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잠(申潛)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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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신잠 |
한글표제 | 신잠 |
한자표제 | 申潛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예술·체육인/화가, 예술·체육인/서예가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명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원량(元亮) |
호 | 영천자(靈川子), 아차산인(峨嵯山人)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91년(성종 22) 3월 |
사망 | 1554년(명종 9) 12월 4일「행장」 1554년(명종 9) 12월 13일『실록』 |
본관 | 고령(高靈) |
주거지 | 서울, 경상도 상주(尙州)『방목』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
증조부 | 신숙주(申叔舟) |
조부 | 신주(申澍) |
부 | 신종호(申從濩) |
모_외조 | 전주 이씨(全州李氏): 의창군(義昌君)의 딸, 이강(李玒)의 딸, 세종의 손녀 |
형제 | (형)신항(申沆): 고원위(高原尉), 성종의 부마(駙馬), 혜숙옹주(惠淑翁主)의 부(夫) |
처_장인 | (첫째부인)전주 이씨(全州李氏): 당해 부수(唐海副守)의 딸, 이명구(李明龜)의 딸 →(자녀)2녀 (둘째부인)풍천 노씨(豊川盧氏): 노우명(盧友明)의 딸 |
자녀 | (1녀)한수(韓洙)의 처 (2녀)강완(姜浣)의 처 |
작품 | 「설중기려도(雪中騎驢圖)」(전), 「탐매도(探梅圖)」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신잠(申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숙종 22년 1월 1일 |
목차
총론
[1491년(성종 22)∼1554년(명종 9) =64세.] 조선 중기의 중종~명종 때의 문신, 서화가.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냈고, 현량과(賢良科) 출신이다. 자는 원량(元亮)이고, 호는 영천자(靈川子)인데, 스스로 호를 아차산인(峨嵯山人)이라고 하였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판(參判)신종호(申從濩)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세종의 서출 제9왕자 의창군(義昌君)이강(李玒)의 딸이다. 보한재(保閑齋)신숙주(申叔舟)의 증손자이고, 성종의 부마(駙馬) 고원위(高原尉)신항(申沆)의 동생이다. 정암(靜庵)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이고, 퇴계(退溪)이황(李晄)의 가르침을 받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신잠
1513년(중종 8) 23세에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1등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고 1519년(중종 14) 신잠은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어 급제자 28명의 중에서 9등을 차지하였다.[『방목』] 과거가 문장(文章)만을 중시하여 사람의 인품을 소홀히 하여, 과거를 통하여 훌륭한 인재를 선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대사헌조광조는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1518년(중종13) 천거 방식의 ‘현량과’를 설치하였다. 조광조는 제자 김식(金湜) · 안처겸(安處謙) · 안처근(安處謹) · 신잠 등 28인을 추천하여 정부의 요직에 안배하였는데, 당시 29세의 신잠은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광조는 중종 반정 공신 박원종(朴元宗) · 성희안(成希顔) 등 76명의 위훈(偉勳)을 삭감하여버렸다. 이에 1519년(중종 14) 훈구파 홍경주(洪景舟) · 남곤(南袞) · 심정(沈貞) 등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서 조광조와 김정(金淨) · 김식 등을 사사(賜死)하고, 나머지 사림파(士林派)를 모두 숙청하였다. 신잠도 관직에서 쫓겨났는데, 이때부터 다시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청주(淸州)의 농장으로 돌아갔다. 그는 청주에 은거(隱居)할 생각할 뜻이 있었으나, 농촌 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어머니가 농촌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므로, 얼마 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나중에 사문(斯文) 윤강원(尹剛元)이 신잠에게 신사무옥에 대해 물었더니, 신잠은 “통탄스러운 일에 격분하여 한 말을 무고자[反側子]가 재앙을 꾸며서 옥사를 얽어서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추록]
<신사무옥(辛巳誣獄)>과 신잠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제자 중에서 죽지 않고 관직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모두 재주와 명망을 갖춘 당대의 인재들이었다. 기묘사화에 의하여 권력을 잡은 훈구파(勳舊派)의 대신들은 사림파의 젊은 사람들이 도성(都城) 안에 남아서 서로 교유하는 것을 매우 불안하게 여겼다.[『옥계집(玉溪集)』 권3 「통정대부 행 상주목사 신공 행장(通政大夫行尙州牧使申公行狀)」] 서울에 돌아온 신잠은 안처겸의 아들 안정(安挺)과 친하게 지냈는데, 신잠과 안정은 모두 그림에 취미를 가진 서화가이기 때문이다. 좌의정안당(安瑭)의 아들 안처겸이 모친상을 당하여 조문하려고 온 사람들과 담론하다가 정부의 처사를 비판하고, 중종의 측근에 있는 간신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송사련(宋祀連)이 이를 듣고 무고(誣告)하여, 안처겸 · 안처근 형제는 죽음을 당하고, 그 아들 안정은 유배되었는데, 이를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고 한다.나중에 사문(斯文) 윤강원(尹剛元)이 신잠에게 신사무옥에 대해 물었더니, 신잠은 “통탄스러운 일에 격분하여 한 말을 무고자[反側子]가 재앙을 꾸며서 옥사를 얽어서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추록]
이때 옥사를 다스리던 영의정김전(金銓)·좌의정남곤이 아뢰기를, “전일에 승지최세절(崔世節)로 인해 최수성(崔壽城)과 신잠이 대신들을 모해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으나 확실하게 알지 못했는데, 지금 송사련이 바친 문서 기록에 신잠의 이름도 끼어 있으니 아울러 추국(推鞫)하기를 청합니다.” 하여, 신잠은 안정과 함께 대궐의 뜰에 끌려나와 곤장을 맞고 중종의 심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끝내 죄를 자복하지 않았으므로, 남곤 · 심정 등이 그 실상을 밝혀내지 못하였다. 마침내 전라도 장흥부(長興府)로 유배되어 17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였으나, 그는 지기(志氣)가 굳고 커서 어려운 생활을 참고 견디면서 그림을 그리고 시(詩)를 읊으며, 힘든 나날을 보냈다.
1537년(중종 32) 조정에서 형량을 감하여 서울에 가까운 양주(楊洲)로 옮겨 살게[量移] 하였고, 1538년(명종 33) 정부에서 신잠에게 서울 이외의 편리한 곳을 골라서 편안하게 살도록[從便] 하였다. 신잠은 양이와 종편으로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양주 아차산(峨嵯山) 아래에 집을 짓고 살 수 있었다. 그는 거문고를 타고 시문(詩文)을 지어서 읊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5년 동안 신잠은 아차산 아래에다 집을 짓고 살면서, 매일 아차산을 오르내리면서 아차산을 소재로 하여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는데, 또 그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아차산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자기 호(號)를 ‘아차산인’이라고 하였다.
명종 시대 활동
중종은 만년에 <기묘사화>에서 많은 인재를 잃은 것을 몹시 후회하여, 살아남은 사림파를 대신들로 하여금 추천하게 하여 서용하였다. 1543년(중종 38) 신잠도 그의 재능이 나라를 빛낼 만하다는 천거를 받고, 품계를 뛰어넘어 사옹원(司饔院)주부(主簿)가 되었다. 그런데 중종이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신잠이 지금 주부에 임명하여 그 재능을 시험할 수 없으니, 고을의 수령(守令)으로 바꾸어 임명하여 그의 치적(治績)을 한번 보고자 한다.” 하고, 전라도태인 현감(泰仁縣監)으로 보냈다. 태인 현감에 임명된 신잠은 온갖 정성을 다하여 고을의 예의를 일으키고 풍속을 고치며 학교에서 인재를 기르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태인 고을 사람들이 그의 유임(留任)을 탄원하여 6년 동안 태인 현감으로 있었다. 태인 고을 사람들이 신잠의 선정(善政)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는데, 지금 전라북도 정읍 태인면에 「태인 현감 선정비(泰仁縣監善政碑)」(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05호)가 남아 있다.
신잠이 태인 현감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1544년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였는데, 이듬해 1545년 7월 인종이 31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나이 12세의 어린 명종이 즉위하였다. 인종 시대에는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이 정권을 잡고 사림파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면서,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이 정권을 잡았다. 윤원형의 소윤(少尹) 일파가 윤임의 대윤(大尹) 일파를 숙청하면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 신잠이 중앙 정계에 남아 있었더라면, 큰 화(禍)를 당할 뻔하였으나, 지방의 수령으로 나가 있어서 무사할 수 있었다.
1549년(명종 4) 큰 흉년을 만나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태인 현감신잠이 고을에서 수천 명의 기민(饑民)을 온전히 구휼(救恤)하여 살려냈다. 전라도 관찰사김광철(金光轍)이 그 사실을 중앙에 보고하자, 조정에서 그를 포상하여 한 품계를 올려주고 종묘서(宗廟署)영(令)에 임명하였다가, 다시 강원도간성 군수(杆城郡守)로 내보냈다. 1551년(명종 6) 정부에서 중앙과 지방의 관료 중에서 청렴하고 근실한 자를 선발하였는데, 강원도 관찰사유지선(柳智善)은 신잠이 청렴하고 근실하다고 추천하였다. 그때 군수신잠이 풍질(風疾)을 앓아서 재직할 수가 없었다. 고을 수령이 병으로 해임을 구하면, 관찰사가 예(例)에 따라 관직을 파면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명종이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신잠의 청렴한 덕정(德政)이 이미 나타났고, 그가 부임하는 곳마다 정성을 다하였으니, 그가 병이 들었다고 하여 파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그 직책만을 교체하고, 그대로 품계를 올려서 녹봉(祿俸)을 지급하였다.
1552년(명종 7) 경상도상주목사(尙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신잠은 병이 완전히 나았다고 하면서 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때 흉년이 경상도 지방에 들자, 신잠이 정성을 다하여 기민을 구휼하였다. 이에 경상도 관찰사정응두(丁應斗)가 흉년에 백성을 구휼하는 데에 상주목사신잠이 제일 첫째라고 보고하자, 정부에서 포상하여 한 품계를 올려주어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청장관전서』 권68] 1554년(명종 9) 12월 초2일에 급환(急患)을 얻어서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4세였다.[『옥계집』 권3 「통정대부 행 상주목사 신공 행장」] 관찰사가 조정에 부음(訃音)을 알리자, 명종이 하교하기를, “신잠은 청렴하고 근면하여 다른 사람과 비할 바가 아니다. 이제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참으로 슬프도다.” 하고, 마침내 부의(賻儀)를 더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명종실록』의 「신잠 졸기」에는 “1554년(명종 9) 12월 13일 상주 목사신잠이 졸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관찰사가 늦게 보고하였기 때문이다.[『명종실록』명종 9년 12월 13일 「신잠 졸기」] 그는 경기도 양주의 선영으로 반장(反葬)되었는데, 상여가 나아가자, 고을의 부로(父老)와 유사(儒士)들이 상여를 붙잡고 만류(挽留)하면서 슬프게 전송하였는데, 인파(人波)가 도로를 가득 매웠다.[『옥계집』 권3 「통정대부 행 상주목사 신공 행장」]
시 · 서 · 화의 삼절 신잠
문장과 예술(藝術)에 있어서 신잠이 능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시(詩)는 『문선(文選)』을 조종(祖宗)으로 삼고, 사(詞)는 초(楚)나라 『이소(離騷)』를 주장(主張)하여, 격률(格律)은 고고하고 지취(旨趣)는 심원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그의 시(詩) 몇 구절이나 사(詞) 몇 문장을 얻기만 하여도 마치 큰 보물을 얻은 것처럼 여기고 대대로 전해가며 완상(玩賞)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만년엔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솜씨가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또 난초와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려서 지극히 그 실물(實物)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으며, 사람들이 다투어 찾아와서 비단을 사례비로 주고서 이를 구하여 갔으나, 정작 신잠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간혹 친구와 더불어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즐거워 하다가, 시가(詩歌)를 읊게 되면, 화락하고 화창하여 그 풍류와 기개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여, 모두들 그를 흠모하고 우러러 보았다. 그가 남긴 글이 몇 권이 있다.[『옥계집』 권3 「통정대부 행 상주목사 신공 행장」]
신잠은 문장에 능하고 글씨와 그림을 잘하여 사람들이 그를 삼절(三絶)이라고 하였는데, 풍류와 아량이 있어서 소문과 명망이 높았다. 조광조의 현량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선발되었으나, <기묘사화> 뒤에 파방(罷榜)되어, 홍패(紅牌)를 도로 거두어 가고, 그때 마침 진사과의 백패(白牌)마저 모두 잃어버렸다. 신잠이 그 심정을 시(詩)로 읊기를, “홍패 이미 거두어 가고 백패마저 잃어버리니,[紅紙已收白牌失] 생원과 급제가 모두 다 헛된 이름이구나.[生員及第摠虛名] 이제부터 아차산 아래에서 늙고자 하는데,[從此嵯莪山下老] 산인(山人) 두 글자를 어느 누가 다투겠는가.[山人二字熟能爭]” 하였다. 아차산 아래에서 산 사람[山人]으로 살다가, 그 뒤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세 고을의 수령을 두루 지냈는데, 모두 명망과 치적이 있었다.[『연려실기술』 권8]
신잠은 그 글씨를 고조부 신장(申檣)의 촉체(蜀體)와 6대조 신덕린(申德隣)의 예서(隸書)를 이어받아서 예서의 팔분체(八分體)를 잘 썼다. 신덕린의 덕린체(德隣體)가 바로 팔분체였는데, 예서에 초서를 가미한 것이다. 신잠은 글씨를 쓰든가 그림을 그리든가 모두 팔분체로 썼는데, 필법이 기이하고 절묘하여, 그의 글씨와 그림을 애완(愛玩)하는 사람이 많았다 [『해동잡록』 권4] 선비 중에 신잠을 존경하는 자들이 그 문하(門下)에 모여들었으므로 문풍(文風)과 화풍(畵風)도 크게 떨치었다. 여가가 나면 때때로 제자들을 데리고 산해(山海)의 명승지를 찾아서 유람(遊覽)하고서 바람을 쏘이고 시가(詩歌)를 노래하다가 돌아왔다. 또 풍악산(楓岳山)에 올라가서 그 흉금(胸襟)을 시원하게 펼쳤 놓고, 시를 지어 노래하고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옥계집』 권3 「통정대부 행 상주목사 신공 행장」] 특히 그는 당나귀를 타고 어린 제자를 데리고 깊은 산을 오르는 기려도(騎驢圖)를 즐겨 그렸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설중기려도(雪中騎驢圖)」도 그러한 종류의 그림이다. 그런데 「설중기려도」는 신잠의 진작(眞作)인가에 대해서 논쟁의 여지가 있다. 산행(山行) 중에 눈이 온 겨울산 속에서 매화를 찾는 그림이 바로 그가 그린 「탐매도(探梅圖)」이다.
『퇴계집(退溪集)』에서는, “신잠은 대[竹]나무를 잘 그리기로 유명하였는데, 퇴계의 친한 벗이었다.”고 하였다. [『퇴계집』 권3]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는 “그는 만년에 초서와 예서에 능했으며, 난초와 대나무를 아주 정묘(精妙)하게 잘 그렸다. 때로는 친지(親知)들과 어울려 문장과 술로 즐기기도 하였는데 기색이 평온하고 화창하여 풍류가 사람을 움직이게 하였다.”고 하였다.[『청장관전서』 권68] 또 『기묘록 보유(己卯錄補遺)』에서는, “그는 시율(詩律)을 잘 짓고 행서(行書)를 잘 쓰며, 대나무[竹] 그림을 잘 그렸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하였다.[『기묘록 보유』 추록]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서는, “신잠은 묵죽(墨竹)과 더불어 포도그림도 잘 그렸다.”고 하였다.[『연려실기술』 권8] 이를 통해 신잠은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묵죽(墨竹)과 화조화(花鳥畵)에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39년(중종 34) 부친상을 당하여 애도(哀悼)함이 지극하였고, 장례와 제사에 있어 한결같이 고례(古禮)에 의거하였으며, 또 아버지 신종호의 무덤 조역(兆域)의 풍토(風土)가 맞지 않는다고 하여 널리 고의(古義)를 연구하여 아버지의 관을 옮겨서 어머니와 합장하였다. 아차산 아래에서 묘막살이를 하던 3년 동안에 한 번도 서울 본가(本家)에 들른 적이 없었고, 인하여 부모의 산소 곁에 집을 지어 여생(餘生)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곳은 강산(江山)의 아름다움과 금어(禽魚)를 잡는 즐거움이 있어서 봄과 가을이 올 때마다 그곳에 나가 살며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는데, 세상의 영달(榮達)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옥계집』 권3 「통정대부 행 상주목사 신공 행장」] 그는 아차산 사람이라고 일컸고 자연의 산수에 파묻혀서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고 화제(畵題)를 써서 그림에 넣어며, 스스로 3절을 즐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명종실록』「신잠 졸기」에서 “그는 자질이 영민하고 서화(書畫)에도 솜씨가 있었으며 글을 잘 지었다.”고 하였다.[『명종실록』명종 9년 12월 13일 「신잠 졸기」]
신잠은 나면서부터 예술에 대한 영특한 자질을 타고났으나 겨우 나이 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맏형인 고원위신항은 성종의 딸 혜숙옹주(惠淑翁主)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으나, 귀한 집 자제(子弟)의 티를 벗어버리고 문아(文雅)로 당대의 문인(文人)들과 문학적 재능을 겨루었다. 신잠도 그의 형 신항과 함께 문학을 배웠다. 형의 지도(指導)를 받자마자 신잠은 곧 스스로 문장을 깨우치고, 그림과 글씨까지 스스로 닦아서, 형의 가르치는 수고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시문(詩文)과 서화(書畵)가 날로 진보하여 약관(弱冠)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었던 것이다.[『옥계집』 권3 「통정대부 행 상주목사 신공 행장」]
성품과 일화
『청장관전서』에서 신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청장관전서』 권68] 그는 풍채가 준엄하고 식견이 높고 도량이 넓으며, 착한 일을 즐거워하고 의로운 일을 좋아하기를 그와 견줄 만한 자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세속의 평범하고 천박한 의논을 일찍이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며, 큰일을 당해도 여유가 있어서 목소리와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시류(時流)를 걱정하고 세속(世俗)을 근심하는 마음은 지성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궁핍한 사람을 진휼(賑恤)하는 데에 재물을 아끼는 법이 없었으며, 후생들을 장려하여 벼슬에 진출시키는 데에 그 재능에 따라 이끌어 주었다.
신잠의 행장에는 그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옥계집』 권3 「통정대부 행 상주목사 신공 행장」] 그는 풍모가 고상하여 다른 사람의 모습과는 달랐으며, 도량(度量)이 넓고 학식이 높았으므로, 멀리서 그를 바라보면 근엄하여 두려워할 만하지만, 가까이 가서 그를 보면 소탈하여 친숙할 만 하였다. 선(善)을 즐기고 의(義)를 좋아하며, 학문은 성현(聖賢)을 종주(宗主)로 삼았는데, 언제나 경전(經傳)을 읽으면서도 반드시 그 중요한 핵심을 깊이 연구하였고, 글을 읽다가 그 좋은 말과 뛰어난 행실이 있으면 이를 흠모하여 그와 같이 실천할 것을 결심하였다.
몸가짐과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옛 사람을 스승으로 삼았고, 세속의 모든 비루한 논의에 대해서는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일을 만나서는 여유가 있어 성색(聲色)에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비록 창졸간에 일을 당하여도 일찍이 말을 빨리 하거나 얼굴색이 변하는 일이 없었다. 그의 충효(忠孝)와 우애(友愛)는 천성(天性)에서 나왔고, 시속(時俗)을 근심하는 마음은 지성(至誠)에서 나왔으므로, 친구(親舊)들을 거두어주고 도와주며, 궁핍한 사람들을 진휼하여 구제해 주면서, 재산을 출자(出資)하면서도 이를 아까워한 적이 없었다.
후생(後生)에 학문을 장려함을 더욱 자기 임무로 여겨 재주에 따라 선도하면서 힘써 옛 사람의 이룩한 업적을 가지고 권면하였다. 혹은 후생들과 더불어 고금(古今)에 대해 논할 때는 아무리 중첩되더라도 싫증을 내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조그마한 선행이 있으면 비록 미천한 것일 지라도 반드시 경애(敬愛)를 더하였고, 만일 그 사람이 비루하고 외설하며 보잘 것 없는 부류이면 매우 천하게 여겨 더불어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과 상대하여 대접할 때에는 화기(和氣)가 넘쳐서 모두에게 환심(歡心)을 얻었다. 그러므로 비록 그에게 거슬려서 배척을 받은 자라고 하더라도 그다지 그를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
본래 문벌 가문의 대대로 누적된 가산(家産)을 소유하여 재산이 옛날부터 넉넉하였다. 그가 오래도록 먼 곳에 유배가서 있게 되면서 맏누이[長姊]에게 오로지 재산을 맡기고서 관계하지 않았다. 재산을 분배할 때에도 누이가 가져가는 데로 맡기고서 그는 간여하지 않았고, 오직 자기 부인으로 하여금 분배에 참여하게 하였다. 신잠의 집안은 대대로 왕가(王家)의 외척(外戚)으로서 젊을 때부터 집에 거처할 때 복식(服食)과 거마(車馬)가 평범한 사람들과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고을을 다스릴 때에는 청렴한 지조가 남달라서 음식을 제외하고 조금도 관(官)에 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서, 집안사람들과 노복들이 모두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할 정도였으나 그는 오히려 편안하게 생활하였다. 언제나 관직에서 물러나서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모든 기구(器具)와 집물(什物) 가운데 혹은 일상생활에 관계된 것으로서 비록 지극히 하찮은 물건이라도 역시 모두 일일이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관(官)에 돌려주었다. 그러므로 그가 세상을 떠나서 죽을 때에 부인에게도 역시 한결같이 이와 같이 하였다. 고을의 관청에서 관례에 따라 부의(賻儀)를 보내왔으나 일절 받는 일이 없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말하는 자가 있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여기에서 그의 가법(家法)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평소에 그가 행한 바가 한 때에 나쁜 점을 고치려고 부지런히 힘쓴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의 선영(先塋)에 있고, 옥계(玉溪)노진(盧禛)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옥계집(玉溪集)』 권3 「통정대부 행 상주목사 신공 행장(通政大夫行尙州牧使申公行狀)」] 전라도 태인현(泰仁縣) 남고서원(南皐書院), 장흥군 예양서원(汭陽書院)에 제향되었다.[『추강집』권8권]
첫째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종실(宗室)인 당해부수(唐海副守) 이명구(李明龜)의 딸인데, 딸만 2녀를 두었다. 장녀는 감찰(監察)한수(韓洙)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생원(生員)강완(姜浣)에게 시집갔다. 둘째 부인 풍천 노씨(豊川盧氏)는 현릉(顯陵) 참봉(顯陵)노우명(盧友明)의 딸인데, 자녀가 없다.[『옥계집』 권3 「통정대부 행 상주목사 신공 행장」]
신잠은 불우헌(不憂軒)정극인(丁克仁) 등과 함께 전라도 정읍(井邑)의 무성서원(武珹書院)에 제향되었다. 1696년(숙종 22) 전라도 유생(儒生) 유지춘(柳之春) 등이 상소하여, 태인현에 최치원(崔致遠)을 향사(享祀)하고 신잠을 합향(合享)하며, 정극인 · 송세림(宋世琳) · 정언충(鄭彦忠) 등을 배향(配享)하고, 은액(恩額)을 내려주어 원우(院宇)를 세워주기를 청하였다. 숙종이 상소를 예조에 내리자, 예조에서 사액(賜額)을 내려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최치원과 신잠은 이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정극인 등은 모두 이 고장 출신의 어진 사람이었다.(『숙종실록』 숙종 22년 1월 1일)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 『한국회화사(韓國繪畵史)』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백호전서(白湖全書)』
-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 『불우헌집(不憂軒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복집(愚伏集)』
- 『월정만필(月汀漫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추강집(秋江集)』
- 『퇴계집(退溪集)』
- 『패관잡기(稗官雜記)』
- 『해동잡록(海東雜錄)』
- 『구암집(久庵集)』
- 『규암집(圭菴集)』
- 『금호유고(錦湖遺稿)』
- 『기봉집(岐峯集)』
- 『기재집(企齋集)』
- 『남계집(南溪集)』
- 『동고유고(東皐遺稿)』
- 『면앙집(俛仰集)』
- 『문봉집(文峯集)』
- 『백담유집(白潭遺集)』
- 『범허정집(泛虛亭集)』
- 『부훤당유고(負暄堂遺稿)』
- 『사재집(思齋集)』
- 『소재집(穌齋集)』
- 『소총유고(篠䕺遺稿)』
- 『송강집(松江集)』
- 『송재집(松齋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염헌집(恬軒集)』
- 『옥계집(玉溪集)』
- 『용암집(龍巖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음애집(陰崖集)』
- 『이암유고(頤庵遺稿)』
- 『인재집(訒齋集)』
- 『일재집(一齋集)』
- 『정암집(靜菴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초당집(草堂集)』
- 『학포집(學圃集)』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