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체(蜀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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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화된 송설체(松雪體) 즉, 조맹부체의 조선식 이름.

개설

촉체(蜀體)는 조선시대에 송설체를 부르던 이름이다. 송설체를 촉체로 부르게 된 이유는 조선후기의 여러 문헌에 보인다. 조맹부(趙孟頫)의 서체가 소식(蘇軾)에게 영향을 받았는데 소식의 출신이 ‘촉(蜀)’ 지방이었으므로 이렇게 명명되었다는 설과, 조맹부의 성을 딴 ‘조체(趙體)’가 잘못 전해져 ‘조(趙)’ 자의 반쪽인 ‘초체(肖體)’가 되었고, 그것이 다시 촉체로 와전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촉체는 고려말에 수용되어 조선전기에 풍미하였고, 이후 꾸준히 지속되면서 특히 왕실을 비롯한 어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내용 및 특징

촉체의 발생 배경과 명칭에 대하여서는 조선후기의 여러 기록이 보인다. 이익(李瀷)은 “사람들이 송설의 서법을 촉체라고 하는데 촉이란 동파(東坡)를 가리킨다.”고 하였고, 조구명(趙龜命)은 “우리나라의 서법은 대략 3번 변하였으니 국초에는 촉(蜀: 조맹부체)을 배웠고 선조·인조 이후로는 한(韓: 한석봉체)을 배웠으며, 근래에는 진(晉: 왕희지·왕헌지체)을 배우는데 규모는 점차 나아지나 기골(氣骨)은 떨어진다.”고 하였다. 또한 이규상(李奎象)은 “촉체라는 것은 조맹부의 서법이다. 그런데 ‘촉’의 뜻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궁구하지 못했다. 황운조(黃運祚)에게 들으니 ‘조법(趙法)은 동파에게서 나왔는데 동파가 촉인(蜀人)이었으므로 촉체라 이름하였다.’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유한준(兪漢雋)은 조맹부가 쓴 「홍범구조(洪範九條)」 필적에 대해 “이것은 홍범 전문으로 조맹부의 글씨인데, 조맹부는 송나라의 공자(公子)이다. 쿠빌라이의 신하가 되었으니 그 사람됨은 취할 것이 없지만 유독 서예에서는 절예(絶藝)의 경지였다. 그의 글씨는 촉에서 나왔는데, 경지가 넓고 규모가 크니, 지금 이 글씨 또한 그렇다.”라고 하였다. 또한 유득공(柳得恭)은 “글씨에는 촉체가 있는데 조송설(趙松雪)을 말한다. 충선왕 때에 그의 필적이 다수 동쪽으로 전래되어 지금까지 그 체를 본받는다. 촉체라는 것은 ‘초체(肖體)’의 잘못인데 ‘초(肖)’는 ‘조(趙)’의 반쪽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여러 설을 종합하면 촉체가 조맹부체를 지칭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용어의 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특히 조맹부의 글씨가 소식으로부터 나왔다는 언급은 서예사의 맥락으로 보아 잘못된 인식이며, ‘조(趙)’ 자를 반으로 나누어 ‘초(肖)’ 자로 쓰게 된 근거 또한 명확하지 않다. 이에 대해 임창순(任昌淳)은 송설체의 별칭인 조체가 나중에 촉체로 잘못 읽히면서 굳어졌고, 촉은 쓰촨성[四川省]을 가리키는 말로서 조맹부와는 무관하므로 자음(字音)의 와전에서 생겨난 혼동을 몇백 년 동안 잘못 사용했다고 보았다. 한편 최완수(崔完秀)는 ‘조체’라고 하면 우리말로 욕이 되므로 촉체라고 변형하여 관용적으로 사용했다는 설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해석이 적절한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촉체라는 용어가 송설체의 오랜 유행과 함께 그 명칭까지 우리식으로 만들어 쓸 정도로 토착화한 현상임은 분명해 보인다.

송설체는 고려충선왕이 원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 연경(燕京)에 지은 만권당(萬卷堂)을 중심으로 조맹부를 위시한 원나라 학자들과 이제현(李齊賢) 등 고려의 학자들 사이의 교유가 잦아지면서 점차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 송설체는 전아하고 유려한 귀족적 풍모를 지녀 당시의 사대부들 사이에서 애호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송설체는 점차 확산되었는데, 특히 세종 연간에 이르면 본격적인 유행을 보여 문종(文宗)·안평대군(安平大君) 등 왕실과 남수문(南秀文)·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의 젊은 집현전 학사를 비롯한 송설체의 명서가가 다수 출현하였다. 특히 『몽유도원도권(夢遊桃源圖卷)』이나 『소상팔경도시첩(瀟湘八景圖詩帖)』 등에 실린 그들의 필적을 통해 당시 송설체의 신속한 확산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단연 당대를 대표하는 송설체의 대가였다. 특히 그의 필적 가운데 소자해서(小字楷書)로 쓴 「몽유도원기(夢遊桃園記)」를 조맹부의 중자해서(中字楷書)와 비교해보면 송설체의 진수를 터득하면서도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노숙한 필치의 개성을 느낄 수 있다.

송설체의 유행과 관련하여 조맹부 필적의 간행 기록도 다수 전한다. 그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이 대군이나 대신들과 함께 글씨에 대해 논의하면서 서재(書才)를 널리 육성하기 위해 조맹부의 필적을 간행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한 예로 1467년에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에게 증여한 물목(物目) 가운데 다수의 불교 서적과 함께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심경(心經)』·『증도가(證道歌)』·『고세첩(高世帖)』·『팔경시첩(八景詩帖)』 등 조맹부의 필적이 다수 보여(『세조실록』 13년 8월 14일) 송설체의 확산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송설체는 성종 연간에 이르러 더욱 확산되어 조선왕조 제일의 서체로 자리 잡았다. 성종은 문종과 함께 국왕으로서 조선초기를 대표하는 명서가인데, 그의 서풍은 안평대군의 글씨와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했다고 한다.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서는 “성종은 아리땁고 단중(端重)하여 조용히 조송설의 법도에 깊이 잠기었다. 문종은 조자앙(趙子昻: 조맹부)의 서법을 모방했는데, 그 정묘함이 입신(入神)의 경지였다.”고 평가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와 왕실에서 중시하게 되자 문사(文士)와 일반인들에게도 점점 확산되었다.

송설체는 조선초기에 제작된 불교 경전이나 왕지(王旨) 등의 고문서에서도 나타나 그 확산 범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조선초기에 주조된 동활자(銅活字)에서도 송설체의 수용을 살필 수 있다. 1434년(세종 16)에 명초(明初)의 판본을 자본(字本)으로 삼아 주조한 갑인자(甲寅字)는 완곡한 꺾임과 부드러운 획법에서 유려한 송설체의 영향을 여실히 볼 수 있다. 이 활자는 조선후기까지 6차례 개주(改鑄)되면서 수많은 서적을 인출하였고, 서예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송설체는 석봉체(石峯體)의 등장으로 한때 주춤한 듯하였으나 17세기에도 이호민(李好閔)·신익성(申翊聖)·숙종(肅宗) 등에 의해 지속되었다. 18세기 이후로는 영조(英祖)·조영석(趙榮祏) 등 소수에 의해 명맥을 이어가다가 퇴조하였다. 이러한 퇴조 과정에서 그 명맥을 이어간 주된 계층은 왕실과 그 주변의 보수 인사들이었다. 특히 숙종은 송설체에 뛰어났고, 이에 따라 그의 여러 부마(駙馬)를 비롯한 왕실 인사들이 애호했으며, 그의 아들 경종과 영조로 이어지면서 송설체가 조선후기의 대표적 어필로 칭송받았다.

참고문헌

  • 『대동야승(大東野乘)』
  •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동계집(東谿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일몽고(一夢稿)』
  • 이완우, 「조선시대 松雪體의 토착화」, 『서예학』, 제2집, 한국서예학회, 2001.
  • 임창순, 「韓國書藝史槪說」, 『韓國의 美 6- 書藝』, 중앙일보사, 1981.
  • 최완수, 「韓國書藝史綱」, 『간송문화』 33, 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