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楷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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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後漢) 때 발생하여 현재까지 쓰이는 한자체(漢字體)의 하나.

개설

진서(眞書), 정서(正書), 금예(今隸) 등의 다른 이름이 있다. 한말(漢末)에 발생했으며, 예서의 파책(波磔) 즉, 옆으로 긋는 획의 종필을 오른쪽으로 흐르게 뻗어 쓰는 필법이 생략된 형태로 시작되었다. 위(魏)의 종요(鍾繇), 진(晉)의 왕희지(王羲之)가 하나의 전형을 만든 이후, 예서에서 독립된 온전한 서체로 자리 잡았다.

내용 및 특징

해서(楷書)는 2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서체로서의 법도를 갖추고 있어 본보기가 될 만한 글씨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해(楷)’는 ‘해모(楷模)’의 의미이다. 당(唐)의 장회관(張懷瓘)은 『서단(書斷)』「팔분(八分)」에서 해서의 ‘해’ 자를 ‘법(法)’, ‘식(式)’, ‘모(模)’의 의미라고 규정하였다. 이는 『예기(禮記)』의 “지금의 세상에서 행하여 후세의 사람이 법칙으로 삼는다[今世行之 後世以爲楷].”는 문장에서 ‘해’ 자의 의미와 상통한다.

둘째, 진서, 즉 자체명(字體名)으로서의 해서를 가리킨다. 진서는 해서의 다른 이름인데, 장회관은 『육체서론(六體書論)』에서 “글자가 모두 진정(眞正)하여 ‘진서’라고 한다.”고 하였다. 송(宋) 휘종(徽宗) 때 만들어진 『선화서보(宣和書譜)』「정서서론(正書書論)」에서는 “한(漢) 초기에 왕차중(王次仲)이 처음으로 예서를 해서로 썼다고 하였다. 이른바 해법(楷法)이라는 것은 지금의 정서이다. 사람들이 이를 편하게 여겨 세상에 마침내 성행하였다.”고 하였다.

해서는 글자의 크기에 따라 대해(大楷), 중해(中楷), 소해(小楷)로 구분한다. 해서 중에 매우 큰 글자는 ‘방서(榜書)’, ‘벽과서(擘窠書)’ 등으로 부르지만 보통 10㎝ 정도의 글씨를 ‘대해’라 한다. ‘중해’는 대략 3㎝ 정도의 해서를 가리키며, 당나라의 여러 비판(碑版)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소해는 대략 1㎝ 정도의 해서를 가리킨다. 왕희지의 대표적인 해서 필적인 「황정경」, 「악의론」 등이 전형적인 소해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진서’보다는 ‘해서’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였다. 한편 조선전기에는 ‘예서’라는 용어를 ‘진서’와 혼용한 사례가 여럿 보인다. 조선초기에 편찬된 『고려사』 열전이나 『조선왕조실록』에 이러한 예가 빈번한데, 문종(文宗)이 “초(草)와 예(隸)를 잘했다.”(『문종실록』 1년 9월 1일)든지, 강석덕(姜碩德)이 “전(篆)과 예, 팔분(八分)이 묘했다.”(『세조실록』 5년 9월 10일)든지, 강희안(姜希顔)이 “전과 예, 팔분을 잘했다.”(『세조실록』 10년 10월 9일)는 기록 등이 있다. 이를 일별하면 대체로 해서를 예서라 적을 때에는 예서를 팔분으로 적었고, 해서를 진서라 적을 때에는 예서를 그대로 예서라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서체 용어를 사용한 것은 고려 이후의 구습을 따랐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해서의 학습을 위한 표준 법서를 제작하였다. 조선초기에 간행된 해서 필적의 대표적인 사례로 왕희지의 「동방삭화찬(東方朔畵讚)」, 조맹부의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 등의 소자(小字)와, 조맹부의 「증도가(證道歌)」의 중자(中字)의 간행이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해서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여러 방법을 강구했는데, 그중 1435년 판중추원사 허조(許稠)가 당시 승문원(承文院) 서자자(寫字者)의 글씨가 바르지 않으므로 진서(晉書)를 쓸 것을 주청하자, 세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특(奇特)한 설암체(雪菴體) 즉, 원의 승려 부광의 서체만을 숭상하므로 진자(晉字)를 구할 것이라 했고, 다시 허조가 주희(朱熹)의 『근사록(近思錄)』과 사서(四書), 『소학(小學)』을 대자(大字)로 모인(摹印)하자고 주청하자 세종이 이를 따르겠다고 한 기록이 보인다(『세종실록』 17년 4월 8일). 이 기록은 외교문서의 필사에서 고격(古格)의 서풍을 견지하려는 조정의 노력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梁披雲 主編, 『中國書法大辭典』, 미술문화원 영인본, 1985.
  • 이완우, 「조선 전기의 서론 연구」, 『미술사학연구』 240, 한국미술사학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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