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혜청(宣惠廳)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후기 대동법 실시 후 미(米)·포(布)·목(木)·전(錢) 등으로 납부되는 대동세의 출납을 관장하던 재정기관.

개설

선혜청이란 이름은 광해군이 1608년(광해군 즉위) 3월 2일 내린 전교(傳敎)에, 백성에 대한 구휼책을 강구하면서 ‘무선일푼지혜(務宣一分之惠)’, 즉 ‘한 푼의 은혜라도 베풀기를 힘써야 한다[務宣一分之惠]’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대동법 실시 후에는 현물로 납부하던 공납을 포·목·전의 대동미로 전환하여 수취하고 이를 공인(貢人)에게 지급하여 서울에서 공물을 마련하는 방식[京貢]으로 바뀌었다. 토공으로 남겨져 대동미 유치(留置)에서 조달하도록 한 공물이 일부 남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서울의 공인이 선혜청에서 공가(貢價)를 받아, 지정된 중앙관서나 왕실 각전에 납부하였다.

1808년(순조 8)에 간행된 『만기요람』에는, 공물 예산이 ① 선혜청 6도(道) 57공(貢), ② 균역청, 상평창, 진휼청 3청의 17공, ③ 궁사(宮司) 직납, ④ 호조 공물의 4부문으로 편성되어 있다. 1867년(고종 4)에 간행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의하면 공가 지급은 선혜청이 약 88%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주요 중앙관청의 세입이 선혜청, 호조, 균역청의 순을 보인다. 대동미 수입을 가지고 있는 선혜청이 수위를 차지하는 최고의 재정기관이었다. 1751년(영조 27) 편찬된 『선혜청정례(宣惠廳定例)』에는 선혜청이 조달하는 각종 공물과 공가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선혜청에서는 각 도의 대동법 규정에 따라 대동세를 징수하였는데, 공물·진상물 마련을 위한 중앙상납분은 중앙의 선혜청으로 수송케 하고 나머지 유치미는 각 군현의 관수(官需) 및 잡역의 충당을 위한 지방 관청의 유치분으로 남겨 두었다. 이와 같이 정해진 액수에 따라 각 도는 영읍(營邑)의 소요 예산을 작성하고, 그 회계 내용을 선혜청에 보고했다. 예산의 작성은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는 대동사목(大同事目), 강원도·황해도는 상정사목(詳定事目)에 의거하고, 진상물은 공선정례(貢膳定例)에 따랐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선혜청은 1608년(광해군 즉위) 경기도에 선혜법이 시행될 때, 이를 관리·운영하기 위해 처음 설치되었다. 선혜청은 1608년 5월 이원익(李元翼)의 건의에 따라 경기대동청이 상평청(常平廳)과 합쳐지면서 설립되었다. 대동법이 처음에 선혜법이란 이름으로 실시되었기에, 주무관청의 명칭도 선혜청이 되었다.

경기선혜법을 실시하면서, 경기도의 모든 전토(田土)에서 1결당 봄, 가을로 쌀 8말씩 16말을 거두었는데, 그중 14말을 선혜청에서 수납하여, 경기도에서 상납하던 모든 경납물(京納物)의 구매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선혜청은 물가를 참작하여 정해진 공인에게 여유 있게 물품가를 지급하고, 공인은 지정된 물품을 해당 관청에 때맞추어 납부하도록 하여, 방납의 폐단을 막았다. 공인은 대동법 성립 이전의 방납인인 경우가 많았다.

조직 및 역할

선혜청이 설립된 초기에는 영의정이 예겸(例兼)하는 도제조(都提調) 1명과 호조 판서가 예겸하는 제조 1명, 그리고 선혜법과 상평의 업무를 각각 담당하는 낭청(郎廳) 2명을 두었다. 1652년(효종 3)에 재정기관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조직이 확대되었다. 도제조가 3명, 제조가 3명으로 늘어났다. 겸직이 아닌 전임(專任) 제조 1명은 선혜청 당상이 맡았고 산하 각 청의 낭청들에 의해 업무가 수행되었다. 각 낭청의 산하에는 계사(計士) 즉, 산원 1명과 서리, 고직, 사령, 군사 등이 수 명씩 배치되어 업무를 보좌하였다. 다만 청 내에서 일하는 역원의 삭료(朔料)와 경비를 보조하는 업무를 맡은 공잉색(公剩色)에는 전임 낭청이나 계사를 따로 두지 않고 각 청의 역원이 돌아가며 집무하게 하였다.

선혜청은 산하의 각 청마다 독자적으로 내고(內庫)와 강창(江倉)을 비롯한 수 개의 창고를 보유하였다. 이것은 각 청이 선혜청에 예속되어 있지만, 상호 간에 업무가 섞이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독립적으로 수행하였기 때문이다.『육전조례』에 의거하여 직제를 정리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T00003594 01.PNG

변천

1623년(인조 1)에 강원·충청·전라도의 대동법을 관장하는 삼도대동청이 설치되었다가 다음 해에 폐지되었다. 대신 호조 산하에 대동청이 설치되어 강원도 대동법을 담당하였다. 그 결과 인조대에는 상평의 업무와 경기도 대동법을 관장하는 선혜청과, 강원도의 대동법을 관장하는 호조 산하의 대동청이 병립하였다.

그러다가 1652년(효종 3) 김육(金堉)의 제안으로 대동법이 대폭 정비되어 충청도에 다시 실시되었다. 이때 관장기관인 호서대동청이 선혜청 산하에 설치되면서 호조 산하의 대동청, 즉 강원대동청도 선혜청으로 이속되었다. 이로부터 선혜청은 3도 대동법과 상평의 업무를 관장, 집행하는 재정기관으로 위상이 새롭게 정립되었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되면서, 1658년(효종 9)에 호남청, 1677년(숙종 3)에 영남청 등이 설치되었다. 두 대동청 모두 설청(設廳)과 동시에 선혜청에 부속되었다. 이로써 선혜청의 위상이 더욱 강화되었다. 1686년(숙종 12)에는 재해 입은 자들에 대한 구제를 관장하던 진휼청(賑恤廳)이, 1753년(영조 29)에는 균역법 실시 후 군포(軍布)와 결작미(結作米) 및 어염선세(魚鹽船稅) 등을 관장하던 균역청이 선혜청에 속하게 되었다. 진휼청과 상평청을 선혜청에 부속시킨 것은 막대한 양의 대동미를 지닌 선혜청이 구휼과 미가(米價) 조절의 기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1759년(영조 35)에는 선혜청 내에 잡비 조달과 지출을 담당하는 부서인 공잉색이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공잉색을 각 청에서 윤번제로 맡았으나, 1763년(영조 39)부터는 강원청이 전담하였다. 선혜청의 변천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 <표 2>와 같다.

T00003594 02.PNG

이처럼 선혜청은 각 도의 대동법은 물론 상평청, 진휼청, 균역청의 업무를 관장하는 조선후기 최대의 재정기관으로 성장하였다. 선혜청은 조선후기 세입(歲入)의 대부분을 관장·운영하면서 호조의 기능과 업무를 훨씬 능가하였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 존재와 기능에 적지 않은 비판이 가해졌으나 선혜청의 업무와 기능이 너무 비대하여 폐지하지 못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조세제도가 지세제(地稅制)로 통일되면서 선혜청은 대동법의 폐지와 함께 혁파되었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선혜청정례(宣惠廳定例)』
  • 『속대전(續大典)』
  • 『육전조례(六典條例)』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김옥근, 『조선왕조재정사연구』Ⅲ, 일조각, 1988.
  • 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 김옥근, 「조선왕조의 재무기관」, 『부산산업대학교 논문집』5집, 1984
  • 김재호, 「조선후기 중앙재정의 운영」, 『경제사학』43호, 경제사학회, 2007.
  • 박기주, 「선혜청의 수입과 지출」, 『서울학연구』32,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08.
  • 한영국, 「대동법의 시행」, 『한국사』30, 국사편찬위원회, 199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