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체찰사(都體察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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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 관련 업무를 총괄하던 임시 관직.

개설

조선에 들어와서도 왕명으로 대신급 인사가 지방에 파견되어 업무를 총괄하는 일이 많았다. 정치적 격변으로 지방관으로는 처리하기 힘든 사건이 많았기 때문이다. 업무가 중복되거나 권한 문제 등의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도체찰사(都體察使)가 세종 때 군사와 국정에 관한 중대한 사업을 추진하는 주체로 설정되면서 최고위층 관료가 도체찰사로 그 지역에 파견되어 국가적 사업을 처리했다. 세조 때 체찰사라는 이름을 없애고 순찰사로 통일하였다. 불편하다는 의견이 커져 『대전속록』에서 정1품에게 도체찰사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후기에는 군사 관련 일을 담당하는 사람 가운데 의정(議政)에게만 도체찰사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담당 직무

고려후기 이래 다양한 이름의 사신(使臣)을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하였다. 이는 당시 외적의 침범이 빈번한 데다가 통치 체제의 운영상 혼란 때문에 사회 모순이 커져 민생이 극도로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특히 도별로 군대를 지휘하던 원수(元帥)가 겸임하면서 군정(軍政)까지 총괄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왕조가 시작된 뒤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국가의 건설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다양한 종류의 사신들이 파송되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군사·국방의 임무와 관련해서 보냈다.

그러나 업무가 뚜렷하지 않고 구별도 없이 파견되다 보니 자연스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각 도의 군·민정을 총괄했던 관찰사와 절제사의 업무가 겹치고, 권한 설정 등의 해결 과제가 생겼다. 마침내 조선의 제도와 문물의 정비 작업이 한 단계 발전되던 세종대에 이르러 관찰사와 절제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군사와 국정[軍國]에 관한 중대한 사업의 주체로 도체찰사가 설정되었다. 즉 재상급에 해당하는 고위 관료가 왕명에 따라 당해 지역에 파견되어 국가사업을 주도하여 처리하는 체제가 구축되었다.

그 실마리는 1428년(세종 10)에 수상이었던 황희(黃喜)가 도체찰사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그 지역에 본격적으로 성곽을 쌓게 한 일이었다(『세종실록』 10년 11월 19일). 그의 뒤를 이어 황보인(皇甫仁)이 무려 10여 년에 걸쳐 다양한 지역으로 파견되어 업무를 처리하면서 그 전형적인 모습을 이룩하였다.

그것은 세조대에도 이어졌다. 신숙주(申叔舟)·한명회를 필두로 최고위 재상들이 전국 8도에 고루 파견되었다. 임무도 여전히 국방 군사 문제에 주력했으나 좀 더 국정의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주군을 병합하기 위한 예비 조사, 지방 정세 시찰, 국왕의 순행 준비, 굴포 개착, 백성 위무, 양전 사업 등 다양했다. 특히 내용상 관찰사, 절도사-수령, 변장 차원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사안이 많았고 더구나 한 도에 국한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재상이 직접 내려가서 조사하여 처리해야 했다. 이로써 중앙집권적 통치의 또 하나의 축이 되었다.

변천

세종 때에 이르러 사신으로 나가는 사람의 호칭을 품계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그러나 반드시 일치하지 않고 편의에 따라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황보인은 종1품 때와 정1품 때에도 각각 파견되었다. 혼선을 피하려 함인지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나 세조 때에 사신이 지닌 직질(職秩)의 구별 없이 모두 순찰사라고 부르게 했다[『 성종실록』19년 9월 5일 2번째기사]. 이는 관료제 운영의 속성상 매우 불편하였다.

성종 때 이를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경국대전속록』에 이르러 왕명을 받들고 나가는 재상을 정1품은 도체찰사, 종1품은 체찰사, 정2품은 도순찰사, 종2품은 순찰사, 3품은 찰리사라고, 각 품계에 따라 부르도록 했다. 즉 맡은 업무에 따라 구별하지 않고 파견되는 재상의 품계를 근거로 해서 구분하는 방식이었다.

두 차례의 커다란 전란을 겪은 뒤 조선후기에 이르러 상황이 바뀌었다. 이때 역시 다양한 사신이 파견되었으나 군사 업무의 중요성이 대단히 커졌다. 그런 연유로 말미암아 『속대전(續大典)』에서는 재상으로서 군사 업무를 담당하라는 왕명을 받은 사람은 품계에 따라 군직의 호칭을 달리하도록 규정하되, 의정(議政)은 도체찰사, 1품 이하는 도순찰사, 종2품은 순찰사, 3품은 찰리사라고 불렀다. 의정으로서 군사 업무로 파견되어야 도체찰사라고 불렀다. 그만큼 도체찰사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뜻이다. 같은 1품이라도 의정이 아니면 도체찰사의 호칭을 사용하지 못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대전속록(大典續錄)』
  • 『속대전(續大典)』
  • 김순남, 『조선초기 체찰사제 연구』, 경인문화사, 2007.
  • 이상훈, 「조선전기 도체찰사에 대한 소고」, 『군사』 38, 1999.
  • 임선빈, 「여말선초 경·외관직 분화와 사신적 외관의 전임외관화」, 『조선시대의 사회와 사상』, 조선사회연구회, 1998.
  • 임선빈, 「조선초기 ‘외방사신’에 대한 시론」, 『조선시대사학보』 5, 1998.
  • 차문섭, 「조선중기 왜란기의 군령·군사지휘권 연구 - 도체찰사·도원수를 중심으로」, 『한국사학』 5,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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