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룡(鄭士龍)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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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정사룡 |
한글표제 | 정사룡 |
한자표제 | 鄭士龍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성종~선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운경(雲卿) |
호 | 호음(湖陰)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91년(성종 22) |
사망 | 1570년(선조 3) |
본관 | 동래(東萊)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양주(楊州) |
증조부 | 정사(鄭賜) |
조부 | 정난종(鄭蘭宗) |
부 | 정광보(鄭光輔) |
모_외조 | 전의 이씨(全義李氏) : 이삼격(李三格)의 딸 |
처_장인 | 창녕 성씨(昌寧成氏) : 성렬(成烈)의 딸 →(자녀)1남 |
저술문집 | 『호음잡고(湖陰雜稿)』,『호음초당집(湖陰草堂集)』,『조천일록(朝天日錄)』, 『동사록(東槎錄)』, 『황화집(皇華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정사룡(鄭士龍) |
총론
[1491년(성종 22)∼1570년(선조 3) = 80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의 문신. 예조 판서(判書)와 병조 판서 등을 지냈다. 자는 운경(雲卿)이고, 호는 호음(湖陰)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창원부사(昌原府使)정광보(鄭光輔)이고,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이삼격(李三格)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세조(世祖)의 공신인 동래군(東萊君)정난종(鄭蘭宗)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정사(鄭賜)이다. 영의정정광필(鄭光弼)의 조카이기도 하다. 조선 중기 사장파(詞章派) 문학의 거두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07년(중종 2)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으며, 1509년(중종 4)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19세였다.[『방목(榜目)』] 1511년(중종 6) 홍문관(弘文館)에 뽑혀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6년 10월 14일] 1512년(중종 7) 3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가, 12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중종실록』중종 7년 3월 6일, 중종 12월 6일] 1516년(중종 11) 문과 중시(重試) 1등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6세였다.[『방목』] 장악원(掌樂院)첨정(僉正)이 되었다가, 홍언필(洪彦弼) 및 성세창(成世昌) 등과 함께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에 임명되어, 천문학을 익혔다.[『중종실록』중종 11년 9월 21일, 중종 11년 11월 7일]
1517년(중종 12)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518년(중종 13) 2월 홍문관 응교(應敎)로 전임되었다가, 그해 6월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중종실록』중종 12년 11월 19일, 중종 13년 2월 4일, 중종 13년 6월 28일] 이때 사간원 정언(正言)이충건(李忠楗)이 정사룡(鄭士龍)의 처첩(妻妾) 문제를 가지고 탄핵하는 바람에 체직되었다.[『중종실록』중종 13년 7월 3일] 1519년(중종 14) 11월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는데, 사헌부에서 다시 그의 처첩 문제를 가지고 탄핵하였으나, 그의 문학적 재질을 아낀 중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중종실록』중종 14년 11월 20일, 중종 14년 11월 23일] 1521년(중종 16) 9월 명(明)나라 사신의 원접사(遠接使)이행(李荇)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그해 11월에 홍문관 전한(典翰)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중종 16년 9월 21일, 중종 16년 11월 20일]
1522년(중종 17) 2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중종실록』중종 17년 2월 10일, 중종 17년 9월 27일] 1523년(중종 18) 2월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윤4월 홍문관 부제학(副堤學)이 되었으며, 이후 호군(護軍)으로 좌천되었다.[『중종실록』중종 18년 2월 18일, 중종 18년 윤4월 22일] 당시 정사룡은 부친상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여묘살이를 하지 않고 서울 집에 거처하면서 첩을 거느리고 살았으며 아들과 본처가 고향인 경상도 의령에서 선영을 지켰다. 이 문제로 1526년(중종 21) 5월 그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사판에서 삭제되었으며 외방으로 추방되었다.[『중종실록』중종 21년 5월 11일] 이렇게 벼슬길이 막힌 정사룡은 고향인 의령의 낙동강 정암나루[鼎津]의 경치 좋은 곳에 십완당(十阮堂)을 짓고 7년 동안 머물렀다.
그런 가운데 1528년(중종 23) 경상좌도수사(慶尙左道水使)김철수(金鐵壽)에게 해운포(海雲浦)의 수군(水軍) 30명을 빌려서 의령의 낙동강 가에 어량(魚梁 : 통발 어장)을 만들고 제방을 쌓았다가, 경차관(敬差官)에게 발각되었다.[『중종실록』중종 23년 10월 9일, 중종 23년 10월 10일] 이에 서울로 압송되어 추고(推考)당하였다. [『중종실록』중종 23년 12월 20일] 1533년(중종 28) 중종의 노여움이 풀려서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었다가, 그해 3월 장악원(掌樂院)제조(提調)를 거쳐, 7월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중종 28년 3월 16일, 중종 28년 3월 17일, 중종 28년 7월 19일] 그러나 본래 물의가 있는 정사룡에게 사표(師表)의 직임을 맡길 수 없다는 대간의 반대로 체직되어 형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중종 28년 7월 20일, 중종 28년 7월 22일, 중종 28년 7월 25일] 그리고 10월에는 명나라 사신의 선위사(宣慰使)에 임명되어, 의주(義州)로 파견되었다.[『중종실록』중종 28년 10월 13일] 1534년(중종 29) 8월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어 명나라로 파견되었다.[『중종실록』중종 29년 8월 8일, 중종 30년 1월 11일] 1535년(중종 30) 2월 성균관 유생(儒生)을 가르칠 사유(師儒)에 뽑혔고, 8월 호조 참의가 되었다가 요동 대인(遼東大人) 선위사에 임명되었는데, 변경 지역의 상황을 탐지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중종실록』중종 30년 2월 22일, 중종 30년 8월 10일]
1536년(중종 31) 4월 중종이 경회루(慶會樓)에 나아가 종2품 이하 문관들을 친시(親試)하였는데 ‘등왕각(滕王閣)’을 제목으로 칠언 배율(七言排律) 20운(韻)을 짓게 하였다. 이때 그가 1등 장원을 차지하면서 가자(加資)되었다.[『중종실록』중종 31년 4월 22일] 5월에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중종실록』중종 31년 5월 1일] 12월 원접사소세양(蘇世讓)이 몸이 좋지 않았으므로 정사룡이 정2품의 직함을 가차(假借)하여 원접사를 대신하였다.[『중종실록』중종 31년 12월 1일] 그 뒤에 가차한 직함으로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중종 31년 윤12월 27일]
1537년(중종 32) 5월 중국 명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 반송사(伴送使)가 되었다. 이때 그는 중국 사신의 요구로 우리나라의 건국과 세계(世系), 그리고 역년(曆年)을 무심코 적어 주었는데, 이 일로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였다며 추고(推考) 받고 체차되었다.[『중종실록』중종 32년 5월 25일, 중종 32년 5월 27일, 중종 32년 5월 29일] 또한 그 이후 9월까지 대간의 탄핵이 계속되었으므로 결국 파직되었다.[『중종실록』] 1539년(중종 34) 3월 고향 의령으로 돌아갔다가 7월 대구부사(大丘府使)가 되었으나,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중종실록』중종 34년 7월 12월] 그해 9월 중국 사신으로 왔던 공용경(龔用卿)이 정사룡에게 시를 보내자, 조정에서 그를 사은사(謝恩使)로 보내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고향 의령에 있던 정사룡의 병세가 아주 심각하였으므로 정사룡은 이에 응답하는 시마저 보내지 못하였다.[『중종실록』중종 34년 9월 17일, 중종 34년 10월 28일, 중종 34년 10월 29일, 중종 34년 11월 1일]
1542년(중종 37) 8월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가, 11월 예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중종실록』중종 37년 8월 3일, 중종 37년 11월 4일] 1543년(중종 38) 2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으며, 이어 공조 판서가 되었으며, 1544년(중종 39) 9월 동지사에 임명되어 부사(副使)형조 참판(參判)송인수(宋麟壽)와 함께 명나라 북경(北京)에 갔다.[『중종실록』중종 38년 2월 8일, 중종 39년 9월 6일] 이때 조선에 표류한 중국 사람들을 압송하였다.[『중종실록』중종 39년 9월 11일]
명종 시대 활동
1545년(명종 즉위년) 12월 원접사가 되어 중국 사신을 맞이하였는데, 그 공로로 이듬해 2월 가자되고,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가 되었다.[『명종실록(明宗實錄)』명종 즉위년 12월 1일, 명종 1년 2월 23일, 명종 1년 2월 27일] 1547년(명종 2) 6월 형조 판서로 임명되었으며, 1549년(명종 4) 5월에는 홍문관 제학(提學)에 임명되어 경연청(經筵廳) 지사를 겸임하였다.[『명종실록』명종 2년 6월 11일, 명종 4년 5월 7일] 1550년(명종 5) 3월 돈녕부(敦寧府) 지사가 되었고, 5월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명종실록』명종 5년 3월 19일, 명종 5년 5월 15일] 1553년(명종 8) 3월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으며, 그해 9월에는 불에 탄 경복궁을 수리하는 선수도감(繕修都監)의 제조가 되었다.[『명종실록』명종 8년 3월 21일, 명종 8년 9월 15일, 명종 8년 9월 26일]
1554년(명종 9) 2월 후보자 중에서 가장 높은 권점(圈點)을 받아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명종 9년 2월 19일, 명종 9년 2월 29일] 그해 9월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되어 행(行) 예조 판서가 되었는데, 얼마 후인 11월에 그가 기력이 쇠약해졌다며 사직하였고, 춘향대제(春享大祭)를 친행할 때 찬례(贊禮)를 맡기도 어렵다며 거듭 체직하기를 간청하니, 명종이 아래 관원에게 대행(代行)하도록 하였다.[『명종실록』명종 9년 9월 18일, 명종 9년 9월 21일, 명종 9년 11월 27일] 1555년(명종 10) 7월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병이라면서 체임하기를 간청하였으나, 명종이 윤허하지 않았다.[『명종실록』명종 10년 7월 24일] 윤11월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병조 판서정사룡은 문장(文章)에 능하지만 무비(武備)에 대한 일은 익히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변방이 위태로운 때에는 군사의 일을 잘 아는 중신(重臣)으로 병조의 장관을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정사룡은 병으로 오랫동안 직무를 보지 못해 병무(兵務)가 더욱 허술해졌으니, 체직하소서.” 하니, 마침내 체임하고, 윤11월 한직인 중추부 판사(判事)에 임명하였다.[『명종실록』명종 10년 윤11월 21일, 명종 10년 윤11월 22일] 그때 정사룡의 나이가 75세였다.
1558년(명종 13) 8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11월 다시 중추부 판사에 임용되었다.[『명종실록』명종 13년 8월 24일, 명종 13년 11월 23일] 이때 정사룡은 별시(別試)의 응시생인 신사헌(愼思獻)에게 전시(殿試)의 책제(策題)를 미리 알려주었다고 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그가 종종 때의 구신(舊臣)이라 하여 용서받았다.[『명종실록』명종 13년 11월 26일] 1560년(명종 15) 10월 공조 판서가 되었고, 1562년(명종 17) 5월 보국(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로 가자되어 중추부 판사로 임명되었다.[『명종실록』명종 17년 5월 6일] 그러나 결국 권간(權姦) 이량(李樑)과 결탁했다고 하여 중추부 판사의 관작마저 삭탈당하고 산관(散官)으로 머물게 되었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3년 4월 1일] 1563년(명종 18) 9월 양사(兩司)에서 정사룡이 정처(正妻)를 소박하고 자식을 때려 죽였다고 탄핵하니 관직을 삭탈하도록 하였다.[『명종실록』명종 18년 9월 4일] 이때 실권을 잡았던 이량이 몰락하면서 양사에서 정사룡을 맹렬하게 탄핵하였던 것이다.
이후 서울 동교(東郊)에서 7년 동안 은거하다가, 1570년(선조 3) 서울의 본가(本家)에서 노병으로 돌아갔는데, 향년이 80세였다. 그 뒤에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의 직첩은 회복되었다.[『선조수정실록』선조 3년 4월 1일]
저서에 『호음잡고(湖陰雜稿)』와 『호음초당집(湖陰草堂集)』, 그리고 『조천일록(朝天日錄)』 등이 있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22 「답이태수사형(答李泰壽士亨)」] 1521년(중종 16) 중국 명나라 사신 당고(唐皐)와 사도(史道)가 조선에 왔을 때 조선의 접반사이행 및 정사룡(鄭士龍), 소세양(蘇世讓) 등 당대의 저명한 시인들과 많은 시를 주고받았는데, 그들이 돌아간 뒤에 그 시들을 엮어서 『동사집(東槎集)』, 『황화집(皇華集)』을 간행하였다.[『상촌집(象村集)』 권12 「차동고숙구련성용전운(次東皐宿九連城用前韻)」]
정사룡은 글씨도 잘 썼는데, 광주(廣州)에 있는 『이둔촌집비(李遁村集碑)』가 그의 글씨이다.
조선 중기 사장파 문학의 거두 정사룡
미수(眉叟)허목(許穆)은 근래 1백여 년 동안 시로써 특히 후세에 영향을 많이 미친 사람으로 정사룡을 꼽았다.[『기언(記言)』 권18 「호음천장음기(湖陰遷葬陰記)」 이하 「정사룡묘표」로 약칭] 정사룡이 지은 수천 편의 시문을 모은 『호음시집(湖陰詩集)』의 서문에서 정사룡은 “나는 타고난 재주가 매우 뛰어나서, 어린 시절 글을 읽게 되었을 때부터 날마다 수천 마디의 시를 암기하여, 일찍이 문장이 탁연(卓然)하게 성취되었기 때문에 마침내 한 시대에 유명해졌다.”고 하였다. 1537년(중종 32)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明)나라 태사(太師)오희맹(吳希孟)은 정사룡의 시를 평가하기를, “흐르는 물과 우뚝 솟은 산이 변태(變態)하고 토납(吐納)하는 음률과 요속(謠俗)을 한결같이 음아(吟哦)에 부치면서도 풍류에 뛰어나므로, 시의 풍격이 온후하고 화평하며 기괴하면서도 엉뚱하지 않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조선에 왔던 사신들과 수창(酬唱)한 시작(詩作)들이 온 중국에 퍼져서 크게 전송(傳誦)되고 있다.”고 하였다.[「정사룡묘표」] 정사룡은 특히 칠언율시를 특히 잘 지었는데, 중종과 명종 때 사장파의 거두인 신광한(申光漢)과 함께 ‘시의 쌍벽’이라고 일컬어졌다.
정사룡의 문하에는 재주와 학식이 뛰어난 제자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어숙권(魚叔權)을 비롯하여 이붕상(李鵬翔)과 임기(林芑), 노서린(盧瑞獜), 권응인(權應仁) 등은 당시에도 문명(文名)을 떨쳐서 오늘날까지 유명하다.[「정사룡묘표」]
중종 초반에 조광조(趙光祖)의 사림파(士林派)와 이행의 사장파가 크게 대립하였다. 이행은 소세양과 정사룡을 그의 후계자로 키우려고 노력하였으나, 정사룡은 처첩 문제 등으로 물의를 일으켰으므로 사림파의 비난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훈구파(勳舊派)의 홍경주(洪景舟)와 남곤(南袞) 등이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가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명종 때까지 사장파가 크게 발전하였다. 이때 정사룡은 소세양 및 신광한과 함께 사장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는 여러 가지 일신상의 문제로 많은 물의를 일으켰으나, 나라에서는 문한(文翰)이 필요하였으므로, 중앙 정부에서는 매번 문한의 자리로 다시 불러들였다. 또한 중국에서 문사(文士)가 사신으로 올 때마다 관반(館伴)으로 임명되어 다섯 번이나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그의 시문이 중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정사룡의 처첩 문제와 재산 축적
정사룡은 유명한 문학가인 만큼 여자와 재산 문제로 인한 스캔들이 많았다. 1518년(중종 13) 7월 정사룡이 3품의 사간원 사간이 되었을 때, 6품의 사간원 정언이충건이 그를 탄핵하기를, “사간정사룡은 재예(才藝)가 있는 사람이고 또 대간(臺諫)과 시종(侍從)도 여러 번 지냈으나, 친구에게 신용을 잃었고, 처첩의 인륜을 어지럽혔으니, 이러한 사람은 대간에 그대로 있을 수 없고, 서로 용납되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체직하소서.” 하였다. 중종이 전교하기를, “정사룡은 대간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부하 동료에게 논박(論駁)을 당하였으니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중종실록』중종 13년 7월 3일] 당시 정사룡의 나이가 28세였는데, 그는 일찍이 궁궐 안에서 생활하다가 궁궐 밖으로 잠시 나온 여인을 첩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첩을 집으로 들였다고 하는데, 본처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가정의 분란이 일어났다. 후배 정사룡의 가정생활에 대하여 이행은 변명하기를, “처가 있는데 또 첩을 거느린 것이 아니라, 그의 처가 어질지 못하기 때문에 첩을 가모(家母 : 집안 주모)로 삼았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정사룡은 자기의 직속 부하에게 탄핵을 당하는 수모를 겪고 사간원에서 쫓겨났다.
1523년(중종 18) 정사룡은 부친상을 당했을 때에 고향으로 내려가서 여묘살이를 하지 않고 외아들과 본처를 고향인 경상도 의령으로 내려보내 선영을 지키게 하였다. 3년 동안 그는 거상하는 척하면서 서울 집에서 첩을 거느리고 살았는데, 그 첩이 바로 궁궐에서 나온 여인이었다. 결국 1537년(중종 32) 11월 사헌부에서는 “정사룡은 부자(父子)와 부부(夫婦)의 대륜(大倫)을 이미 잃었을 정도가 아닙니다. 어릴 때 대궐에 들어간 한 여인이 있었는데, 비록 그 여인이 대궐에서의 지위와 칭호는 없었으나 여러 해를 있었습니다. 그녀가 우연히 어떤 일로 인해 대궐 밖으로 나갔었는데, 정사룡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간통하고자 하여, 족친(族親)을 통하여 그 여인을 이익으로 유혹하기도 하고 위엄으로 협박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다시 대궐로 들어가려고 완강히 거부하고 따르지 않으면서 여러 번 도피하여 숨기도 하였지만, 마침내 모면하지 못하고 겁간(劫奸)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여인을 데리고 살다가 그 뒤에 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라고 탄핵하였다. 그러자 중종은 “정사룡의 일은 내가 알지 못하는 바였다. 그가 대궐에 들어왔다가 나간 여인을 간통했다고 하였으므로, 그와 관계된 사람이 누군가 하여 내전(內殿)에 물어 보았더니, 정순옹주(貞順翁主)가 대궐에 들어올 때 따라 들어왔다가 옹주가 나갈 때 따라 나간 여자인데, 나간 지 이미 오래 되었으며, 또 대궐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라며 정사룡을 두둔하였다.[『중종실록』중종 32년 11월 17일]
정사룡은 여자 문제뿐만 아니라 자식 문제로도 문제가 되었다. 1563년(명종 18) 9월 양사(兩司)에서 정사룡의 죄를 논하여 왕에게 아뢰기를, “중추부 판사정사룡은 부모의 친상(親喪)에 근신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처를 내쫓았고, 자기 자식을 때려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본래 흉악 간특하고 욕심 많고 혼탁한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온갖 행실을 모두 갖추지 못했었으나, 늘그막에 악이 더욱 심하여 자기 자식을 때려죽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으니, 이런 짓을 사람이 무슨 짓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이 글로 미루어 정사룡은 자기의 외동아들도 가정불화 끝에 하인을 시켜서 곤장을 쳐서 때려 죽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종은 승정원에 “정사룡은 늙은 재상으로 망령된 실수를 한 것이다.”라고 전교한 후 삭탈관직(削奪官職)하게 하였다.[『명종실록』명종 18년 9월 4일]
1537년(중종 32) 11월 사헌부에서 정사룡을 탄핵하고 사판(仕版)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도록 청할 때 사헌부가 열거한 그의 탐오의 형적은 끝이 없었다. 그때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정사룡이 시골에 있으면서 백성들의 재물을 마음대로 겁탈(劫奪)하고, 주군(州郡)의 수령에게 군사와 물자를 토색질하는 것이 끝이 없었으며, 또 원접사로 평안도에 갔을 적에는 집안 혼인을 빙자하여 전적으로 중국 물품을 구입하기만을 일삼아서, 짐바리를 실은 말이 줄을 이었으니, 그 탐욕스러움을 이루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 2품의 반열인 판서에 있을 적에 선비들이 그와 어울리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함께 조정에 있는 사람들도 더럽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사람인데, 어찌 다시 청명(淸明)한 조정을 더럽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중종실록』중종 32년 11월 7일]
1558년(명종 13) 11월 중추부 판사에 서용되었을 때 찬성(贊成)심통원(沈通源)의 부탁을 받아 별시(別試)에 응시한 신사헌(愼思獻)과 서로 내통하여 전시의 책제를 미리 알려주었다. 이에 신사헌은 다른 사람한테 글을 지어 달라고 해서 2등으로 급제할 수 있었다. 큰 물의가 일어나자, 거자(擧子)신사헌은 삭과(削科 : 과거 명단에서 제외함)되었고, 그해 12월 정사룡도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명종이 이르기를, “이번에 중추부 판사정사룡과 찬성심통원 등의 일로 인하여 공론(公論)이 일어난 것은 과거를 중히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다만 정사룡을 도로 서용하는 것은, 그가 자기 집에서 유생(儒生)에게 말을 전파한 과오는 확실하지 않다는 정상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러 대의 조정을 거친 훈구(勳舊)의 신하이니, 어찌 다시 파직하겠는가.” 하였다.[『명종실록』명종 13년 12월 13일]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으나, 당시 실권자 이량의 비호로 심통원과 정사룡은 무사할 수 있었다. 당시 이량은 심통원과 손잡고 문정대비(文貞大妃)의 동생 윤원형(尹元衡)과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명종이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하여 왕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沈氏)의 외삼촌인 이량을 밀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1563년(명종 18) 이량의 세력이 몰락하자, 정사룡이 권간(權奸) 이량과 손잡았다고 비난을 받았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성품과 일화
정사룡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우며 재물을 탐내어 이익을 독차지하였는데, 한 끼에 고기반찬이 10여 가지나 되었다. 정실을 소박하여 내쫓았으며, 권문(權門)에 아부하여 청의(淸議)에 용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시에 능하여 오랫동안 문병(文柄)을 맡았었다.[『명종실록』명종 10년 7월 24일]
젊어서 제멋대로 행동하고 자기 절제가 없었으므로 숙부인 영의정정광필(鄭光弼)에게 칭찬을 받지 못하였으며, 조광조의 사림파는 그를 이행의 사장파라고 하여 탄핵하였으므로 항상 외직으로 밀려났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훈구파에서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여 사간원 사간에 임명하니,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기를, “저 사람이 사림파에 원한을 품은 지 오래되었으므로, 반드시 앙갚음을 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영의정정광필이 말하기를, “나는 내 조카가 비록 몸가짐은 삼가지 않았어도, 반드시 사람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을 안다.” 하였다. 정사룡이 조정에 들어온 이후, 과연 사간원 사간을 사양하고 사림파를 때려잡는 의논에 참여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고, 또 정광필이 사람 볼 줄을 안다고 칭송하였다.
그는 재산을 일구어 부자가 되었으나, 천성이 인색하여 손님들을 잘 접대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그와 같이 놀던 친구들 가운데 그에게 밥 한 그릇조차 얻어먹은 자가 없었다. 어득강(魚得江)만은 달랐는데, 그는 시를 잘 짓고 농담을 잘하였다. 그가 정사룡의 집에 가면 정사룡은 반드시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어득강과 시를 짓고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대접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어득강을 ‘정가(鄭家)의 식객(食客)’이라고 놀려댔다. 만년에 서울 동교(東郊)에 은퇴하여 임억령(林億齡)·신잠(申潛) 등과 함께 20년 동안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여생을 누렸다. 그들의 풍류가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아서, 동교 여염집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자(字)로 따서 자기의 자를 삼은 사람이 많았다.[『연려실기술』 권11]
그는 시율(詩律)에 능하여 글을 잘한다는 평판이 자자하였으나 유학의 경술(經術)은 별로 연구하지 않았으므로 항상 경연에서 진강(進講)할 때면 이마를 찌푸리고 머리를 긁었다. “차라리 열 번의 학질을 앓을지언정 한 차례의 경연 진강도 원치 않는다.”라고 할 정도였다.[『연려실기술』 별집 권7]
중종과 명종 때 다섯 차례나 관반(館伴)에 임명되어 중국의 사신들을 만나서 주연(酒宴)에서 시를 읊으며 서로 창화(唱和)하였다. 그때마다 중국 사신들이 그의 시에 감명 받아 탄복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 사신 수지(守之)당고(唐皐)가 지어준 시에 이르기를, “정사룡은 시에 재주가 있으니, 어찌 자고(鷓鴣 : 당나라 시인 정곡(鄭谷))의 아래에 있을 사람인가.[鄭子有詩才 豈在鷓鴣下]” 하였다. 또 중국 사신 운강(雲岡)공용경(龔用卿)은 “차분하고 담박하면서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말을 구사하지 않아서 당(唐)나라 시인들의 유의(遺意)가 있다.” 하였다. 수지당고와 급사중(給事中)극홍(克弘)·사도(史道)가 모두 정사룡을 위하여 시를 읊었다. 화정(華亭) 행인(行人) 장승헌(張承憲)이 사신으로 조선에 왔을 때, 중종이 정사룡의 시를 간행해서 새로 편찬하는 『황화집』에 넣게 하고, 정사룡으로 하여금 그 서문을 짓게 하였다. 그 서문에 이르기를, “옛날의 시인들은 대부분이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시를 지었으므로, 일찍이 무익한 말은 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이것도 역시 시인 정사룡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황화집』에 실린 정사룡의 시구에 “서로 즐기는 곳이라고 말하지 말라, 뒤바꾸어 말하면, 송별하는 자리가 되는 것을.[不謂交歡地 翻成送別亭]” 하였는데, 이 시도 운치가 충분히 있다고 평가 받는다.[『해동역사』 권69]
정사룡은 문장(文章)으로 큰 이름을 얻어 중국의 조사(詔使)를 접대할 때 가장 격찬을 받았다. 그러나 젊을 때부터 호사스러운 부(富)를 너무 탐하여 남의 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산을 늘려서 사치스럽게 살았다. 그가 숭품(崇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문장으로 말미암아 포상 받았기 때문인데, 훌륭한 문장이 그의 더러운 이름[醜名]을 덮어주었다고 이를 만하다.[『선조수정실록』선조 3년 4월 1일]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에 있는데, 미수허목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정사룡묘표」] 그의 3세손 정지문(鄭之問)이 풍수지리에 정통하여 원래 경기도 영평(永平) 용화(龍化)에 있던 무덤을, 80년 만에 지금의 경기도 양주의 묘소로 옮겼다.
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성성렬(成成烈)의 딸인데, 소박을 맞아서 쫓겨났다.[『방목』] 외동아들이 있었으나, 아버지가 어머니를 소박하고 첩을 주모(主母)로 삼자, 이에 반대하다가 아버지에게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손자 정지문은 술사(術士)라고 하며, 그 후손은 번창하지 못하고 몰락하였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충재집(冲齋集)』
- 『호음잡고(湖陰雜稿)』
- 『시화총림(詩話叢林)』
- 『간이집(簡易集)』
- 『견한잡록(遣閑雜錄)』
- 『계곡집(谿谷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기재잡기(寄齋雜記)』
- 『농암집(農巖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상촌집(象村集)』
- 『서계집(西溪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송계만록(松溪漫錄)』
- 『송도기이(松都記異)』
- 『송와잡설(松窩雜說)』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역대요람(歷代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 『오음유고(梧陰遺稿)』
- 『용재집(容齋集)』
- 『월정만필(月汀漫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퇴계집(退溪集)』
- 『패관잡기(稗官雜記)』
- 『해동역사(海東繹史)』
- 『홍재전서(弘齋全書)』
- 『우정집(憂亭集)』
- 『묵재집(默齋集)』
- 『학포집(學圃集)』
- 『기재집(企齋集)』
- 『규암집(圭菴集)』
- 『인재집(忍齋集)』
- 『서경집(西坰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지호집(芝湖集)』
- 『입재유고(立齋遺稿)』
- 『성담집(性潭集)』
- 『회산집(檜山集)』
- 『서포집(西浦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