해 조선 왕조가 개창되고 정교(政敎)의 이념도 불교에서 유교로 교체되었다. 당시 신진 사대부들은 불교에 대하여 교단적·교리적 비판을 가하여 새로 수용한 도학 사상을 옹호하였다. 결과적으로 도학 사상은 역사적·정치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근원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불교를 대신하여 새로 개창한 왕조의 정교 이념이자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조선 건국 후에는 고려말 충절을 지키며 새 왕조 개창에 죽음으로써 반대하였던 정몽주(鄭夢周) 계통의 학행과 실천을 조선 사림의 정통적 모형으로 인정하는 평가와 인식의 전환이 있었다. 그런 평가와 추존에 따라 우리나라의 도학은 정몽주로부터 출발하여 길재(吉再)로 계승되고, 후대에 이르러서는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로 그 통서가 이어지게 되었다고 보는 도통 의식의 수립도 대두되었다.

조선전기의 도학은 전대미문의 학술 문화와 정치 제도를 꽃피운 세종 이후 세조의 왕위 찬탈로 말미암아 사육신과 생육신 등 절의파(節義派)를 출현하게 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후 계속되는 국정의 문란으로 말미암아 사화(士禍)가 거듭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도학자들이 큰 환란을 당하는 사태가 연이어 발생하였다. 특히 중종 때에는 조광조가 출현하여 한국 도학의 성격을 뚜렷하게 결정하게 되었다.

조광조의 도학은 그 실천에서 선후와 완급이 주밀하지 못하여 급진적이었다는 비평도 있었으나, 그는 출사(出仕) 후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사습(士習)과 민풍(民風)을 바로잡아 차원 높은 도의(道義) 국가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그 도학 정신의 순정성(醇正性)과 치명수지(致命遂志)한 업적은 명실공히 한국 도학의 태산북두(泰山北斗)로 평가되었고, 절대적 숭앙과 함께 후대에도 심대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이(李珥)는 정몽주를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 평한 데 반해, 조광조를 ‘진유(眞儒)’라고 평가하고 우리나라의 도학은 조광조로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조광조 이후 조선조의 도학은 인성론(人性論)을 중심으로 하는 철학적 탐구로의 전환이 있게 됨으로써 이황(李滉)과 이이 같은 대학자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황은 나아가 도를 행하는 행도적(行道的) 측면보다는 물러나 전도(傳道)하고 학문에 전념하는 수교적(垂敎的) 모범을 보였다. 이황은 평생 배우는 기쁨과 가르치는 즐거움으로 고매한 인격과 학문의 심원함을 겸비하여 삶의 품격을 잃지 않는 도학자의 진면목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이황과 동시대 인물로서 조식(曹植)은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경이직내(敬以直內)하고 의이방외(義以方外)하는 처사적(處士的) 삶의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차원의 도학자상(道學者像)을 보여준 바 있다. 또한 이이는 수기와 치인, 이론과 실천의 양면성을 종합적으로 수렴함으로써 진리와 경세를 근본적 차원에서 합일시키고자 했던 도학자의 면모를 충실하게 보여 주었다.

이후에도 수많은 도학자들이 굴기(崛起)하였는데,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국가적 수난기를 통하여 의연한 삶과 죽음을 보인 인물들이 대거 출현하였다. 그것은 한국 도학의 특성이 국내적으로는 불의에 대하여 항거하고, 대외적으로는 주권을 훼손하는 외침이 있을 때 국가를 수호하는 강력한 의리 사상으로 표출되어 나왔음을 의미한다. 조헌(趙憲)·이순신(李舜臣)을 비롯한 수많은 문무겸전의 인물들을 비롯하여 홍익한(洪翼漢)·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삼학사(三學士), 송시열(宋時烈) 등의 의리 사상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리 사상은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이항로(李恒老)·김평묵(金平黙)·유중교(柳重敎)·최익현(崔益鉉)·유인석(柳麟錫)·곽종석(郭鍾錫) 등 척사위정파(斥邪衛正派)의 출현으로 이어져 민족적 주체성을 수호하는 강인한 구국 정신의 발로를 보여 주었다. 또한 이러한 의리 사상은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광복을 위한 애국지사의 충절로 이어져 면면히 계승됨으로써 주체적 구국 정신의 표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편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도학은 전쟁으로 피폐하고 혼란해진 당시 사회 질서와 윤리 의식의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예학으로 전환되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조선후기 예교 문화의 기저를 이룩하게 되었으니, 대표적인 학자로는 송익필(宋翼弼)·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 등을 들 수 있다.

의의

우리나라에 수용된 도학은 유학을 정교의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의 정통적인 흐름으로 인식됨으로써 조선시대의 사상사적 흐름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도학은 오백여년을 관통하는 선비 정신의 이념적 표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내·외적인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학자나 선비들이 한결같이 보여 주었던 절의 정신과 춘추 의리 사상의 연원으로써 한국 정신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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