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貢人)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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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공인 |
한글표제 | 공인 |
한자표제 | 貢人 |
상위어 | 공납(貢納) |
하위어 | 유속사원공공인(有屬司元貢貢人), 무속사공인(無屬司元貢貢人), 별무공인(別貿貢人) |
동의어 | 공물주인(貢物主人), 공주인(貢主人)·공계인(貢契人) |
관련어 | 방납지인(防納之人), 사주인(私主人), 대동법(大同法) |
분야 | 경제/재정/공물·진상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욱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공인(貢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광해군일기』 즉위년 5월 7일, 『영조실록』 36년 6월 3일 |
대동법 이후 정부로부터 일정한 대가를 받고 왕실과 각 관청에 물자를 조달하는 특권을 받은 상인.
개설
조선전기 이래 공납 대상이 되는 품목과 수량이 늘어나면서 농민의 부담도 커졌다.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不産貢物]을 납부해야 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저장·수송·검사에 까다로운 수산물과 고급 수공업 제품들도 많아졌다. 이와 함께 불시에 부과되는 별복정공물(別卜定貢物), 즉 별공(別貢)도 많아졌다. 때문에 자연히 농민은 기한에 맞추어 공물을 납부하기 어려웠다. 그러한 가운데 상인이나 하리(下吏), 또는 경저리(京邸吏), 사주인(私主人) 등이 물품을 대신 납부하고 그 대금을 농민에게 받는 이른바 대납(代納)과 방납(防納)이 성행하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지나친 대금을 요구하는 등 그 폐해가 크게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폐단으로 공납제는 16세 후반부터 개혁의 논의를 맞이하게 되었다. 때마침 시장경제가 발달하고 있었고,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국가 재정도 압박을 받았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1608년(광해군 즉위년) 대동법(大同法)이라는 새로운 제도가 창출되었다(『광해군일기』 즉위년 5월 7일). 대동법은 공물의 상납을 폐지하고, 그 대신 토지 1결(結)에 쌀 12두(斗)를 징수하는 제도였다. 필요한 물품은 정부에서 특정 계층에게 대가를 주고 조달하였다. 이때 정부에 물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공인이었다.
내용 및 특징
1. 공인의 종류
정부의 자금을 지원받아 왕실과 관사에 필요한 물건을 조달하는 공인은 조선후기에 육의전(六矣廛)을 비롯한 시전상인과 함께 관상도고(官商都賈)의 중요한 한 축이었다. 공인은 이전의 방납 사주인(私主人) 중에서 선정되기도 하였고, 시전상인이나 서울에 거주하는 일반 백성 중에서 지정되기도 하였다.
이들 공인을 분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공가(貢價)를 지급받는 기준에 따라 분류하면 원공 공인(元貢貢人)과 별무 공인(別貿貢人)으로 나뉜다. 원공 공인은 공안(貢案)에 올라 있는 공물을 조달하는 공인으로, 다시 소속 아문이 있고 없음에 따라 유속사 원공 공인(有屬司元貢貢人)과 무속사 원공 공인(無屬司元貢貢人)으로 나눌 수 있다. 별무는 원공과 같이 매달 정기적으로 상납되지 않고 수요가 있을 때에만 거두는 공물로서, 이를 담당하는 공인이 별무 공인이었다. 별무는 공가를 선혜청에서 지급하는 원공과 달리, 호조(戶曹)에서 지급하였다. 그리고 지급받는 공가도 원공에 비해 절반이나 2/3 수준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후불이었다. 그러므로 같은 공인이라도 원공 공인과 별무 공인의 경제적 처지는 달랐다.
공인은 그 영업 형태에 따라 수가 무납 공인(受價貿納貢人)과 수가 제납 공인(受價製納貢人), 노동력 제공 공인으로도 나눌 수 있다.
수가 무납 공인은 공가를 지급받아 그 돈으로 물건을 구입해서 납품하는 공인이다. 다시 말해 상인으로서 공인에 종사하는 자이다. 이들은 초기에는 대개 자기 자본을 가지지 않은 관청의 하속배(下屬輩)나 무직자들이었다. 즉, 공인이라는 명목만으로 생산자를 억압하고 수탈해 싼 값으로 물품을 구입하여 정부에 납품해 온 자들이었다. 이들은 도고(都庫)를 차리고 이를 통해 관물 조달을 빙자하여 강제로 매입하기도 하였고, 또는 독점 매입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 공인들은 좀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생산자를 지배·장악하기도 하였다. 즉 생산자를 선대제(先貸制)로 지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수가 무납 공인의 강압적인 지배는 생산자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또한 송상(松商) 등과의 경쟁에 밀려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수가 제납 공인은 공가를 지급받은 만큼 직접 그 품목을 제작해서 납품하는 공인이다. 다시 말해 수공업자로서 공인에 종사하는 자이다. 이들 역시 일부는 상업과 수공업을 겸하면서 선대제적 운영으로까지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사상(私商)과의 경쟁에서 밀려 쇠락의 길을 걷는 모습을 보였다.
공인 중에는 노동력만 조달하는 공인도 있었다. 이들은 대개 별무 공인으로 18세기 이후 많이 창설되었다. 18세기 이후 이들의 창설이 증가한 것은 요역제의 변동, 특히 방역제(坊役制)의 변동과 관련이 많았다. 세곡의 운송과 관련된 노동력 제공이 고용노동을 통한 고립제(雇立制)로 바뀌면서, 여기에서 창출된 이윤을 획득하려는 목적으로 새로운 공인들이 출현한 것이다.
2. 공인의 특권
대동법 시행 초기 공인에게는 여러 가지 특권과 혜택이 주어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와 왕실에서 사용하는 모든 물품은 반드시 지정된 공인만이 조달·납품하도록 하는 영업상의 독점권을 인정한 것이었다. 정부는 공인의 전매 특권, 즉 공물을 납품하는 영업 독점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공인 이외의 일반 상인은 물론이고 권세가에 대해서도 공물을 매매하는 상업 행위를 금하였다. 또 기존 공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공인의 난립을 막고 공계(貢契)의 증설 내지 신설을 억제하였다.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이러한 영업상의 특권을 얻기 위해 상인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이 적극적으로 공인계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공인의 두 번째 혜택은 원공의 가격을 시가의 4~5배 내지 10배의 후한 가격으로 지급하였으며, 그것도 선불로 지급하였다는 것이다. 원공가가 이처럼 후했던 것은 공인의 생활을 염려해서이기도 했지만, 일차적으로는 물가가 올랐을 때나 필요한 양이 늘었을 때 납품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공인들이 공물아문 내외의 역가(役價)가 지급되지 않는 국역도 부담할 수 있도록 하는 조처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공인들은 자기 자본이 없어도 공인에 종사할 수 있었다.
공인의 세 번째 특혜는 정부에서 공가를 미리 지급하고 또 부족한 자금은 대출해 주는 등의 금융 지원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공인들이 물품을 제때 납품하지 못하는 경우, 때때로 그 미납분을 탕감해 주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는 각사(各司)에서 물품 출납의 실무를 맡고 있는 이예(吏隸) 또는 관원이 소속 공인에게 규정 이상으로 거두는 것을 막기 위하여 여러 가지 입법 조치를 마련하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3. 공인의 의무
모든 공인은 공가를 선불로 받은 원공을 정해진 기한 안에 지정된 관사에 납품해야 했다. 아울러 공가를 후불로 받는 별무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물가가 오르거나 물품이 부족해 기한 내에 납품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부득이 기일이 지난 뒤에도 납품해야 했다.
이와 함께 공인은 그들의 특혜에 대한 대가로 특정한 공공 경비, 예를 들어 장빙가(藏氷價)나 각 관사 소속 이예의 월급 등을 부담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과와 무과 시험 때 드는 비용의 대부분도 공인이 부담하였다.
변천
1. 신설 공계의 창설
대동법 실시 이후 모든 공납을 쌀로 거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현물로 상납되는 물종도 있었다. 이를 외방공물(外方貢物)이라고 한다. 외방공물은 점차 서울의 각사나 지방 감영에서 다시 쌀로 거두는 형식으로 변하였는데, 다시 쌀로 거두는 것을 작공(作貢)이라고 하였다. 또한 서울 각사에서 작공하면 경작공(京作貢), 지방 감영에서 작공하면 영작공(營作貢)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경작공·영작공으로 새로운 공인권이 창설되었으며, 주로 17세기 중엽 이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새로 창설된 공계는 대체로 별무 공인이었다. 그것은 조선후기 공물정책이 원공에서 별무 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별무 공인은 공가 지급에서 크게 유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공인으로 새롭게 진입하려는 이들이 많았으며 그 계층도 양반 관료, 부상(富商) 등 다양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공인권 창설이 공가 자체에서 비롯되는 이윤을 노렸다기보다는 공인권이 보장하는 특권을 상업 활동에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새로운 공인권이나 상인들의 동업 조합인 전계의(廛契) 창설은 17세기 말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나다가, 19세기 이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영조실록』 36년 6월 3일). 1791년(정조 15) 신해통공(辛亥通共) 실시 이후, 특권에 기반을 둔 상업 활동이 더 이상 상업 이윤을 축적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때는 국가의 재정 악화로 공가의 지급이 시가에 준해서 이루어졌고 제때 지급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에 더하여 각사 이예의 침탈이나 종실·왕가의 외상 거래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 이 때문에 공인권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2. 공인권의 집중과 공인의 변질
18세기 말이 되면 공인권이 특정인에 의해 집중적으로 매입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를 통한 공인권의 집중은 당시 여러 주인권(主人權)의 집중과 병행된 현상이었다. 그 결과 소유권인 원주인권(原主人權)에 대해 경영권인 분주인권(分主人權)이 분리·성립되었다. 공인권과 기타 주인권의 집중으로 일반 상인 자본은 소수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에 공인권에 투자된 자본 또한 부호층의 단순한 재산 증식을 위한 자본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상도고(私商都賈)의 상업자본의 일부로서 기능하였다.
19세기 말 무렵 주인권은 본래의 권리 내용 면에서 전반적으로 쇠퇴하였다. 반면 투자 자본의 상품유통경제자본으로의 대폭적인 전환 및 확대가 이루어졌다. 관부상업 체계 하에서 공인은 국역 부담자로서 제도적으로 보장된 이윤을 취하는 데 그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특수한 이권이 18세기에 현저하게 대두하는 사상층(私商層)의 투자 대상이 되면서 공인의 의미가 상당히 변질되었던 것이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의 시행과 더불어 공인을 통한 공물상납제도는 폐기되고, 관서마다 물품을 직접 구입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이 제도의 시행으로 공인은 공식적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참고문헌
- 김동철, 『조선 후기 공인 연구』, 한국연구원, 1993.
- 김옥근, 『조선 왕조 재정사 연구 Ⅲ』, 일조각, 1988.
- 송찬식, 「삼남방물지공고(상): 공인과 생산자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진단학보』 37, 1974.
- 송찬식, 「삼남방물지공고(하): 공인과 생산자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진단학보』 38, 1974.
- 오미일, 「18·19세기 공물 정책의 변화와 공인층의 변동」, 『한국사론』 14, 1986.
- 오미일, 「18·19세기 공인권·전계 창설운동과 난전활동」, 『규장각』 10, 1987.
- 유승주, 「조선후기 공인에 관한 연구-삼남월과화약계인의 수가제납실태를 중심으로-」, 『역사학보』 71·78·79, 1976·1978.
- 德成外之子, 「조선 후기의 공물무납제: 공인 연구의 전제 작업으로」, 『역사학보』 113, 198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