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필(鄭光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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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2년(세조 8)∼1538년(중종 33) = 77세]. 조선 전기 성종(成宗)~중종(中宗) 때의 문신. 중종 때의 명재상으로 우의정과 좌의정, 영의정 등을 지냈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며, 자는 사훈(士勛)이고, 호는 수부(守夫)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정난종(鄭蘭宗)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장사랑(將仕郞)이지지(李知止)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정사(鄭賜)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된 정귀령(鄭龜齡)이다. 대제학정사룡(鄭士龍)의 삼촌이며, 좌의정정유길(鄭惟吉)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직계 자손 중에서 좌의정정창연(鄭昌衍)과 영의정정태화(鄭太和)를 비롯하여 많은 재상이 나왔다. 좌의정신용개(申用漑)와 절친한 사이였다. 황희(黃喜)와 함께 조선시대 2대 재상으로 꼽힌다.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

1492년(성종 23)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뒤이어 식년(式年)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1세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성균관 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가, 차례에 따라 박사(博士)로 승진하였으며, 의정부 사록(司錄)봉상시(奉常寺)직장(直長)을 겸임하였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44] 조지서(造紙署)사지(司紙)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1496년(연산군 2) 8월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고, 마침내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11월 수찬(修撰)이 되었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성종 2년 8월 11일, 성종 2년 11월 18일『국조인물고』 권44]

마침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고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였는데, 찬성(贊成)이극균(李克均)이 총재관(總裁官)이 되어, 정광필(鄭光弼)을 발탁하여 도청(都廳)으로 삼고 오로지 편수(編修)하는 일만을 전담하게 하였다.[『국조인물고』 권44] 1497년(연산군 3) 12월 연산군이 실록청(實錄廳) 총재관(摠裁官)신승선(愼承善) 등에게는 안장을 갖춘 말 한 필씩을 하사하고, 낭관(郎官)정광필 등에게는 각각 한 자급씩 승품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3년 12월 21일] 1498년(연산군 4) 7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어, 윤11월 교리(校理)로 승진되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4년 7월 2일, 연산군 4년 윤11월 8일] 상정국(詳定局)에서 근무하다가 사무가 번다(繁多)하다고 하여, 예조 정랑(正郞)으로 바꾸어 임명되었는데,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의빈부(儀賓府)경력(經歷)과 성균관 사예(司藝)로 옮겼고,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를 거쳐 예빈시(禮賓寺) 정(正)으로 승진하였다.[『국조인물고』 권44]

1501년(연산군 7) 8월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가, 11월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7년 8월 8일, 연산군 7년 11월 25일] 1502년(연산군 8) 1월 연산군이 문신(文臣)에게 정시(庭試)를 보였는데, 마침 그의 숙부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글을 짓지 않고 먼저 나왔다.[『국조인물고』 권44] 그런데 연산군은 그가 일부러 이문(吏文)을 제술(製述)하지 않았다고 오해하여, 사헌부에 내려서 국문하고, 태형(笞刑) 50대를 때린 후 파직한 뒤에 별직(別職)에 임용하도록 명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8년 1월 5일] 이리하여 서반(西班)으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장악원(掌樂院)정(正)에 임명되었다.[『국조인물고』 권44] 1503년(연산군 9) 11월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는데, 1504년(연산군 10) 6월 연산군에게 사냥을 자주 다니지 말도록 간하였다가 장형(杖刑) 1백 대를 맞고 충청도 아산현으로 유배되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9년 11월 22일, 연산군 10년 6월 17일] 당시 연산군이 법령을 준엄하게 시행하여, 귀양의 처벌을 받은 자는 귀양 가서 자유롭게 지내지 못하였는데, 정광필에게는 하루 종일 빗자루를 들고 아산현의 관문(官門)을 지키게 하였으나, 그는 짜증내거나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국조인물고』 권44]

1506년(연산군 12) 8월 언문으로 연산군의 만행을 비방하는 <언문 익명서 투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연산군은 정광필 압송해서 형신(刑訊)하도록 하고, 그 자손 또한 의심스럽다며 함께 형신하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12년 8월 26일] 이에 정광필이 체포되어 충청도 청주로 압송되는 도중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서 유배에서 풀려났다.

중종 전반기 활동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직후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가, 승정원 우승지(右承旨)로 발탁되었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1년 9월 6일, 『국조인물고』 권44] 1507년(중종 2) 5월 이조 참판(參判)이 되었는데,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성희안(成希顔)을 도와서 우의정박원종(朴元宗)의 심복인 신윤무(辛允武)와 박영문(朴永文) 등의 무관(武官)들의 발호를 견제하다가, 1508년(중종 3) 1월 이조 판서유빈(柳濱)과 함께 체직(遞職)되었다.[『중종실록』중종 2년 5월 19일, 중종 3년 1월 19일] 1508년(중종 3) 2월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6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11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곧 예조 판서(判書)가 되었다.[『중종실록』중종 3년 2월 9일, 중종 3년 6월 15일, 중종 3년 11월 7일, 중종 3년 11월 10일]

1510년(중종 5)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는데, 그해 4월 내이포(內而浦 : 제포)에서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서 남쪽 지방이 소란해졌다.[『중종실록』중종 5년 3월 21일] 이에 전라도 해안이 내이포와 맞닿아 있으므로 조정의 중신(重臣)을 전라도 지방으로 보내 방어 체제를 신속하게 구축하고, 민심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는 도체찰사(都體察使)성희안의 주장에 따라 정광필은 우참찬(右參贊) 겸 전라도도순찰사(全羅道都巡察使)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중종 5년 4월 13일, 중종 5년 4월 14일, 『국조인물고』 권44] 이에 정광필은 전라도로 내려가서 각 고을의 성벽 보수 및 군사 징발, 그리고 군기(軍器) 점검을 통하여 방어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때 정광필은 비변사(備邊司)를 통하여 중종에게 직계(直啓)하고 왕의 명령을 즉시 받아서 신속하게 전라도 해안을 방어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것이 종래 유명무실하던 비변사의 기능을 강화하여, 비변사가 의정부를 압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비변사가 도제조(都提調)제조(提調)・낭관 조직을 비로소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전라도도순찰사로서 큰 공을 세우고 서울로 돌아온 정광필은 그해 6월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박원종 계열의 무신들이 그를 심하게 공격하였으므로, 정광필은 자신은 문관이기 때문에 군사 업무에 익숙하지 못하다며 사퇴하였으나, 중종이 허락하지 않았다.[『중종실록』중종 5년 6월 27일, 『국조인물고』 권44] 1512년(중종 7) 9월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다. 이때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함경도가 더욱 심한데다가 북쪽 오랑캐들이 자주 침략하여 변방의 방비가 아주 위급하였다. 이에 좌의정성희안이, “문무를 겸전한 정광필만이 흉년 구제와 변방 방어를 모두 잘 할 수 있습니다.”며 추천하여, 정광필은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어, 북방의 최전방 함경도로 갔다.[『중종실록』중종 7년 9월 6일]

1513년(중종 8) 정광필이 변방에서 고생한다며 중종이 특별히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시키고, 4월 우찬성(右贊成)에 임명하여 함경도관찰사를 겸임하도록 하였다.[『중종실록』중종 8년 2월 14일, 중종 8년 2월 15일, 중종 8년 4월 2일] 그리고 곧 영의정성희안의 추천으로 정광필은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며, <박영문(朴永文) 옥사>로 박원종 계열이 물러나자 그해 10월 좌의정이 되었다.[『중종실록』중종 8년 4월 15일, 중종 8년 10월 27일, 『국조인물고』 권44] 그 다음해 정광필은 조정의 침체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하여 개혁 정치를 표방하였는데, 이때 이조 판서안당(安瑭)이 사림파(士林派)의 젊은 인재를 등용하면서 조광조(趙光祖)와 김식(金湜), 박훈(朴薰) 등이 조정의 3사(三司)에 배정되었다. 이렇듯 정광필은 훈구파의 중심 세력이면서도 항상 중도 개혁 정치를 표방하였다.

1515년(중종 10) 2월 좌의정정광필은 백관을 거느리고 근정전(勤政殿) 뜰에서 원자(元子 : 인종(仁宗))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중종실록』중종 10년 2월 26일] 그러나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원자를 낳고 바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해 3월 산릉도감(山陵都監) 총호사(總護使)가 되어 장경왕후를 구 영릉(英陵) 부근에 묻었다.[『중종실록』중종 10년 3월 2일] 그해 8월 훈구파의 사헌부 대사헌권민수(權敏手)와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행(李荇)이 왕후 자리가 비었으므로 폐비신씨(廢妃愼氏)를 복위시키자고 주장한 사림파의 박상(朴祥)과 김정(金淨)을 반역죄로 몰아서 탄핵하였다.[『중종실록』중종 10년 8월 8일, 중종 10년 8월 11일] 그러자 정광필(鄭光弼)은 영의정유순(柳洵) 등과 함께 “만약 구언으로 인하여 이같이 죄를 받으면 사람들이 모두 말하는 것을 경계할 것이니, 후일의 폐단이 또한 큽니다.”라며 여러 차례에 걸쳐 구원하여, 박상과 김정은 외방에 3년 동안 유배되는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받았다.[『중종실록』중종 10년 8월 12일, 중종 10년 8월 24일] 이후 왕비 책봉을 둘러싸고 사림파와 훈구파의 싸움이 치열해지자, 영의정유순이 중종의 계비(繼妃)를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때 좌의정정광필은 중종에게 중국의 고사(古事)를 인용하면서 새로 왕비를 맞아들이도록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중종이 이를 받아들여 이듬해 문정왕후(文定王后)를 새로 왕비로 맞이하고 마침내 명종(明宗)을 낳았다.[『국조인물고』 권44] 그리고 1516년(중종 11) 4월 정광필은 영의정으로 승진하여, 중종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하였다.[『중종실록』중종 11년 4월 9일]

한편 이무렵 조광조는 성리학을 지나치게 숭상하고 시문(詩文)의 사장(詞章)을 배척하면서 남곤(南袞), 이행 등의 훈구파의 사장파(詞章派)와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519년(중종 14) 조광조는 과거 제도를 통하여 훌륭한 인재를 뽑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천거 방식을 통하여 우수한 인재를 뽑는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자기 제자들을 뽑아서 3사(三司)의 요직에 앉혔다. 이에 훈구파는 사림파를 맹렬히 비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조광조가 왕의 권위를 무시하고 신권 정치를 실시하려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이때 영의정정광필과 좌의정신용개, 우의정안당이 삼정승으로서 양쪽을 화해시키고자 노력했으나, 대간의 젊은 사림파 간관들은 도리어 삼공(三公)의 재기(才氣)가 부족하다고 공격하였다.

당시 조정의 중신 가운데 사림파의 탄핵을 받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로 대간(臺諫)을 장악한 사림파의 공격과 비난은 과격하였다. 게다가 조광조는 반정 공신 가운데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다고 주장하고, 이어 반정 공신을 다시 심사하여 반정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인의 공신호를 삭제하는 <반정공신 위훈삭제(僞勳削除)>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격분한 훈구파가 사림파를 타도하고자 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그해 5월 정광필은 중풍에 걸렸다고 사직하였으나, 중종이 의정부 주서(注書)를 보내 사직서를 돌려주고 몸을 조리하여 빨리 관직에 나오도록 하였다.[『중종실록』중종 14년 5월 3일, 중종 14년 5월 18일] 그런데 10월 좌의정신용개가 갑자기 병으로 타개하면서 훈구파의 억제가 힘들어졌다. 중종도 지나치게 행동하는 사림파를 싫어하여 훈구파였던 장인 홍경주(洪景舟)에게 언문 밀지(密旨)를 내려서 조광조 일당을 제거하도록 명하였다.[『중종실록』중종 14년 11월 16일] 홍경주는 남곤 및 심정(沈貞) 등과 손을 잡고, 11월 15일 초저녁에 김전(金銓)과 이장곤(李長坤), 고형산(高荊山) 등의 훈구파와 경복궁(景福宮)신무문(神武門) 앞에 모였다. 그리고 연명하여 조광조 일당을 타도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중종에게 올려서, 마침내 중종의 허락을 받았다.[『중종실록』중종 14년 11월 15일] 이어 당시 병조 판서였던 이장곤은 위사(衛士)들을 거느리고 사림파들을 체포하였다.

이때 영의정정광필은 내전에서 중종의 옷자락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하였고, 나중에 빈청(賓廳)에서 우의정안당과 함께 밤 2경(更)이 넘도록 7차례나 상소문을 번갈아 써서 중종에게 바쳤다. 이때 이들은 사림파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거명하면서 그들의 장단점을 열거하고 용서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중종이 석방하기를 망설이는 조광조 등의 8명에 대해서는 “여덟 사람들이 만일 곤장을 맞으면, 반드시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제발 가벼운 형벌을 적용하기를 청합니다.” 간청하였다.[『중종실록』중종 14년 11월 15일, 중종 14년 11월 16일, 중종 33년 12월 6일『국조인물고』 권44] 마침내 중종은 체포된 사림파를 모두 3차례에 걸쳐 석방하고 조광조 등의 8명만을 귀양 보내는 데에 그쳤다. 그러나 정광필이 영의정에서 물러난 뒤에 남곤과 심정의 주장에 따라 귀양을 간 8명 가운데 조광조와 김정(金淨), 김식 등은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었고, 기준(奇遵)과 한충(韓忠) 등은 유배지에서 자결하였다.[『중종실록』중종 14년 12월 16일] 이것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인데, 조선 시대 4대 사화(士禍) 중에서 가장 인명 손실이 적었던 것은 영의정정광필과 우의정안당, 병조 판서이장곤 덕택이었다.

중종 후반기 활동

기묘사화 이후 그해 12월 정광필은 중추부(中樞府)영사(領事)의 한직으로 좌천되었다.[『중종실록』중종 14년 12월 17일] 그러다가 1520년(중종 15) 2월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의금부(義禁府)판사(判事)정광필은 일찍이 수상(首相)을 지냈으므로, 비록 조옥(詔獄)을 중히 여겨서 임명하였겠으나, 좌차(座次)가 미편하니, 체직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중종이 좌의정남곤의 주장에 따라서 정광필을 의금부 판사에서 해임하였다.[『중종실록』중종 15년 2월 18일, 중종 15년 2월 19일, 중종 15년 2월 20일] 1521년(중종 16) 8월 정광필은 사복시(司僕寺)제조(提調)를 겸직하며, 중종에게 전라도와 함경도에 점마(點馬)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기를 청하였다.[『중종실록』중종 16년 8월 6일] 그때 김안로(金安老)의 아들 김희(金禧)가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해 부마가 되었는데, 경기도 장단(長湍)에 있는 호곶[壺串] 목마장의 30결(結)을 하사 받아서 사유지로 개간하려고 하다가, 정광필이 이를 반대하면서 무산되었다. 당시 왕자와 왕녀 등이 국유지를 하사 받아서 사유지로 점거하는 폐단이 많았기 때문에 사복시 제조정광필이 극력 반대하였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정광필은 김안로 집안과 원수가 되는 바람에 중종 후반기에 김안로가 정권을 잡으면서 큰 수난을 겪었다.

1522년(중종 17) 6월 중추부 영사정광필이 아뢰기를, “어제 신을 비변사에 참여시켰는데, 신은 젊어서부터 무예(武藝)를 해보지 않았고, 변방 일도 듣고 본 것이 없습니다. 일이 있는 날에는 조치할 바를 알지 못하니, 변방 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서 대신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중종이 대신들의 추천을 받은 것이라며 허락하지 않았다.[『중종실록』중종 16년 6월 20일] 1526년(중종 21) 1월 정광필이 병이라고 일컫고 중추부 영사를 사직하니, 중종은 휴가를 주고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중종실록』중종 21년 1월 30일] 중종은 정광필을 조정에서 내치지 않고 한직에 머물러두며 국가 원로로서 대접하였다. 그러므로 당대의 실권자였던 남곤과 심정도 정광필을 조정에서 쫓아내지 못하고, 훈구파의 원로로서 대접하였으나, 정권에 참여시키지는 않았다.

1527년(중종 22) 영의정남곤이 죽자, 중종은 건강을 회복된 정광필을 다시 좌의정에 임명하였다가, 10월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다.[『중종실록』중종 22년 5월 6일, 중종 22년 10월 21일, 『국조인물고』 권44] 이때부터 다시 정광필이 정권을 잡고 중종 후반기의 안정기를 구축하였으나, 후계자 구도를 정립하는 문제로 진통을 겪게 되었다. 장경왕후가 낳은 인종에게는 누이 효혜공주가 있었는데, 중종은 세자 인종을 보호하기 위하여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인 김안로를 발탁하여 중용하였다. 한편 계비 문정왕후는 명종(明宗)을 낳은 후 그의 오빠 윤원로(尹元老)와 동생 윤원형(尹元衡)을 조정에 끌어들여 명종을 보호하게 하였다. 이때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은 무관이었으므로, 김안로를 내세우고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1531년(중종 26) 1월 정광필이 나이가 70세에 찼다고 하여 치사(致仕)하겠다고 청하였으나, 중종이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중종실록』중종 26년 1월 2일] 이때 김안로가 도총관(都摠管)에 임명되어 그 세력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그 뒤에 김안로는 이조 판서에 발탁되자, 채무택(蔡無擇) 및 허항(許沆) 등과 손을 잡고, 영의정정광필을 몰아내려고 온갖 계략을 다 썼다.

1533년(중종 28) 김안로는 <작서(灼鼠)의 변(變)>을 일으켜서, 쥐를 잡아 세자 인종을 저주한 범인으로 박원종의 수양딸 박경빈(朴敬嬪)과 그 아들 복성군(福城君)을 지목하였다. 왜냐하면 복성군이 중종의 왕자 가운데 제일 나이가 많으므로, 장자(長子)로서 왕위 계승을 주장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의정정광필은 국문하는 자리에 참여하여 사건이 명백하지 못한 점이 많고, 또 왕실의 지친(至親)을 고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박경빈과 복성군을 구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김안로 일파는 박경빈과 복성군을 고문하여 사건을 조작하고, 아울러 관계가 좋지 않은 남곤 일파의 좌의정심정이 박경빈과 내통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박경빈과 복성군, 그리고 심정은 모두 사사되었다.[『중종실록』중종 28년 5월 23일, 중종 28년 5월 24일, 중종 28년 5월 26일] 이때 김안로는 대간을 시켜서 정광필을 탄핵하였는데, 중종이 처음에는 그를 보호하였으나, 탄핵이 거듭되자 1535년(중종 30) 정광필의 관작을 삭탈하고 전리(田里)로 추방하였다.[『중종실록』중종 28년 5월 25일, 중종 30년 1월 16일] 이리하여 정광필은 충청도 회덕(懷德)의 농가에 옮겨가서 거처하였는데, 김안로는 몰래 사람을 보내어 그를 감시하고 그 과실을 찾아내어 죽이려고 하였다.[『국조인물고』 권44] 그리고 1537(중종 32) 김안로는 인종의 어머니 장경왕후의 묘소인 희릉(禧陵)의 터를 바위산에 잘못 잡은 책임을 정광필에게 뒤집어 씌워서 정광필을 김해로 유배하였다.[『중종실록』중종 32년 5월 25일, 중종 32년 5월 6일]

이후 김안로는 윤원로를 귀양 보내는 등 대립 세력을 축출하다가 이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그해 10월 사사되었다.[『중종실록』중종 32년 10월 27일, 『국조보감(國朝寶鑑)』 권20] 그러면서 정광필은 유배지에서 석방되었으며, 이어 중추부 영사가 되었다.[『중종실록』중종 32년 11월 9일, 중종 32년 11월 10일] 그러나 나이가 많아 한직을 머물면서 중종의 정치 자문을 하였다. 1년 후 1538년(중종 33) 11월 한 겨울에 대가(大駕)를 수행하다가 감기에 걸려서 자리에 누웠다가 회복되었으나, 그리고 얼마 후인 12월 6일 새벽부터 말을 못하고 정신을 잃은 채 회현동 본가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7세였다. 중종이 애통해하면서 마치 후견인을 잃은 듯이 슬퍼하였다.[『중종실록』중종 33년 12월 6일, 『국조인물고』 권44]

저서로는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와 『문익공실기(文翼公實記)』가 있다.

성품과 일화

정광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자태와 용모가 뛰어나서 큰 키에 멋있는 수염을 가졌으며, 정신이 맑고 골격이 수려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속세의 사람이 아닌 신선처럼 보였다. 마음이 너그럽고 드넓으며, 즐겁고 편안하여 남과 경쟁하는 마음이 없었다. 평상시에는 시원시원하고 너그러워 온통 온화한 기색이 넘쳐흘렀으나, 국사(國事)를 논할 때에는 의연한 기색이 늠름하여 누구도 그를 범할 수가 없었다. 여러 사람의 의논이 어지럽게 서로 다툴 때에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써 결정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의심이 풀리는 것이 마치 얼음 녹듯이 하였다. 입으로는 일찍이 남의 허물이나 단점을 말한 적이 없었고, 남의 좋은 점이 있으면 극구 칭찬하여 이를 드러나도록 하였으므로, 사람마다 덕화(德化)를 입어 온 마음을 기울여 그를 사랑하고 떠받들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몸 관리는 검소하기가 마치 가난한 선비와 같았으며, 여러 번 권력이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그의 집에는 찾아오는 손님이 없었다. 그는 퇴청(退廳)하면 언제나 서실(書室)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유학을 연구하고 자신의 덕을 닦았다. 경전(經傳)과 여러 명유(名儒)의 저서들을 모두 섭렵하였는데, 그 내용을 깊이 연구하고 심오한 뜻을 철저히 이해하였으므로, 그가 통달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특히 『좌씨춘추(左氏春秋)』와 『주자강목(朱子綱目)』을 좋아하여 손에서 잠시라도 책을 놓는 일이 없었다. [『국조인물고』 권44]

종묘의 중묘조(中廟朝)에 원묘(原廟)신주(神主) 하나를 잃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하인배들이 전관(殿官)을 모함하기 위하여 한 짓인가 의심하여, 참봉(參奉)수복(守僕) 등을 옥에 가두고 국문하였으나, 아무런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정광필이 추관(推官)이 되어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의옥(疑獄)이다. 만약 실제 범인을 반드시 찾아내려면, 여러 사람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다.” 하고, 왕에게 아뢰어 신주를 찾을 시간을 넉넉하게 얻었다. 그 뒤에 형조에서 우연히 도적을 잡아서 전후에 지은 여죄를 캐물으니, 그 도적이 신주를 훔쳤다고 자복하였다. 그리고 그가 숨겼다고 한 바위 밑에서 신주를 찾아내니, 사람들이 모두 정광필의 훌륭한 사건 처리에 감복하였다.[『동각잡기(東閣雜記)』 하권] 당시 조상의 신주는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았으므로, 왕가(王家)의 신주를 잃어버리는 일은 나라의 엄청난 큰일이었다. 그러나 정광필은 죽은 사람을 위하여 살아 있는 사람을 해칠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1519년(중종 14)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천재(天災)의 원인이 될 만한 정치의 잘못을 물었을 때 사림파의 승지(承旨)한충(韓忠)이 “비루한 재상들 때문입니다.”라며, 면전에서 3정승을 탄핵하였다. 그 뒤에 좌의정신용개가, “신진 사류들이 대신을 면대(面對)해서 배척하는 풍토는 근절되어야 마땅하다,” 하고 한충의 죄를 논하려고 하자 영의정정광필이 “젊은 사람들이 바른말을 하는 풍조를 꺾어서 억제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일이므로 옳지 못하다.”며 만류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정광필은 재상의 넓은 도량을 가졌다고 칭송하였다. 성희안이 말하기를, “백 사람의 신용개가 감히 한 사람의 정광필을 당할 수 없다.”고 칭찬하면서, 정광필을 추천하여 자기 대신 정승이 되게 하였다.[『해동잡록(海東雜錄)』 권4 「성희안」]

한편 정광필이 세상을 떠난 후 사신(史臣)은 정광필에 대하여 “기량이 원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을 포용하였으나, 나라의 큰일을 당할 때에는 의젓한 기품이 있었다. 두 번이나 영상으로 있을 적에 임금을 바로잡아 보필한 공이 많았고, 조야에서 그를 의지하고 존경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김안로가 정광필의 친족을 통하여 위협하기를 ‘조정이 마침내 반드시 큰 화(禍)를 내릴 것이니, 미리 자진(自盡)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으나, 정광필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에 있다. 어찌 사람의 말을 듣고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겠는가. 비록 조정에서 주상이 주륙을 내릴지라도 나는 애통해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주상의 명령을 기다릴 뿐이다.’ 하였다. 김안로가 복죄(伏罪)되자, 제일 먼저 정광필을 용서하고 조정으로 불러들이니,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서로 경하(慶賀)하였다. 그가 서울에 들어오던 날 저자의 아이들로부터 말을 모는 마부에 이르기까지 그가 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정 정승이 돌아왔다.’고 소리치면서 기뻐 날뛰고 춤추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간혹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장차 다시 정승으로 의망하려고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니, 시론(時論)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고 기록하였다.[『중종실록』중종 33년 12월 6일]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익이다. 충성되고 미더우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생각이 깊고 원대한 것을 ‘익(翼)’이라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에 있고, 양곡(陽谷)소세양(蘇世讓)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있다.[『국조인물고』 권44] 1545년(명종 1) 4월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충청도 회덕서원(懷德書院)과 경상도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향사되었다.[『명종실록(明宗實錄)』명종 1년 4월 23일]

부인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예조 정랑송순년(宋順年)의 딸이다. 자녀는 4남을 두었는데, 장남 정노겸(鄭勞謙)은 남부주부(南部主簿)이고, 차남 정휘겸(鄭撝謙)은 경기전(慶基殿)참봉(參奉)이다. 3남 정익겸(鄭益謙)은 사재감(司宰監)부정(副正)이고, 4남 정복겸(鄭福謙)은 강화부사(江華府使)이다. 측실(側室)에서 서출 4남을 두었는데, 서출 장남은 정순(鄭純)이고, 차남 정화(鄭和)는 사역원(司譯院)정(正)이며, 서3남 정상(鄭尙)은 율려습독관(律呂習讀官)이고, 4남은 정종(鄭種)이다.[『국조인물고』 권44] 정광필의 손자 정유인(鄭惟仁)과 정유길, 증손자 정지연(鄭芝衍)과 정창연이 정승이 되었고, 정창연의 아들 정광성(鄭廣成)·정광경(鄭廣敬)·정태화·정치화(鄭致和)·정지화(鄭知和)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정승 판서가 되었다. 동래 정씨 문중에서 정광필의 직계(直系)가 가장 번창하였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 『양곡집(陽谷集)』
  • 『간이집(簡易集)』
  • 『견한잡록(遣閑雜錄)』
  • 『계곡집(谿谷集)』
  • 『고봉집(高峯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묘록별집(己卯錄別集)』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기옹만필(畸翁漫筆)』
  • 『기재잡기(寄齋雜記)』
  • 『농암집(農巖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사집(白沙集)』
  •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잡록(象村雜錄)』
  • 『상촌집(象村集)』
  • 『석담일기(石潭日記)』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송계만록(松溪漫錄)』
  • 『송와잡설(松窩雜說)』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순암집(順菴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집(容齋集)』
  •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월정만필(月汀漫筆)』
  • 『유천차기(柳川箚記)』
  • 『율곡전서(栗谷全書)』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음애일기(陰崖日記)』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조경일록(朝京日錄)』
  • 『죽창한화(竹窓閑話)』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퇴계집(退溪集)』
  • 『포저집(浦渚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
  • 『혼정편록(混定編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간재집(艮齋集)』
  • 『검재집(儉齋集)』
  • 『겸재집(謙齋集)』
  • 『고봉집(高峯集)』
  • 『규암집(圭菴集)』
  • 『금곡집(錦谷集)』
  • 『기재집(企齋集)』
  • 『남계집(南溪集)』
  • 『대산집(大山集)』
  • 『묵재집(默齋集)』
  • 『미암집(眉巖集)』
  • 『범허정집(泛虛亭集)』
  • 『서애집(西厓集)』
  • 『우정집(憂亭集)』
  • 『월사집(月沙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정암집(靜菴集)』
  • 『중봉집(重峰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충암집(冲庵集)』
  • 『충재집(冲齋集)』
  • 『학포집(學圃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