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사(三學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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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후 척화를 주장한 죄목으로 청나라에 잡혀가서 순절한 세 명의 선비인 홍익한·윤집·오달제를 가리키는 말.

개설

1671년(현종 12) 송시열이 지은 『삼학사전(三學士傳)』에서 홍익한·윤집·오달제 세 선비를 일컬어 삼학사라 불러 그 이름으로 전하게 되었다.

배경

조선과 후금(後金)은 1627년(인조 5) 정묘화약(丁卯和約)의 체결 이후에도 해마다 조선에서 중국으로 보내던 공물인 세폐(歲幣)의 수량, 포로의 쇄환, 개시(開市) 운영, 명군(明軍)에 대한 지원이라는 문제를 놓고 사사건건 충돌하였다. 조선이 근본적으로 명과의 군신지의(君臣之義)를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가치로 여겼던 반면에, 후금은 궁극적으로 동아시아에서 명의 자리를 대체하려 했기 때문에 양국 간의 재충돌은 불가피하였다.

1636년(인조 14) 2월 후금의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 등은 몽골의 대장(大將) 47명을 포함한 대규모의 사절단을 이끌고 입국하여 후금의 칸 홍타이지에게 황제의 존호를 올리는 데에 조선이 참여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압박에 조선의 조정과 재야에서는 후금과의 교섭을 반대하는 척화(斥和)를 주장하며 강력하게 반발하였는데, 특히 사헌부 장령(掌令)홍익한(洪翼漢)은 후금의 사신을 참수하고 그들의 서한을 불살라 대의(大義)를 밝힐 것을 주장하였다(『인조실록』 14년 2월 21일). 반면 최명길은 그들의 무례(無禮)에도 불구하고 형세의 불리함을 고려하여 후금과의 형제 맹약을 원만하게 지속하는 선에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636년 4월 홍타이지는 만주족 및 몽골족의 여러 왕과 귀순한 명나라 무장들에 의하여 대청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후 청은 조선에게 형제의 맹약을 군신의 맹약으로 바꾸고 청나라 사신의 접대 의례 및 국서(國書)의 격식과 용어도 이에 따라 격상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최명길은 끝까지 청과의 교섭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화(主和)를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윤집(尹集)과 홍문관 수찬(修撰)오달제는 각각 상소를 올려 척화를 주장하며 최명길을 공박한 바 있었다(『인조실록』 14년 11월 8일)(『인조실록』14년 10월 1일). 조선은 전력(戰力)의 열세와 명군(明軍)의 구원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명과의 관계 단절 및 중화 문명이라는 보편적 가치의 포기를 상징하는 청의 요구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결국 병자호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활동 사항

병자호란 개전 후, 청은 압도적 전력으로 조선군을 격파하고 남한산성을 포위한 뒤 조선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점차 높여 갔다. 1637년(인조 15) 1월 중순에 이르면 양국 간 전력의 심각한 불균형으로 인하여 병자호란의 승부는 이미 결판난 상태였고 외부의 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남한산성 농성시 강화(講和) 협상의 쟁점이 되었던 것은 정묘호란 때와 마찬가지로 영토의 할양이나 전쟁 배상금 등의 문제가 아니라 국서(國書)의 형식과 항복의 절차 등이었다. 양국 관계의 변경을 의례적 절차를 통해서도 확인받으려고 한 청은 칭신(稱臣)을 표기한 국서, 인조의 출성(出城) 항복, 척화신(斥和臣)의 압송을 집요하게 조선에 요구하였다.

1637년 1월 하순,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남한산성에 알려지고 농성군의 항전 의지마저 급속히 저하되자 결국 조선은 청이 요구한 강화의 전제 조건을 모두 수락하고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조정에서는 척화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전쟁 직후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내보낸 홍익한을 청에게 내어 주고, 남한산성 내의 척화신은 자수하도록 종용하였다. 이에 다른 척화신에 비하여 정치적 비중이나 연배가 어렸던 윤집과 오달제가 자수함으로써, 조선은 모두 세 명의 척화신을 청나라의 수도 심양(瀋陽)으로 보내게 되었다.

1637년 2월 12일 평양에서 체포된 홍익한은 회군하는 청군(淸軍)을 따라 2월 25일 심양에 도착하였다. 3월 5일에는 홍타이지가 직접 홍익한을 대면하여 회유하고 협박하였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인조실록』 15년 3월 5일). 이후 살해되었는데, 3월 10일에 처형당하였다는 설도 있고, 윤집·오달제와 함께 처형당하였다는 설도 있다. 최명길의 인솔 하에 청군에 넘겨진 윤집과 오달제는 후진(後陣)에 포함되어 4월 15일이 되어서야 심양에 당도하였다. 4월 19일 황제의 명을 받은 용골대가 윤집과 오달제에게 가족과 함께 청국에서 살기를 권유하였으나, 이를 거부하다가 서문 밖으로 끌려 나가 처형당하고 말았다(『인조실록』 15년 4월 19일).

상훈 및 추모

1640년(인조 18) 인조는 이들의 유족에게 매월 급료(給料)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1653년(효종 4)에는 경연 시독관(試讀官)김시진(金始振)의 건의로 홍익한에게는 도승지, 윤집에게는 부제학, 오달제에게는 좌승지의 증직이 추증되었다. 정려도 내려야 한다는 건의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시행되지 않다가, 1681년(숙종 7)에야 남한산성 내에 현절사(顯節祠)를 세우게 되었다. 1686년(숙종 12)에는 홍익한에게 충정(忠正), 윤집에게 충정(忠貞), 오달제에게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모두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1671년(현종 12) 송시열이 이들의 충절을 기리어 『삼학사전(三學士傳)』을 지음으로써, 이들을 합쳐 삼학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심양일기(瀋陽日記)』
  • 『심양장계(瀋陽狀啓)』
  • 『삼학사전(三學士傳)(宋時烈)』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김용흠, 『조선후기 정치사연구Ⅰ』, 혜안, 2006.
  •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 김일환,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기-삼학사전과 삼학사비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연구』 26,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03.
  • 송철호, 「17세기의 旌表政策과 壬丙兩亂人物傳」, 『東洋漢文學硏究』 11, 동양한문학회, 1997.
  • 허태구, 「병자호란 강화(講和) 협상의 추이와 조선의 대응」, 『조선시대사학보』 52, 조선시대사학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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