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기(尹世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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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7년(인조 25)∼1712년(숙종 38) = 66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 병조 판서(判書)와 호조 판서 등을 지냈다. 자는 중강(仲綱)이고, 호는 용포(龍浦)이며,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호조 판서윤계(尹堦)이고, 어머니 풍산 홍씨(豐山洪氏)는 참판(參判)홍영(洪霙)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첨정(僉正)을 지낸 윤면지(尹勉之)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형조 판서를 지낸 윤휘(尹暉)이다. 영의정윤두수(尹斗壽)의 현손이자,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윤세수(尹世綏)의 형이기도 하다. 성품이 급하여 남에게 오해를 많이 받았으나, 판서를 맡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숙종 전반기 활동

1675년(숙종 1)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 3등으로 합격하였고, 같은 해 증광(增廣)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방목(榜目)』] 급제한 뒤에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를 섭행(攝行)하고, 승문원 권지(權知)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 그 후 홍문관(弘文館)저작(著作)을 거쳐, 성균관(成均館)으로 들어가 차례로 성균관 박사(博士)와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으며,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 전임되었다.[『삼연집(三淵集)』 권29 「병조판서윤공신도비명(兵曹判書尹公神道碑銘)」 이하 「윤세기비명」으로 약칭]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쫓겨나고 서인(西人)이 집권하면서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고, 곧 이어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전임되었는데, 그는 대간(臺諫)에서 남인들의 죄를 규탄하고 처벌하는 데 앞장섰다. 예조 좌랑(佐郞)과 병조 좌랑을 거쳐,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그때 그는 현종(顯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된 조경(趙絅)의 신주를 묘정에서 내치자고 주장하였으며, 숙종에게 공주의 제택(第宅)을 화려하게 짓지 말도록 간언하였다.[「윤세기비명」]

그는 접반사(接伴使)문례관(問禮官)이 되어 의주(義州)까지 왕래하면서 청(淸)나라 사신을 접대하였으며, 다시 병조 좌랑을 거쳐, 사간원 정언으로 전임되었다. 그때 그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김덕원(金德遠)과 호조 판서목내선(睦來善) 등의 남인 대신들을 탄핵하였는데, 숙종은 김덕원의 관직만 삭탈하고, 목내선 등은 용서하였다. 그는 아버지 윤계의 뒤를 이어 앞장서서 남인들을 공격하고 물러서지 않았으므로, 이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다.[「윤세기비명」]

1681년(숙종 7)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가, 병조 낭관(郎官)이 되어 실록낭청(實錄郎廳)을 겸임하였고,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전임되었다. 이어 세 번째로 사헌부 정언에 임명되었다. 그때 현종의 딸로 시집을 가지 못하고 일찍 죽은 명선공주(明善公州)와 명혜공주(明惠公州)에게 속한 노비와 전토(田土)를 궁중의 내시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이들 두 공주에 속한 궁방토(宮房土)를 혁파하도록 숙종에게 건의하였다.[「윤세기비명」]

1682년(숙종 8) 그는 문안사(問安使)민정중(閔鼎重)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청나라 심양(瀋陽)에 다녀왔다.(『숙종실록』 8년 2월 17일) 그때 청나라 강희제(康熙帝)가 만주의 고토(故土)를 돌아보기 위하여 중국 연경(燕京)에서 만주 심양으로 거둥하였으므로, 조선에서 문안사를 보내 황제의 안부를 물었던 것이다. 민정중과 윤세기(尹世紀) 두 사람은 모두 노론(老論)으로 서로 뜻이 맞았으며, 민정중도 윤세기를 매우 좋아하여 “윤세기의 기개가 범상치 않다”고 칭찬하였는데, 좌의정민중정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큰 아버지였다.[「윤세기비명」] 심양에서 돌아온 뒤, 윤세기는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었다가, 장악원(掌樂院)정(正)이 되었다. 이어 외직으로 나가 통천군수(通川郡守)가 되었는데, 흉년을 만나 성심을 다하여 백성들을 구휼하고, 학교를 보수하여 고을 자제들을 가르쳤다. 얼마 후 그가 병 때문에 사임하고 돌아오자,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칭송하며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윤세기비명」]

1683년(숙종 9) 현종의 왕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장례에 국장도감(國葬都監) 도청(都廳)으로 임명되어 장례를 치렀다.[「윤세기비명」] 도감에서 수고한 공로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었다. 1684년(숙종 10)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7월 사간원 사간(司諫)을 거쳐 형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 함경도 영흥부사(永興府使)로 나갔다가 1686년(숙종 12) 2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고, 얼마 후 공조 참의로 교체되었다. 이때 윤세기의 아버지 윤계가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강화도유수(江華島留守)로 있을 때 가렴(苛斂)했다고 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조상우(趙相遇)가 탄핵하였으므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당시 시관(試官)의 일을 맡았던 윤세기는 그 일이 끝나자마자 복명(復命)도 하지 않고, 등문고(登聞鼓)를 두들겨 아버지 윤계의 억울함을 호소하니, 왕이 그 실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윤세기와 윤계 부자의 오명이 벗겨지고 조상우는 무고죄로 파직되었다.[「윤세기비명」] 1687년(숙종 13) 예조 참의를 거쳐 승정원 우승지(右承旨)에 임명되었다.

숙종이 어떤 일 때문에 대신들에게 엄한 전지를 내리게 되었는데, 대신들에게 싫어하고 냉대하는 낯빛을 보이자, 우부승지윤세기가 “이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온통 분노와 불만에서 나와 너그럽고 화평한 기상이 부족합니다. 인주의 팔과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대신(大臣)인데, 마땅히 너그럽게 용서해야지, 냉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하고, 간쟁(諫爭)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되었다.

그 후 병조 참지(參知)에 기용되었고, 1688년(숙종 14)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고부사(告訃使)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윤세기비명」] 1689년(숙종 15) 1월 중국 연경에서 돌아와 숙종에게 복명하니, 숙종이 사대(賜對)하였다.(『숙종실록』 15년 1월 29일) 그해 2월 숙종의 후궁인 장소의(張昭儀)의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면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노론은 모두 축출 되었다.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은 제주도로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당시 송시열을 위하여 남인들과의 싸움에 앞장섰던 윤계와 윤세기 부자도 유배되었는데, 아버지 윤계는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아들 윤세기는 경상도 사천(泗川)으로 각각 정배(定配)되었다. 그때 사천으로 귀양을 간 윤세기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방안에만 처박혀 문 밖 출입을 일체 하지 않았다. 그를 수발하려고 따라간 친지 중에 한 사람이 산에나 올라가서 답답한 마음을 풀라고 거듭 권유하였으나, 그는 끝내 이에 응하지 않았다.[「윤세기비명」]

장소의는 왕자를 낳은 후 희빈(張禧)으로 봉작되었는데, 5월에는 장희빈(張禧嬪)이 왕비로 책봉되면서 인현왕후는 폐비(廢妃)가 되었다. 그리고 1690년(숙종 16) 6월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그가 바로 경종(景宗)이다. 윤세기와 윤계 부자는 각각 경상도와 전라도로 나뉘어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으므로 서로 만나지 못한 채, 장희빈이 왕비로 지내던 5년 동안 유배지에서 참담한 생활을 하였다. 1692년(숙종 18) 아버지 윤계가 강진의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숙종이 그 아들 윤세기를 석방하여 아버지 장례를 치르도록 배려하였다. 윤세기는 즉시 강진으로 달려가 아버지의 시신을 염습하여 관을 모시고 고향 장단(長湍)으로 돌아가서, 그의 어머니 풍산 홍씨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윤세기는 친형 윤세강(尹世綱)과 함께 3년 동안 부모의 무덤을 지키면서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무덤 앞에서 통곡하고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몹시 비통해 하였으므로 몸이 약해져 거의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가 되었다.[「윤세기비명」]

숙종 후반기 활동

1694년(숙종 20) 윤세기가 아버지의 복제(服制)를 끝마치자, 조정에서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면서 서인의 소론(少論)이 정권을 장악하고 남인은 축출되었다. 인현왕후도 다시 왕비로 복위되었고, 장희빈도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윤세기는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아버지 윤계가 무고당한 전말을 숙종에게 상소하여 자세히 진술하여 “잘 알았다.”는 대답을 들었다.(『숙종실록』 20년 4월 5일) 얼마 뒤에 계모인 무안 박씨(務安朴氏)를 부양하기 위해 평안도 성천부사(成川府使)로 나갔으나, 평안도관찰사와 틈이 생겨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승정원 우승지로 승진되었다가, 다시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1696년(숙종 22) 그가 장적(帳籍)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고 하여 체포당하여, 심문을 받고 파직되었다.(『숙종실록』 22년 4월 30일),(『숙종실록』 22년 5월 12일) 이에 그는 2년 동안 고향 장단으로 돌아가 부모의 묘소를 지키며 지냈다.

1698년(숙종 24) 6월 그는 이조 판서이세백(李世白)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아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는데, 이때부터 그의 관운(官運)이 점차 트이기 시작하였다. 공조 참의를 거쳐, 10월에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가 만기가 되어 조정으로 돌아온 후에는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다.(『숙종실록』 24년 10월 10일) 1699년(숙종 25) 병조 판서오도일(吳道一)과 함께 군교(軍校)의 시사(試射)고시관(考試官)이 되었는데, 오도일이 멋대로 사정을 베풀고, 시사할 때에 잔뜩 술이 취해 넘어져 소란을 피웠으므로, 윤세기가 오도일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그러나 이때 고시관 두 사람 모두 사정을 썼다고 고발당하자, 윤세기는 본인을 엄정하게 조사해 달라고 자청하였다. 의금부 동지사(同知事)이숙(李塾)이 이들을 조사하였는데, 판 오도일의 편만 들고 윤세기의 말은 듣지 않았다. 윤세기는 노론이었으나, 두 사람은 모두 소론에 속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윤세기는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은거하였다.[「윤세기비명」]

1701년(숙종 27) 1월 승정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는데, 그가 전서(篆書)와 해서(楷書)를 잘 쓴다고 하여, 왕명을 받고 인현왕후의 시책(諡冊)을 써서 올리자, 숙종이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하였다.(『숙종실록』 27년 1월 29일) 그 후 비변사(備邊司)의 추천으로 개성유수(開城留守)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참판이 되었고, 이어 예조 참판으로 전임되었는데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윤세기비명」] 1702년(숙종 28) 5월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가, 8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숙종실록』 28년 5월 14일),(『숙종실록』 28년 8월 11일) 다시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는데, 의금부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윤세기비명」]

1703년(숙종 29)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6월 반송사(伴送使)조상우가 병 때문에 사직하니, 경기도관찰사윤세기를 반송사로 임명하여 청나라 사신을 영송(迎送)하게 하였다. 이때 왕의 특명으로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었다. 당시 청나라 사신들은 지나는 고을마다 끝없이 물건을 요구하였는데, 그는 역관들이 중간에서 일을 잘못 처리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일부러 역관 몇 사람을 잡아 장형(杖刑)에 처하고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자, 청나라 사신 일행의 요구도 일체 없어지게 되었다. 7월 병조 판서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지사(知事)를 겸임하였다. 이때 훈련대장(訓鍊大將)이기하(李基夏)가 병조 판서윤세기에게 욕을 얻어먹고 몹시 화가 나서 왕에게 글을 올려 윤세기를 헐뜯자, 그는 병조 판서에서 물러나 출사하지 않았다. 그 뒤 서북면 출신의 무신(武臣)을 선전관(宣傳官)으로 기용하라는 왕명을 실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9월 병조 판서에서 파직되었다.[「윤세기비명」] 얼마 후 윤세기는 이유(李濡)·서종태(徐宗泰) 등과 함께 승문원 제조(提調)에 임명되었다. 그는 숙종이 왕위에 오른 지 30주년이 되는 1704년(숙종 30)에 숙종에게 존호(尊號)를 올리자고 먼저 주창하였는데, 숙종이 이를 사양하면서 존호를 올리지 못하였다.

1704년(숙종 30) 9월 한성부판윤이 되었다가 다시 병조 판서에 임명되어, 경연청(經筵廳) 지사를 겸임하였다.(『숙종실록』 30년 9월 4일) 11월 사간원에서 병조 판서윤세기가 기생을 축첩하였다고 탄핵하자, 왕이 그의 관직을 체직시켰다.(『숙종실록』 30년 11월 11일)

1705년(숙종 31) 2월 예조 판서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빈객(賓客)을 겸임하였다.(『숙종실록』 31년 2월 7일),[「윤세기비명」] 3월 왕이 비망기(備忘記)로 “대보단(大報壇)에 친히 제사할 때 예의사(禮儀使)인 예조 판서윤세기 등에게 각각 숙마(熟馬) 1필씩을 하사하라.” 하였다. 대보단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구원병을 파견한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궁궐 안에 마련한 제단인데, 매년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잔치를 벌였다. 7월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으로 승진되었다.(『숙종실록』 31년 7월 28일) 1706년(숙종 32) 한성부판윤이 되었다가, 병조 판서에 다시 임명되었다.[「윤세기비명」] 그러나 4월 사간원 정언이익한(李翊漢)이 그를 탄핵하면서 병조 판서에서 파직되었다.(『숙종실록』 32년 4월 21일) 얼마 후 숙종이 다시 한성부판윤으로 기용하였으나, 대간에서 또 탄핵하자 사직하고 고향 장단 오음리로 돌아갔다.[「윤세기비명」] 11월 민진후가 “전 한성부판윤윤세기가 대간의 탄핵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대간에서 그가 곧지 않다는 이유로 탄핵하였는데, 이것이 정말로 실제 정상이 없는 일이라면, 그에게 곧지 않다고 탄핵한 것이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성상께서 각별히 그를 용서하여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숙종이 “그대가 아뢴 말이 정말로 옳다. 내 뜻도 그렇다.” 하고, 특별히 호조 판서에 임명하였다.(『숙종실록』 32년 11월 5일),(『숙종실록』 32년 11월 24일) 그러나 그는 재물이 모이는 기관에 오래 있을 수 없다며 병을 핑계로 면직을 요청하였으므로, 마침내 체직되었다. 그 뒤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고, 1708년(숙종 34) 10월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709년(숙종 35) 청나라 사신이 오자, 윤세기가 관반사(館伴使)에 임명되어,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였다. 그해 겨울, 옥중에 있던 사형수 이식(李鉽)이 사형을 면하기 위하여, 윤세기가 부도(不道)한 말을 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이때 윤세기는 의금부 지사로서 이식의 국문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숙종이 그를 의금부에 회부하여 그 죄를 심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막상 이식과 윤세기를 대질 심문하자 이식의 말문이 막혀 버렸고, 이에 숙종은 윤세기를 용서하고, 이식에게 자백을 받아 법에 따라 사형시켰다. 일찍이 윤세기는 의술이 있던 이식을 만나 한두 번 정도 침을 맞았는데, 그때 그의 노복(奴僕)이 도둑질을 하자, 집안사람들이 그를 잡아 관가에 고발하면서 죄를 받게 하였으므로, 이식은 항상 윤세기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윤세기는 본인의 관직을 삭탈할 것을 자청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흑석동(黑石洞)의 별장에서 살았는데, 빈객(賓客)과 수종인을 사절한 채로 시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일체 말하지 않았다.[「윤세기비명」]

1710년(숙종 36) 다시 병조 판서로 임명되었으나, 여러 번 글을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다. 비변사 대신들도 그가 병이 있으므로 강권할 수 없다고 하니, 왕이 어쩔 수 없이 본직을 체직시키고,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에 임명하였다. 그 뒤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수어사(守禦使)를 겸임하였다.[「윤세기비명」] 1711년(숙종 37) 10월 의정부 좌참찬에 임명되어 선혜청(宣惠廳) 당상관을 겸임하였다.(『숙종실록』 37년 10월 21일),[「윤세기비명」] 1712년(숙종 38) 윤세기는 상소하여 우군애국(憂君愛國)의 심정을 아뢰었다. 그해 겨울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가 세상을 떠나자 그 무덤을 장단의 선산에 만들었으므로, 몸소 천광(穿壙)을 살피려고 산소에 다니러 갔다. 그리고 묘사(墓舍)에서 잠을 자다가 10월 15일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6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숙종이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사제(賜祭)하였다.[「윤세기비명」]

그는 초서(草書)와 해서를 잘 쓰고 문장에도 능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에 문집이 편찬 간행되지 못하였고, 유묵(遺墨)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윤세기비명」]

성품과 일화

윤세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솔직하고 곧아서 자기 속마음을 남들에게 잘 드러냈다. 행동이 거칠고 경솔하며, 행동의 규제가 없어서 사람들에게 상말로 욕을 잘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사대부로 대우하지 않았다. 시론(時論)에서 이를 흠 잡아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였으므로 수십여 년 간 조정에 있었지만 벼슬이 올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명문대가의 유풍을 이어 받아 세속의 악착스러운 작태가 없었으며, 집안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화목하게 지내는 등 행실이 매우 독실하였다.(『숙종실록』 38년 10월 15일) 그는 계모 박씨에게 효성을 다하였고, 배다른 동생 윤세수(尹世綏)·윤세위(尹世緯)·윤세경(尹世經) 3형제를 친형제처럼 사랑하며 이끌어주었다. 윤세수는 관찰사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고, 윤세위는 부사(府使)를 지냈다.

그는 태어나면서 준걸(俊傑)하고 기백이 있었다. 또 의(義)를 좋아하고, 사소한 일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였다.[「윤세기비명」] 윤세기가 오랫동안 반대파의 탄핵에 눌려 출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항상 안타깝게 여기던 이세백은 이조 판서가 되자, 그를 발탁하여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하였다. 그 뒤에 의정부의 추천을 받아 참판으로 승진되었고 뒤이어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며, 명성이 점차 드러나면서 벼슬이 높아졌다. 그 사이 줄곧 군국(軍國)의 중요한 임무를 맡아보면서 명성이 크게 나자, 사람들이 그제 서야 그가 세상에 쓰일 만한 재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숙종실록』 38년 10월 15일)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아버지 윤계가 읽고 있는 책을 곁에서 듣고 있다가 뒤로 돌아앉아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잘 외우자, 아버지가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또일찍이 정원에 빽빽이 가려진 나뭇가지를 잘라내 치우면서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도 이렇듯 시원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였다.[「윤세기비명」]

그는 집에 거처할 때 재산을 경영하지 않았는데, 전곡(錢穀)을 맡아보는 호조 판서에 있었으면서도 청렴결백하여 땅이나 집을 하나도 늘리지 않았다. 평소 청렴하여 집안이 가난하였으므로 항상 생활이 곤궁하였으나, 남을 도와주는 것을 매우 좋아하여, 친구뿐만 아니라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를 찾아와 다급한 사정 이야기를 하면, 녹봉으로 받은 전곡을 아끼지 않고 나누어 그들을 도와주었다.[「윤세기비명」] 그는 도망하여 숨어 있던 자기 집 노비 몇 명을 찾아낸 적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이미 노비 신분을 벗어난 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오랫동안 호적도 없이 폐인(廢人)처럼 살아온 것을 불쌍히 여겨 돈 한 푼 받지 않고, 손수 호구 문서를 써 주었다. 사람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고 그의 큰 도량에 탄복하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부(長湍府) 오목리(梧木里)의 선영에 있는데, 김창흡(金昌翕)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윤세기비명」]

부인 반남 박씨는 첨정(僉正)박세교(朴世橋)의 딸인데, 자녀를 낳았으나 조졸(早卒)하여 기르지 못하였다. 동생인 사간원 대사간윤세유의 아들 윤식(尹湜)을 양자로 삼았다. 측실에서 1남을 두었는데, 윤탁(尹濁)이다.[「윤세기비명」]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삼연집(三淵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농암집(農巖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서계집(西溪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행록(燕行錄)』
  • 『연행일기(燕行日記)』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