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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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상에 놓는 건더기가 많고 국물이 적은 국.

개설

탕국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음청류(飮淸類)로서의 탕과 국물 음식으로서의 탕을 혼용하였다. 하지만 유교식 제사가 대중화되면서 국물 음식으로서의 탕이 더욱 강화되었다. 유교식 제사에서 탕은 대개 3탕 혹은 5탕으로 진설되었다. 가가례(家家禮)에 따라, 그리고 제사의 규모에 따라 탕의 주재료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대개 육탕·어탕·소탕·계탕 등을 사용하였다.

내용 및 특징

오늘날 탕은 일반적으로 건더기가 많은 국물 음식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탕이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서유구(徐有榘)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향약(香藥)을 끓여서 마시는 것을 ‘탕’이라고 하였다. 서유구가 생각했던 탕은 국물 음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음청류에 가까웠다. 실제로 그는 향촌 생활에 필요한 16가지 중 음식 항목을 적은 『임원경제지』「정조지」에서 탕을 차, 숙수, 갈수 등과 함께 음청류로 분류하였다.

『임원경제지』보다 더 이른 시기에 쓰인 장계향(張桂香)의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서는 탕을 국물 음식으로 인식하였다. 거기서는 모시조개탕, 가막조개탕, 자라로 만드는 별탕, 고기를 석류알 만큼씩 빚어 장국에 넣어 끓인 석류탕, 난탕, 계란탕과 같이 건더기가 많이 들어간 음식을 탕이라고 적고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두 종류의 탕을 혼용하다가 유교식 제사가 전국화되면서 국물 음식으로서의 탕이 보다 강화되었다. 그 이유는 유교식 제사상에는 반드시 3탕이라고 하여 육탕·어탕·소탕 혹은 육탕·어탕·계탕을 올렸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나 사회에 큰 공을 세워 불천위(不遷位)로 인정받은 조상의 제사는 훨씬 성대하게 치렀으므로 3탕이 아닌 5탕을 올리기도 하였다. 왕실에서도 제사의식에는 면·병·탕을 같은 줄에 진설하였다[『세종실록』 오례 흉례의식 산릉사시급납정지속절제].

대개 제사상에 진설하는 갱과 탕은 한꺼번에 만든다. 갱은 국물만 사용하고, 탕은 건더기를 쓴다. 2004년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충재(冲齋)권벌(權橃) 종가(宗家)에서는 충재의 불천위제사에 육탕·어탕·제육탕·가오리탕·상어탕 이렇게 5기의 탕을 올렸다.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쇠고기·돼지고기·가오리·상어·북어를 넣고 간장으로 간을 한 다음, 국물이 우러나도록 끓인다. 완성되기 전에 닭을 얹어 표면만 익힌다. 그런 다음, 건더기만 각각 따로 떠서 무를 깐 그릇에 각각 5탕으로 진설하였다.

참고문헌

  • 국립문화재연구소, 『종가의 제례와 음식 8』, 월인, 2005.
  • 배영동, 「안동지역 일상음식과 제사음식의 비교」, 『민속연구』9 , 1999.
  • 주영하, 「음식의 유교적 질서와 일상화」, 『유교민속의 연구시각』, 한국국학진흥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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