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후서(歸厚署)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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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귀후서 |
한글표제 | 귀후서 |
한자표제 | 歸厚署 |
상위어 | 종육품(從六品) 아문(衙門), 선공감(繕工監) |
하위어 | 관곽색(棺槨色), 관곽소(棺槨所), 시혜소(施惠所) |
관련어 | 관곽(棺槨)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한희숙 |
폐지 시기 | 1777년(정조 1)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귀후서(歸厚署)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5년 11월 3일, 『세종실록』 1년 1월 27일 |
조선시대 관곽(棺槨)을 만들고 이를 일반인에게 팔던 예조 소속 종6품 아문.
개설
매장을 위해서는 관곽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국가적으로 이것을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귀후서는 관곽을 만들어 팔며 장례에 관한 물품을 공급해 주는 일을 담당하던 관서였다. 그 설치 목적은 미리 관곽을 준비해 놓고 사람들이 사다가 시체를 장사 지낼 수 있도록 하여, 사람마다 장사 지내는 예의를 알게 하고자 한 데 있었다. 따라서 귀후서의 기능은 관곽을 만들어 예장에 쓰는 공용(公用)과 양반을 비롯한 일반민이 개인적으로 쓰는 사용(私用)에 충당하는 데 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귀후서는 종6품 아문이며, ‘관곽을 만들고 그 화매(和賣)와 예장(禮葬)에 공급하는 여러 가지 일을 맡는다. 제조(提調)는 1명으로 한다. 종6품의 별제 6명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관곽은 흉기(凶器)이므로 도성 안에 들이지 않았고, 귀후서도 도성 밖에 설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 말기에는 장례를 위해 따로 4도감과 12색을 세웠다. 4도감은 빈전(殯殿)·국장(國葬)·재(齋)·조묘(造墓)도감을 말하고, 12색은 관곽(棺槨)·유거(柳車)·복완(服玩)·제기(祭器)·소조(小造)·상유(喪帷)·보진(鋪陳)·영반(靈飯)·의장(儀仗)·반혼(返魂)·옥책(玉冊)·상복(喪服) 등을 말하는데 각각 상장(喪葬)의 일을 맡아보았다.
조선의 태종은 고려 말의 12색 중의 하나인 관곽색(棺槨色)을 관곽소로 바꾸고 이전부터 장례 의식을 담당해 오던 승려들을 관 만드는 일에 동참시켰다. 태종 때 승려 신계(信戒)가 용산 강가에 사찰을 세우고 여기에서 관곽을 만들어 팔았는데 이것을 시작으로 1406년(태종 6) 좌정승하륜(河崙)의 건의로 용산 한강 변에 관곽소를 설치했다. 1414년에는 관곽소를 시혜소(施惠所)라 하였다가 다시 귀후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귀후’는 민덕귀후(民德歸厚) 즉 죽은 사람에게 후하게 하면 백성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후 귀후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듯하며 1443년(세종 25)에 다시 귀후소를 설치하였다. 대소 인민들이 몹시 가난할 때 초상을 당하면 관곽을 갑자기 마련하기가 힘들었다. 귀후소를 설치하여 민으로 하여금 그곳에 쌀과 포를 시납(施納)하게 하면, 귀후소는 그 쌀과 포를 밑천으로 하여 이윤을 추구하고, 재목을 사다가 관곽을 만들어 초상을 당한 사람에게 팔게 하였다(『세종실록』 25년 11월 3일). 귀후소는 1463년(세조 9) 이후 귀후서로 위상이 격상되었다.
조직 및 역할
귀후서의 관원은 주검과 구휼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만큼 심성이 좋은 자로 임명하였다. 1419년에는 제조 1명, 제거(提擧) 2명, 별좌(別坐) 2명을 두었다(『세종실록』 1년 1월 27일). 1463년에는 별좌 4명을 두되 이전에 별좌에 승려를 임명하여 사고파는 것을 돕도록 했던 것을 혁파하고 모두 관원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1469년(예종 1)에는 인원을 늘려 별제 6명을 두었으며 『경국대전』에는 이대로 법제화되었다. 뒤에 『속대전』에서 별제 4명을 감축하였다. 귀후서의 책임은 제조가 맡았고 별제는 예장에 관한 일을 맡았으며, 그 아래 서리와 노비, 그리고 관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켜는 일꾼이 소속되어 있었다. 예조의 속아문이다.
귀후서의 관곽을 이용하는 사람은 고관에서부터 양반 관료 및 일반민까지였다. 공용으로는 문무관으로 2품직 이상을 지낸 자와 종친으로 국장에 참여하지 못한 시마(緦麻) 이상의 친족에게 관곽을 내려 주었다. 이 외에도 정3품 당상관 또는 세자의 빈료(賓僚), 후궁, 궁녀, 명나라 사신의 죽음에 관곽을 내려 주기도 했다. 그 외 양반 관료나 일반민들이 필요할 때 귀후서에서 사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변천
귀후서에는 관곽을 둘러싼 폐단이 있었다. 별제들이 관곽의 값을 배로 받거나 값을 이중으로 받고 또 횡령하는 경우가 있었고, 관리들이 몰래 송판을 빼내어 이익을 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귀후서에 공납하는 송판은 백성들에게 큰 폐해를 끼치기도 하였는데, 귀후서에서 재목과 판자를 구할 때 사들일 가포(價布)를 백성에게 나눠 주고 판자를 바치라고 독촉하였다. 귀후서는 결국 실제 업무에 비하여 관원 수가 많고 공인들의 농간으로 공물의 허비가 많다는 지적에 따라 1777년(정조 1) 9월에 혁파되었다. 이후 귀후서의 업무는 선공감(繕工監)의 예장관(禮葬官)이 겸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희숙, 「조선 전기 장례문화와 귀후서」, 『조선시대사학보』3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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