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휘(尹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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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1년(선조 4)∼1644년(인조 22) = 74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형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됐다. 자는 정춘(靜春)이고, 호는 장주(長洲)이며, 시호는 장익(章翼)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의정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윤두수(尹斗壽)이고, 어머니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참봉(參奉)황대용(黃大用)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군자감(軍資監)정(正)을 지낸 윤변(尹忭)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사용(司勇)을 지낸 윤희림(尹希琳)이다. 의정부 찬성(贊成)을 지낸 윤근수(尹根壽)의 조카이자, 영의정윤방(尹昉)의 동생이기도 하다.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청(淸)나라가 실세임을 인정하여 광해군(光海君) 때 후금(後金)과의 교류를 추진하였고, 청나라와의 전쟁보다 화의를 주장한 주화파(主和派)의 한 사람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9년(선조 22)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고, 1594년(선조 27)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다.[『방목(榜目)』] 과거 급제 후,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1596년(선조 29)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고, 이듬해에 병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 29년 1월 16일),(『선조실록』 30년 5월 27일) 1598년(선조 31)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가 되었으며, 이듬해에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으로 전임되었다가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으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 31년 11월 25일),(『선조실록』 32년 1월 24일),(『선조실록』 32년 4월 2일)

1600년(선조 33)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이 되었고,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된 후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1603년(선조 36)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으며, 이듬해 호조 참의(參議)로 전임되었다.(『선조실록』 26년 8월 7일),(『선조실록』 37년 7월 12일),[『동주집(東州集)』 권10 「형조판서장주윤공묘갈명(刑曹判書長洲尹公墓碣銘)」 이하 「윤휘비명」으로 약칭] 그리고 1605년(선조 38) 외직으로 나가 해주목사(海州牧使)가 되었다.(『선조실록』 38년 5월 29일) 이어 1608년(광해군 즉위년)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 온 뒤, 그 이듬해에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 즉위년 4월 28일),[『광해군일기』 1위년 8월 8일 5번째기사],(『광해군일기』 1년 12월 3일)

1610년(광해군 2)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고,(『광해군일기』 2년 윤3월 22일) 1611년(광해군 3)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임명되었으며, 종2품 하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였다.[「윤휘비명」]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면서, 영창대군(永昌大君)과 그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하였는데, 계축옥사를 일으킨 ‘강변칠우(江邊七友)’의 한 사람인 서양갑(徐羊甲)은 그의 형인 윤흔(尹昕)의 첩의 남동생이었다. 게다가 윤휘도 그와 교제가 있었으므로, 결국 그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였다.(『광해군일기』 5년 5월 8일)

1614년(광해군 8) 대북파(大北派)의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하자는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였으나 무산되었다. 그러나 1618년(광해군 10) 폐모론을 다시 제기하고, 모든 문무백관들로 하여금 대궐의 뜰에 나와서 인목대비를 폐위하라는 상소를 광해군에게 올리는 <정청운동(庭請運動)>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는데, 이것을 <무오정청(戊午庭請)>이라고 한다. 이때 윤휘는 서인(西人)으로서 이 논의에 참여하였고, 결국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광해군일기』 10년 1월 4일) 이를 계기로 윤휘는 다시 기용되어 1618년(광해군 10) 성절사(聖節使) 겸 진주사(陳奏使)로서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광해군일기』 10년 5월 5일) 1621년(광해군 13) 영건도감(營建都監)제조(提調)를 거쳐 공조 참판(參判)이 되었다가, 1623년(광해군 15) 예조 참판으로 전임되었다.(『광해군일기』 13년 1월 24일),(『광해군일기』 13년 3월 27일),(『광해군일기』 15년 2월 30일)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인조는 먼저 정청운동에 참여하였던 윤휘의 행위를 거론하였고, 뒤이어 양사(兩司)에서 윤휘를 탄핵하였다. 그리고 그는 결국 전라도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충청도 아산(牙山)으로 이배(移配)되었다.[「윤휘비명」] 그 뒤에 대사령(大赦令)으로 석방되고, 1626년(인조 4) 용양위(龍陽衛) 부호군(副護軍)에 기용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4년 3월 7일]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그는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1629년(인조 7)에는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나갔다가 1631년(인조 9)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전임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7년 1월 12일],[『승정원일기』인조 9년 윤11월 15일] 그 뒤에 조정으로 돌아와서 형조 참판과 호조 참판을 거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이 되었는데, 비변사(備邊司) 낭관(郎官)을 겸임하였다.[「윤휘비명」]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부총관윤휘는 인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호종한 후 왕명을 받고 최명길(崔鳴吉) 등과 함께 여러 번 적진으로 들어가 양국 간의 화친을 교섭하였다. 화의가 성공하면서 남한산성에서 무사히 서울로 돌아왔는데, 그해 12월 비변사 당상관이 되었다.(『인조실록』 14년 12월 18일) 1637년(인조 15) 특명으로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고, 1638년(인조 16)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형조 판서가 되었다.(『인조실록』 15년 11월 1일),(『인조실록』 16년 3월 20일),(『인조실록』 16년 11월 9일)

1639년(인조 17) 주청사(奏請使)의 상사(上使)에 임명되어, 청나라 서울 심양(瀋陽)에 다녀왔고, 1641년(인조 19) 1월 공조 판서가 되었다.(『인조실록』 19년 1월 18일) 그리고 1644년(인조 22) 노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4세였다. 뒤에 그는 장남인 윤면지(尹勉之)가 인조를 호종한 공훈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윤휘비명」] 저서로 『장주집(長洲集)』이 남아 있다

<계축옥사>와 관찰사 윤휘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이 사건의 발단은 강변칠우 또는 죽림칠우(竹林七友)라고 자처하는 서양갑·박응서(朴應犀)·심우영(沈友英)·박치의(朴致毅)·박치인(朴致仁)·허홍인(許弘仁)·김평손(金平孫) 등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은 명가(名家) 출신의 자제들로 비록 재능은 있었지만 서자(庶子)라는 이유로 관리 등용의 길이 막혀있었다. 그러므로 서얼 차별에 대한 사회적 불만을 품고 북한강(北漢江) 부근을 근거로 서로 시와 술로 교유하였다. 그러다가 1612년(광해군 4) 조령(鳥嶺) 길목에서 도적이 은상인(銀商人)을 살해하고 은 6~7백 냥을 강탈하다가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듬해에 모두 체포되었다.

당시 대북파의 이이첨과 정인홍일파는 선조의 계비(繼妃)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와 그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을 몰아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이 사건이 일어나자, 이이첨 일파는 이들을 꾀어, 사면을 조건으로 은자를 탈취한 목적이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허위 자백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계축옥사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 옥사의 주인공인 서양갑은 윤휘의 형인 윤흔의 첩의 남동생이면서, 윤휘와도 교제가 있던 사이였다. 1613년(광해군 5) 5월 사헌부에서 “경상도관찰사윤휘가 역적의 괴수 서양갑을 접대한 사실이 이미 초사(招辭)에 나왔습니다. 이 적이 역모를 꾀하리라고 물론 헤아리기 어려웠겠습니다만, 사행(私行)을 접대하지 말도록 나라에 금제(禁制)가 있는데도, 한 도(道)의 풍헌(風憲)을 담당하고 있는 관찰사로서 자기가 먼저 법을 범했으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중임을 그대로 그에게 맡겨 둘 수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하였고, 7월에도 사헌부에서, “전 관찰사윤휘가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역적 서양갑을 군관이라 칭하고 초료(草料)를 지급해 관마(官馬)를 타고 열읍을 횡행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역적과 서로 친한 사람을 사판에 있게 할 수 없으니, 관직을 삭탈하도록 명하소서”라고 하였는데, 결국 이 일로 인하여 그는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광해군일기』 5년 5월 8일),(『광해군일기』 5년 7월 3일)

계축옥사로 인하여 결국 1613년 6월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이 사사되었고,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江華)에 유배되었다가 1614년 봄에 살해되었다. 또 인목대비는 폐모론이 제기되면서 1618년(광해군 10)에 폐위되었는데, 우의정한효순(韓孝純)이 신료들을 이끌고 폐모론을 주청하는 정청운동을 전개할 때 윤휘도 이 논의에 참여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1월 4일) 그는 이 일을 계기로 다시 기용되어 1618년(광해군 10) 성절사 겸 진주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광해군일기』 10년 5월 5일)

주화파 윤휘의 활동

광해군은 즉위 후 내정과 외교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요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형인 임해군(臨海君)과 아우인 영창대군을 죽였고,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는데, 그의 이러한 행위에 관해 성리학적 윤리관을 중시하던 조선 사람들은 용서받지 못할 패륜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자강(自强)과 기미책(羈縻策)을 바탕으로 한 광해군의 실리 외교 정책은 만주에서 크게 성장한 후금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조선이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으나, 역시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던 당시의 서인(西人)들로부터 큰 불만을 사게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인조는 폐모론에 앞장섰던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일파는 물론 광해군 말기까지 정치에 관여했던 수십 명을 참수시키고 그 추종자들을 유배시켰으며, 기존의 실리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배금(親明背金)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그해 3월 인조는 광해군 말기 관료로 있으면서, 인목대비의 폐모 논의에도 참여하였던 윤휘의 행위를 거론하며, “윤휘는 아첨으로 광해를 섬기면서 백성을 괴롭힐 줄만 알고 김순(金純)과 어울려 비루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관작을 보전하고 있으므로 내가 괴이하게 여긴다” 하였다. 윤휘는 광해군이 오랑캐의 서신에 회답하는 문제를 놓고 여러 신하들과 수의(收議)할 때, 홀로 “명나라의 힘은 미약하니, 의당 누르하치의 후금과 기미(羈縻) 외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조는 개혁 정치 초기에 그 노선에 반하는 주장을 했던 윤휘에 대하여 양사(兩司)에서 한 마디의 언급도 없자 이와 같이 하교한 것이었는데,(『인조실록』 1년 3월 21일) 결국 윤휘는 삭탈관직되고 문외출송(門外出送)당하였다.

이어 4월 양사에서 다시 윤휘를 탄핵하기를, “급제(及第) 윤휘는 오랑캐와 화해하자는 의논을 맨 먼저 주장하여 중국에서 의심하는 단서를 열어 놓았으니, 삭탈관직하고 문외출송하는 벌만으로는 그 죄를 징계하기에 부족합니다. 멀리 유배를 보내소서” 하였다.(『인조실록』 1년 4월 13일) 인조 정권의 외교노선과 정면 배치되는 후금에 대한 기미정책을 주장하였다가 그는 주화(主和)의 실마리를 연 인물로 낙인찍히면서 전라도 장흥으로 유배되었으며, 곧 충청도 아산으로 이배되었다.[「윤휘비명」] 그 뒤에 대사령을 만나 석방된 후 1626년(인조 4) 부호군에 기용되어 한성부 좌윤 등 여러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고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어서, 비변사 낭관을 겸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벌어지자 부총관윤휘는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한 후 왕명을 받고 최명길 등과 함께 여러 번 적진에 들어가 화친의 조건을 교섭하였다. 왕이 그를 돌아보며, “경은 지혜와 생각이 남보다 뛰어나니, 이제 세자와 대신이 나가면 이 어려움이 풀릴 것 같은가?” 하였으며, 또 “경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남한산성에서 나간 뒤에도 다시 경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하였다. 당시 사태가 위급해지자 임금이 일만 생기면 그에게 묻고, 하루라도 그가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이 여겼다. 이에 그는 “이제 화친이냐 싸움이냐를 빨리 결정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상께서는 뜻을 굳게 가져 와신상담 할 일을 도모하소서” 하였다.[「윤휘비명」] 인조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비로소 윤휘가 주장했던 실리외교 정책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해 12월 비변사 당상관이 되었다가,(『인조실록』 14년 12월 18일) 1637년(인조 15) 특명으로 왕의 최측근인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15년 11월 1일)

성품과 일화

성품이 침착하고 무게가 있었으며 재능과 도량이 두루 넉넉하였다, 말은 천천히 하였고 낯빛은 온화하였으며 겉모양을 꾸미려 하지 않았는데, 그는 “죽음과 삶, 재앙과 복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밖에서 온 것으로부터 내 마음을 얽어서 나의 참모습을 잃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비록 여러 번 참소와 비방을 당했지만 언제나 당당하고 움츠려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의정부 당상관으로 있을 때에는 모든 정책은 반드시 원대한 계책을 세워서 추진하였고, 갑자기 시행해서 안 될 정책은 절대로 언급하지 않았다.[「윤휘비명」]

집에는 항상 책상 위에 『자치통감(資治通鑑)』 한 부를 놓고, 퇴청하면 매일 열심히 읽고 역사적 사실을 거울로 삼았다. 또 비록 노비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꾸짖지 않고, 따뜻하게 대하여 주었다.

1611년(광해군 3) 윤휘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을 때 감영(監營)의 아전들이 그를 시험해보려고 엉터리 서류를 가져다가 바쳤다. 그는 짐짓 모르는 체 하고 그 서류를 받아줬는데, 하루는 그 아전이 또 거짓 문권(文券)을 바쳤다. 이에 관찰사윤휘가 웃으면서, “왜 자꾸 나를 속이려 드느냐” 하니, 그 아전이 깜짝 놀라서 굴복하고 크게 부끄러워하였고, 다른 아전들도 이를 듣고 윤휘를 두려워하였다.[「윤휘비명」]

묘소와 후손

시호는 장익이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長湍) 동도(東道) 오음리(梧陰里)에 있고, 이민구(李敏求)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윤휘비명」]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사평(司評)이기명(李耆命)의 딸인데, 자녀는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첨정(僉正)윤면지(尹勉之)이고, 차남은 현감윤건지(尹建之)이며, 3남은 현감윤경지(尹敬之)이다. 장녀는 승정원 도승지이민구(李敏求)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사헌부 감찰(監察)박수소(朴守素)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박동도(朴仝度)의 처가 되었다.[「윤휘비명」] 맏사위 이민구는 『지봉유설(芝峯類說)』을 지은 이수광(李晬光)의 아들인데, 병자호란 때 강화도 분사(分司)의 검찰부사(檢察副使)가 되어, 분사(分司) 대신(大臣) 윤방(尹昉)을 모시고 오랑캐의 침입을 방어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강화도는 결국 오랑캐에게 함락되었다. 그 책임을 물어서 이민구는 충청도 아산에 유배되었다가, 평안도 영변(寧邊)에 이배되어, 13년 동안 귀양살이 하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간이집(簡易集)』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동주집(東州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속잡록(續雜錄)』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지봉집(芝峯集)』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포저집(浦渚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