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항(申沆)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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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신항 |
한글표제 | 신항 |
한자표제 | 申沆 |
분야 | 왕족/부마,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연산군~중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용이(容耳) |
시호 | 문효(文孝)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77년(성종 8) 7월 |
사망 | 1507년(중종 2) 2월 19일 |
본관 | 고령(高靈) |
묘소소재지 | 양주(楊州) |
증조부 | 신숙주(申叔舟) |
조부 | 신주(申澍) |
부 | 신종호(申從濩) |
모_외조 | 전주 이씨(全州李氏): 의창군(義昌君)의 딸, 이강(李玒)의 딸, 세종의 손녀 |
형제 | (동생)신잠(申潛) |
처_장인 | 혜숙옹주(惠淑翁主): 성종(成宗)의 딸, 홍숙의(洪淑儀)의 딸 |
자녀 | (양자) 신수경(申秀涇)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신항(申沆)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성종 24년 9월 12일, 『연산군일기』 연산군 9년 3월 6일,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12월 18일, 『연산군일기』 연산군 12년 8월 5일 |
총론
[1477년(성종 8)∼1507년(중종 2) = 31세.] 조선 전기 연산군~중종 때의 의빈(儀賓). 성종의 부마(駙馬). 자는 용이(容耳)고,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판신종호(申從濩)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세종의 서출 제 3왕자 의창군(義昌君)이강(李玒)의 딸이다. 영의정신숙주(申叔舟)의 맏아들 신주(申澍)의 손자이고, 상주목사(尙州牧使)신잠(申潛)의 친형이다. 영의정신용개(申用漑)과 찬성(贊成)신광한(申光漢)의 5촌이다.
성종 시대 활동
1490년(성종 21) 나이 14세 때 성종의 서출 제 1왕녀 혜숙 옹주(惠淑翁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옹주는 홍숙의(洪淑儀)가 낳은 6남 3녀 중에서 첫째 딸이었다. 옹주의 부마(駙馬)가 되자, 종2품하 순의대부(順義大夫)에 승품(陞品)되고 고원위(高原尉)에 봉해졌다.[『이요정집(二樂亭集)』 권12 「고원위 신공 신도비명(高原尉申公神道碑銘)」] 그때 신항의 아버지 신종호가 우승지(右承旨)로 있었는데, 성종이 우승지신종호에게 전교(傳敎)하기를, “옹주가 궁궐 안에서 자라서 더러 귀(貴)한 것을 믿고 교만한 폐단이 있을 것이다. 반드시 어렸을 때부터 예를 알아야 하니, 습관이 몸에 배어야 부도(婦道)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경(卿)은 그 예를 가르치고 폐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성종실록』성종 21년 4월 15일]
당시 내명부(內命婦)에는 하귀인(河貴人)과 정귀인(鄭貴人)이 있었으나, 홍숙의와 김숙의(金淑儀)가 가장 성종의 사랑을 받았다. 홍숙의는 6남 3녀를 낳고, 김숙의는 1남 3녀를 낳아서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 그러므로 홍숙의 맏사위 신항과 김숙의 맏사위 임숭재(任崇載)는 서로 숙적(宿敵) 관계에 놓였다. 임숭재는 임사홍(任士洪)의 아들이다. 성종 때 임사홍은 도승지로 있다가 물러났는데,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후임 도승지현석규(玄錫圭)를 무함하다가 발각되어 의주(義州)로 귀양갔다. 그러므로 성종 시대에는 신항과 신종호는 성종의 사랑을 받았고, 임숭재와 임사홍은 성종의 미움을 받았다.
하루는 성종이 부마 신항에게 어서(御書)를 보내기를, “듣자니, 네가 지은 글이 있다는데, 몇 수나 되느냐.” 하므로, 신항이 자기가 지은 시(詩) 몇 수를 써서 바쳤다. 이때부터 성종은 매일 부마 신항을 궁궐로 불러서 시를 짓게 하고 서로 시를 논하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나왔다. 성종이 한 환관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신항과 같은 아들을 두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였다.[『이요정집』 권12 「고원위 신공 신도비명」] 이것은 세자 연산군(燕山君)을 부마 신항과 비교하여 말한 것이다.
1493년(성종 24)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양희지(楊熙止)가 신종호 · 신항 부자의 세력이 크다고 상언한 김순정(金順貞)을 조옥(詔獄)에 내린 일이 옳지 않다고 아뢰자 성종이 반박하기를, “지금 특별히 고원위신항을 세력이 있다고 하는데, 어찌 지목하는 바가 없겠는가.” 하고, 탄핵한 자의 저의를 캐물어서 입을 막았다. 전일에 김순정은 “고원위신항은 부마인데, 그 아비 신종호는 병조 참판이 되고, 그 종조부 신준(申浚)은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어서, 그 세력이 너무 큽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24년 9월 12일)
1494년(성종 25) 12월 성종이 승하하자, 18세의 부마 신항이 장인 성종의 상례에 소찬(素餐)하고 육선(肉饍) 곧 고기반찬을 일년 동안 먹지 않으려고 하였다. 아버지 신종호가 그에게 타이르기를, “신자(臣子)로서 군부(君父)의 상례에 애통한 심정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마는, 정도를 넘어 홀로 소식을 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니, 그때서야 육선을 들기 시작하였다.[『이요정집』 권12 「고원위 신공 신도비명」]
연산군 시대 활동
1497년(연산군 3) 아버지 신종호가 하정사(賀正使)로 중국 명(明)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개성부(開城府)에 도착해서 병이 났으므로, 그가 약을 가지고 달려갔으나 그 다음날 돌아갔다. 그는 매우 애통해하였는데, 3년 동안 여묘살이 하면서, 아버지 산소 옆에 초려(草廬)에 거처하며 아침저녁으로 제를 올리기를 시종 게을리 하지 않았다.[『이요정집』 권12 「고원위 신공 신도비명」] 1499년(연산군 5) 부친 상례를 마치고 돌아와서, 그해 가을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고, 1501년(연산군 7) 종2품상 자의대부(資義大夫)로 승품하였다. 1502년(연산군 8) 가을에 통헌대부(通憲大夫)로 승품되었는데[『이요정집』 권12 「고원위 신공 신도비명」] 대간에서 신항(申沆)을 승품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상소하였으나, 연산군이 들어주지 않았다.[『연산군일기』연산군 8년 7월 2일]
1503년(연산군 9) 귀후서(歸厚署)제조(提調)가 되어 궁핍한 사람들에게 먼저 관곽(棺槨)을 급여하니, 모두가 감탄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9년 3월 6일) 그해 여름 혜민서(惠民署) 제조가 되어 의관(醫官)들의 재주를 시험하기를 한결같이 공평하게 하였다. 그때 신항이 부마로서 마음가짐이 겸손하고 문아(文雅) 곧 시문을 짓고 읊는 풍류의 도를 즐기며 글을 잘 하였으므로 사림(士林)들이 그를 좋아하였다. 이처럼 신항의 문아(文雅)가 높았으므로, 그 동생 신잠도 그 백형(伯兄)을 따라서 풍류와 시를 배웠다.[『청장관전서』 권68]
1504년(연산군 10) 부마 임숭재의 아버지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생모 윤비(尹妃: 제헌왕후)의 폐위 사실을 고자질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평소 부마 임숭재는 동서 신항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가, 이때 이르러 연산군에게 신항을 참소하였다. 처음에 임숭재가 승품하였을 때에는 대간에서 심하게 논박하였으나, 다음에 신항이 승품하였을 때에는 논란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대간들이 신항을 비호한다고 무함하였다. 연산군은 신항과 그때의 대간과 승지들을 모두 잡아다가 의금부(義禁府)에 하옥시키고, 국문(鞠問)하게 하였다. 신항과 대간 · 승지들을 심문하고 나서, 연산군은 부마 신항에게 대궐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신항에게 가자한 통헌대부의 자급을 회수하였다. 이때부터 신항은 혜숙옹주(惠淑翁主)와 함께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집안에 칩거하고 빈척(賓戚)들을 사절하고 적막하게 지냈다
중종 시대 활동
1506(연산군 12) 9월 1일 저녁에 박원종(朴元宗) 등이 군사들을 훈련원(訓練院)에 집결시켜, <중종반정(中宗反正)>을 도모할 때 죄수와 역부(役夫)까지 돈화문(敦化門)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날 저녁에 어떤 사람이 급히 찾아와서 그에게 권하기를, “속히 훈련원 군문(軍門)으로 달려가면 반정(反正)한 공신으로 녹훈(錄勳)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신항은 큰소리로 호령하기를, “내가 처음부터 그들과 더불어 반정을 의논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 대사(大事)의 계획이 이미 결정되었을 터인데, 이 시기에 편승해서 공훈을 요구한다면 그게 어찌 대장부가 할 일이겠는가. 그토록 얼굴이 두꺼운 짓을 내가 어찌 하겠는가.” 하면서 끝내 훈련원으로 가지 않았다. 유자광 같은 사람은 박원종이 원래 죽이려고 계획하였는데, 그날 저녁에 훈련원으로 달려가서 반정군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중종의 반정 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그때 부마 신항은 몸이 편치 않아서 집안에 가만히 누워 있었는데, 박원종과 성희안(成希顔)의 정변이 성공하여 중종이 즉위한 다음에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훈되고 정2품상 봉헌대부(奉憲大夫)로 승품되었다.[『이요정집』 권12 「고원위 신공 신도비명」]
1507년(중종 2) 2월 19일 병으로 부마의 저택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31세였다.[『이요정집』 권12 「고원위 신공 신도비명」]그는 임종할 때에 동생 신잠을 불러서 부탁하기를, “사람의 일신에 근신(謹愼)이 첫 번째이고, 재주와 기예는 그 다음이다. 그 두 가지를 겸하면 더욱 좋지만, 만약 겸하지를 못한다면, 차라리 재주와 기예를 버리고 근신을 지켜야할 것이니, 너는 마땅히 삼가고 삼가라.” 하였다. 그 다음으로 옹주와 영결(永訣)할 때는 단지 부모님께 효도하라고만 부탁하였을 뿐이고 다른 말은 없었다.
<갑자사화>와 부마 신항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났는데, 부마 임숭재의 아버지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생모 윤비(尹妃: 제헌왕후)의 폐위와 죽음을 고자질하여 사화(士禍)가 일어난 것이다. 또 성종의 서출 제 2왕녀 휘숙옹주(徽淑翁主)의 부마 임숭재가 평소 서출 제1왕녀 혜숙옹주의 부마 신항의 재주와 행동을 시기하다가, 이때 연산군에게 신항을 무함하였다. 성종의 후궁 홍숙의와 김숙의의 질투가 마침내 그들의 맏사위 신항과 임숭재의 반목(反目)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평소 임숭재는 신항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가 마침내 없는 사실을 꾸며서 이때 연산군에게 신항을 참소하였다.
처음에 임숭재가 승품하였을 때에는 대간에서 임숭재의 초자(超資)를 심하게 논박하였으나, 다음에 신항이 승품하였을 때에는 신항의 가자(加資)를 논란하지 않았는데, 이것을 가지고 임숭재는 대간들이 신항을 비호한다고 무함하였다. 연산군은 신항과 그때의 대간과 승지들을 모두 잡아다가 의금부에 하옥시키고, 국문하게 하였다. 부마 신항의 5촌 신용개도 당시의 승지로서 잡혀왔는데, 연산군은 명령하기를, “신용개는 신항의 족속이므로 더욱 잘 알 터이니, 만약 바른대로 말하지 아니하면, 형신(刑訊)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항과 대간 · 승지들을 심문하고 나서,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신항은 이미 궐내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에게 준 가자도 개정하라.”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12월 18일) 이리하여 신항에게 가자한 통헌대부의 자급을 거두고 대궐에 통금(通禁)을 실시하여 궁궐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여러 군(君)과 부마는 의식(衣食)이 풍족하여 학문이 필요치 아니한데, 지금 고원위신항은 굳이 옛 글을 좋아하여 문사(文士)를 접하였으므로, 그에게 상으로 준 가자를 삭제하고, 혜민서 제조를 해임시켜, 여러 군들과 부마로 하여금 징계하는 바가 되도록 한다.” 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10년 12월 28일] 이때부터 신항는 혜숙옹주와 함께 두문불출하며 평상적인 생활로 돌아가 빈척(賓戚)들을 사절하고 적막하게 지냈다.
1506년(연산군 12)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공주 · 옹주· 종 친의 처와 모든 왕후의 족친은 연회에 참석하도록 하고, 신항의 처는 참석시키지 말라.”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2년 8월 5일) 이 무렵에 연산군은 궁중에 연회를 열고 공주 · 옹주와 종친의 부인과 고관들의 부인들을 차례로 초청하여 며칠씩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가무(歌舞)를 즐겼는데, 연산군이 종친의 부인과 대신들의 부인과 사통하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심지어 연산군이 배다른 누이와도 간통하였다고 소문이 났으므로, 혜숙옹주는 궁중의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또 연산군은 새로운 법을 만들었는데, 궁중의 염문을 누설한 자는 멸족(滅族)시키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는 자는 함께 처벌하고 고한 자는 상을 내린다는 법이었다. 그때 마침 두 사람이 신항의 집에 와서 놀다가, 그 중에 한 사람이 궁중의 음탕한 일을 함부로 말하고 먼저 갔는데, 나머지 한 사람이 신항에게 맡겨서 이를 고발하게 하였다. 신항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나는 진실로 내가 고발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그 사실이 드러나서 중한 죄를 받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남을 고발하여 내가 살기를 바라는 짓을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불의한 짓을 하여 살기보다는 차라리 의롭게 살다가 죽는 편이 낫다.” 하자, 그에게 고발을 맡긴 자도 그의 말에 감격하여 그 사실을 끝내 입 밖에 내지 않았다.[『이요정집』 권12 「고원위 신공 신도비명」]
성품과 일화
신항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고아(高雅)하며 자상하고 온화하여 경박한 말과 옹졸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부부간에는 서로 공경하여 마치 손님과 같이 서로 예대(禮待)하고 공경하였다. 일생을 부귀영화 속에서 살면서도 교만하거나 뽐내는 일이 전혀 없었고, 한결같이 포의지사(布衣之士)처럼 지냈다.[『이요정집』 권12 「고원위 신공 신도비명」]
기질이 연약하여 질병이 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아서, 항상 약물에 의지해서 목숨을 보전하였다. 좌우에는 책만이 쌓여 있어서 방안이 숙연하였지만, 시와 술로 스스로 즐거워했다. 본래 호수와 산을 좋아하여 몸은 도성에 있었으나 마음은 항상 자연에 있어 서호(西湖)에 집을 짓고 매양 여가를 틈타 오가는 것을 날마다 일상으로 삼았다. 음률(音律)을 깨달아 거문고와 장구 치기를 더욱 잘하였으며, 또 서사(書史)를 몹시 즐겨보아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의방 석서(醫方釋書)에 이르기까지 탐구하여 거의 모르는 것이 없었다. 문장은 단아하고 건실하였으며 서화(書畵)도 또한 잘하였다. 그러나 자랑하고 떠벌리는 것을 싫어하여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니, 그는 ‘재주와 기예가 많으면서도 덕이 있는 사람’이라 말할 만 하다.[『이요정집』 권12 「고원위 신공 신도비명」]
또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과 지혜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는데, 나이 겨우 7, 8세가 되자, 스승에게 나아가서 글을 배우면서 조금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다. 몇 년 뒤에는 시서(詩書)를 익히고 아울러 송(宋)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산곡집(山谷集)』을 외웠는데, 아버지 신종호가 시험 삼아 그것을 한번 외우게 하자, 한자도 틀리지 않았다. 이어서 아버지가 산수도(山水圖)를 내놓고 절구(絶句)의 시를 짓게 하였다.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바로 시를 한 수 쓰기를, “푸른 물 밝은 모래 가을 하늘이 높고[水碧沙明秋氣高] 햇볕 따라 날던 기러기 갈대밭에 내려앉네.[隨陽征雁下叢蘆] 안개비가 낀 아득한 먼 곳을 바라보니,[更看煙雨蒼茫外] 털끝같은 푸른 산이 우리 집이구나.[一髮靑山是我廬]” 하였다. 아버지 신종호가 감탄하여, “이 아이가 나중에 반드시 문장의 대가(大家)가 될 것이다.” 하였다.[『해동잡록』 권4]
1490년(성종 21) 나이 14세 때 성종의 딸 혜숙옹주에게 장가들었다. 성종이 장차 옹주를 시집보낼 부마를 간택할 때에, 그를 한번 보고, 옹주의 배필로서 적당하다고 결정하였다. 그때 점을 치는 사람이 “그의 수명이 길지 못할 것입니다.”고 예언하자, 성종이 이르기를, “사람을 취하는 데에는 마땅히 사람이 현량(賢良)한가, 그렇지 않는가를 가리면 되는 것이지, 어찌 오래 살고 일찍 죽는가를 논하겠는가? 이 아이의 기운과 도량이 비범하니, 그 가운데에 반드시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 있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그를 부마로 결정하여, 고원위로 책봉하였다.[『이요정집』 권12 「고원위 신공 신도비명」]
1502년(연산군 8) 연산군이 부마 신항을 불러서 본국의 예제(禮制)가 중국과 같은지 틀린지를 묻자, 신항이 대답하기를, “중국의 예제를 자세히 듣지는 못했습니다만, 단지 중국의 상제(喪制)가 크게 허물어져서 부모가 죽은 날에도 육식(肉食)을 평소처럼 한다니, 이것은 필시 오랑캐의 풍습이 아직 없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이요정집』 권12 「고원위 신공 신도비명」] 그 후에 덕종(德宗) 왕비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승하하자, 연산군이 그 상기(喪期)를 짧게 하는 제도를 정하고 신항을 불러서 묻기를, “그대는 전에 중국 사람들이 부모가 죽었는데도 고기를 먹는 것은 곧 오랑캐의 풍습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상기를 짧게 치르는데, 이것도 또한 오랑캐의 풍습인가?” 하였다. 이것은 연산군이 곧 신항에게 죄를 주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다. 신항이 대답하기를, “자식이 태어나면 3년이 지난 후에야 부모의 품을 벗어날 수 있으니, 3년상은 천하의 통상적인 상례입니다. 그러나 임금은 이와 달라 하루에도 만 가지 정무를 처리하니, 양암(諒陰)의 예를 행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하니, 연산군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그가 궁궐을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오늘 화가 어버이에 미칠까 염려하여 정직히 대답할 수 없었다. 부끄럽기가 그지없다.” 하였다.[『이요정집』 권12 「고원위 신공 신도비명」]
1507년(중종 2) 2월 신항이 31세의 나이로 운명하기 직전에 문병하려고 온 친구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신데 내가 지금 먼 길을 떠나서 부모님께 근심을 끼치니, 이 때문에 애통하게 생각한다.”고 하자, 곁에 있던 친구가 신항을 위로하기를, “하늘의 도는 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화를 주는데, 그대처럼 선을 쌓은 사람이 어찌 갑자기 불행해질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신항이 말하기를, “하늘의 뜻을 기필할 수 있겠는가. 하늘의 뜻을 만약 기필할 수 있다면 어찌 공자의 제자 안자(顔子)가 요절했겠는가.” 하니, 그 친구가 말하기를, “안자는 어질었지만, 수(壽)를 누리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하자, 신항이 말하기를, “다 그런 것이다. 하늘이 어찌 일일이 만물의 수요(壽夭)를 결정하겠는가. 나는 지금 편안할 때에 순리대로 살다가 돌아가는데, 어찌 그 사이에 조금이라도 남겨둘 한이 있겠는가. 사람들이 마음에 오래 사는 것을 기뻐하고 일찍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이치에 통달치 못한 때문이다. 이치를 깨달은 사람이 어찌 수요로써 나의 진성(眞性)을 어지럽히겠는가. 조물주의 사사로움이 없음에 대해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어서 “살아서는 호화로운 집에 살다가[生存處華室], 죽어서는 산하로 돌아가네.[零落歸山阿].”라는 시 한 구절을 읊고서 마침내 껄껄 웃으며 손을 들어 병풍을 치우고, 돌아누워서 여유 있게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이요정집』 권12 「고원위 신공 신도비명」. 『해동잡록』 권4]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모리(某里)에 있고, 이요정(二樂亭)신용개(申用漑)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이요정집(二樂亭集)』 권12 「고원위 신공 신도비명(高原尉申公神道碑銘)」]
부인은 성종(成宗)의 서출 제 1왕녀 혜숙옹주이다. 1녀 1남을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이요정집』 권12 「고원위 신공 신도비명」] 신항의 4촌 신함(申涵)의 아들 신수경(申秀涇)을 양자로 삼았는데, 신수경은 정랑(正郞)을 지냈다. 신수경의 아들 신의(申檥)가 중종의 딸 경현공주(敬顯公主)와 혼인하여 영천위(靈川尉)에 봉해졌다. 성종의 서출 제 1왕녀 혜숙옹주의 부마는 고원위신항이고 그의 손자 영천위신의는 중종의 적출 제 4왕녀 경현공주 부마였으므로,[『청장관전서』 권49] 혜숙옹주와 경현공주는 왕실에서는 고모와 질녀 사이이지만, 시댁에서는 시할머니와 손주 며느리 사이가 되었다. 이것은 종실(宗室)과 명문(名門) 벌족(閥族)이 복혼(複婚)을 맺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동문선(東文選)』
- 『동사록(東槎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해동잡록(海東雜錄)』
- 『이요정집(二樂亭集)』
- 『퇴계집(退溪集)』
- 『태촌집(泰村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