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문(神武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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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복궁 북쪽의 궁성문.

개설

경복궁이 창건된 지 3년이 지나 1398년(태조 7)에 궁성을 쌓았는데, 1399년(정종 1)에 완성되었다(『태조실록』7년 7월 27일)(『정종실록』 1년 1월 19일). 처음에는 북쪽을 제외하고 동·서·남의 삼면에만 궁성문을 세웠고 북쪽 궁성은 목책으로 되어 있었다. 후에 이를 막아 궁성을 쌓았다가 1433년(세종 15) 제왕의 궁성에는 4개의 대문이 있어야 한다는 상소를 받아들여 북문을 새로 지었다. 북문의 이름은 1475년(성종 6)에 서거정(徐居正)에게 짓게 하여 ‘신무문’이라 하였다(『성종실록』6년 8월 23일).

위치 및 용도

신무문은 경복궁 북쪽 궁장에 있는데 북쪽의 한가운데가 아닌 서쪽으로 3분의 1 지점에 치우쳐 있다. 조선후기에 북쪽의 육상궁이나 후원을 이용하기 위하여 왕이 자주 사용한 문이었다.

고종대 중건한 경복궁의 동쪽에는 건춘문(建春門)에서 건청궁(乾淸宮)까지, 서쪽에는 영추문(迎秋門)에서 신무문까지 궁성 안쪽으로 내궁장이 있고 그 사이가 궁궐을 지키는 순라길이었다. 신무문 안쪽은 서쪽 순라길이 끝나는 곳으로 여기에 창회문(彰會門)이 있다. 신무문 안쪽은 마치 복도와 같이 담장이 있어서 남북으로 긴 통로를 만들고 그 남쪽에 유형문(維亨門)을 세웠다. 이 문은 사정전(思政殿)과 수정전(修政殿) 영역에서 신무문으로 나갈 때 이용하는 문이다.

변천 및 현황

신무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고종대에 중건되었다(『고종실록』 2년 9월 17일).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고종대 중건한 것이며, 경복궁의 궁장 중에서 북쪽 궁장과 궁장에 있는 월문, 수문과 함께 원형이 잘 남아 있는 구간이다.

형태

신무문에는 고종대 중건한 건물이 현존하고 있으며 문루의 크기는 건춘문, 영추문과 같으나 육축의 높이와 폭을 1자 반씩 작게 지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고종대 이전에는 신무문 밖에 회맹단(會盟壇)이 있어서 왕이 신하들과 회맹제(會盟祭)를 할 때 신무문을 이용했다.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신무문 밖에 후원과 경무대(景武臺)를 조성하였는데 이곳에서 군대의 사열, 대규모의 행사, 문무 과거시험 등이 거행되어 그때마다 신무문은 왕의 출입문이 되었다. 영조대 이후 경복궁 북서쪽에 있는 육상궁에 참배하러 나갈 때에도 신무문을 이용했다(『영조실록』 4년 7월 17일).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 1 경복궁』, 수류산방, 200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