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서(草書)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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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초서 |
한글표제 | 초서 |
한자표제 | 草書 |
상위어 | 서체(書體), 자체(字體) |
하위어 | 광초(狂草), 금초(今草), 장초(章草) |
관련어 | 전서(篆書), 진서(眞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
분야 | 문화/예술/미술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성인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초서(草書)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4년 6월 12일 |
중국 한대(漢代)에 실용을 목적으로 발생한 한자체(漢字體).
개설
초서(草書)의 기원에 대해서는 대략 4가지의 학설이 있다. 첫째, 『논어(論語)』,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의 문헌에 근거한 것이다. 『논어』에 ‘초창(草創)’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초(草)’를 ‘략(略)’의 뜻으로, ‘창(創)’을 ‘조(造)’의 뜻으로 보고 ‘초창’을 ‘초고를 대략 만든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초서의 기원을 찾는 견해이다. 초창이란 말은 뒤에 ‘초고(草藁)’란 용어로 변했다. 둘째, 진(秦) 말기에 발생하였다는 학설이다. 주로 후한(後漢)의 조일(趙壹)과 양(梁)무제(武帝)의 「초서장(草書狀)」에 보이는 초창기의 학설이다. 셋째, 서한(西漢) 초기에 발생하였다는 학설이다. 허신(許愼)은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서문에서 “한(漢)이 일어나자 초서가 생겨났다.”고 하였다. 이러한 학설은 자체(字體)의 연변 과정에서 설명한 것으로 설득력 있는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넷째, 사유(史游)의 「급취장(急就章)」에서 비롯하였다는 학설이다. 「급취장」의 목적은 글자의 대강을 보존하려는 것으로 당대의 유행 서체인 예서(隸書)의 필법을 간략화하여 쓴 것이라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초서는 크게 ‘장초(章草)’, ‘금초(今草)’, ‘광초(狂草)’의 3종류로 나뉜다. 초창기의 장초에서 금초로, 금초에서 광초로 진화하였다.
‘장초’는 예서를 간략하게 쓴 데에서 비롯하였으며, 본래 ‘초’라고만 불렀다. 이 자체가 장초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은 동진(東晋) 이후에 금초가 성행하면서 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이전의 초서를 장초라고 부른 데서 연유한다. 장초라고 부르던 것이 당대(唐代)에 들어 크게 유행하면서 마침내 초서 발전의 가장 앞 단계의 서체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장초의 특징은 대략 4가지로 설명되는데, 예서나 해서처럼 글자마다 독립하여 쓰는 ‘자자구별(字字區別)’, 모든 글자를 같은 크기와 흐름으로 쓰는 ‘만자개동(萬字皆同)’, 필획(筆劃)은 끊어져 있지만 필의(筆意)는 연결되는 ‘필단의연(筆斷意連)’, 다른 서체에 비해 점을 많이 사용하는 ‘주중용점(注重用點)’이 그것이다.
‘금초’는 고초(古草)인 장초 이후에 발생한 용어이다. 서진(西晉) 이전에는 초서를 모두 장초라 하였다. 왕희지 때에 이르러 일종의 온전한 형태를 띤 초서의 전형이 만들어졌는데, 이를 금초로 불렀다. 금초의 특징은 첫째, 글자들을 연결해서 쓰는 ‘자자연락(字字連絡)’이다. 둘째, 장초가 필획을 점으로 만드는 특징이 있는 반면 금초는 점을 다시 이어서 하나의 획으로 만드는 ‘연점위획(連點爲劃)’이 있다. 셋째, 글자의 편방부수를 몇 가지로 단일화시키는 특징이 있다. 넷째, 옆으로 긋는 획의 종필(終筆)을 오른쪽으로 흐르게 뻗어 쓰는 필법인 파책(波磔)이 없는 특징이 있다. 장초는 예서의 필의를 다소 포함하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파책이다. 그러나 금초는 이 파책을 제거하고 필의의 연면(連綿)을 강조한다. 다섯째, 한 글자가 여러 형태를 지니는 ‘일형상중(一形象衆)’의 특징이 있다.
‘광초’는 대략 당(唐) 현종(玄宗) 시기부터 발생한 초서의 한 지류이다. 수당(隋唐) 이후 초서는 실용적인 성격을 떠나 예술성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초서를 쓰는 사람은 자신의 성정을 초서에 담고자 노력하였고, 장욱(張旭)·회소(懷素) 등 광초의 명가(名家)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광초의 특징은 다른 서체에 비해 신속한 운필과 자획과 글자 사이의 연면에 있다. 또한 빨리 쓰기 때문에 그 형태가 매우 분방(奔放)하다. 광초는 전통적 기법이나 고정관념, 이성 등의 영향을 배제하고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손이 움직이는 대로 쓴다는 측면에서 20세기 초 초현실주의 회화의 자동기술법(自動記述法, [automatisme])에 비견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초서의 모습은 실로 다양하고 그 범위가 넓다. 이를 대략 3가지로 대별해보면, 첫째, 법첩(法帖)을 임서하고 자신의 서풍을 만들어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이름을 떨친 서예가의 초서를 들 수 있다. 둘째,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 나타나는 초서 간찰을 들 수 있다. 간찰은 당시 지식인들의 문화적 소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대부분 초서로 작성하였다. 셋째, 고문서에 나타나는 초서이다.
서예가의 초서는 애초 예술적인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초서 명가로는 양사언(楊士彦), 황기로(黃耆老)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대의 윤규(尹珪)·공부(孔俯)·정구(鄭矩), 세종대의 성석린(成石璘)·신장(申檣), 단종대의 박팽년(朴彭年)·강희안(姜希顔), 명종대의 이산해(李山海), 선조대의 한호(韓濩)·정작(鄭碏) 등이 초서를 잘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간찰을 초서로 쓰는 전통은 위진남북조시대로부터 유래하였다. 간찰에 쓰인 초서는 주로 실용성에 목적이 있으며, 소자(小字) 초서의 전형이 되었다. 간찰은 개인의 안부를 사사로이 묻는 것으로 건강이나 혼례, 상례, 제사 등 주로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아주 짧게 기록한다. 따라서 간찰에서의 초서는 예술성보다는 실용적인 측면이 강하다.
고문서의 초서는 실용성이 아주 높은 서체이므로 서예가와 간찰의 초서와는 양상이 다르다. 조선시대 고문서에 나타난 초서는 그 서사자(書寫者)가 대부분 서리(書吏)였다. 서리들의 서체는 각종 상급 관서에 올리는 문서의 작성이나 서책의 등사(謄寫)에 사용한 해서(楷書)와, 어떤 사실을 적어서 내려줄 때 사용한 초서 2가지가 주류를 이룬다. 이때 초서는 주로 속기와 위조의 방지를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예술성보다는 주로 실용성을 위해 작성되었다. 한편 성종대에는 여러 아문의 아전이나 서리들이 공문서를 초서로 쓰는 현상에 대해, 초서는 옮겨 적을 때 틀리기 쉬울 뿐만 아니라 뒷날 상고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일체의 문서에 초서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4년 6월 12일)
참고문헌
- 심영환, 『조선시대 고문서 초서체 연구』, 소와당, 2008.
- 梁披雲 主編, 『中國書法大辭典』, 미술문화원 영인본, 1985.
- 유지복, 「조선시대 초서풍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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