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儀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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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딸에게 장가든 왕의 사위와 세자의 딸에게 장가든 세자의 사위.

개설

조선시대 의빈(儀賓)이란 용어는 1434년(세종 16) 4월 8일에 공포된 세종의 명령 즉, “이 뒤로는 조회에 들어오는 대소인원(大小人員)에게 상위(上位)는 전하(殿下)로, 중궁은 왕비로, 동궁은 세자로, 대궐은 왕부(王府)로, 대군은 왕자로, 공주는 왕녀(王女)로, 부마는 의빈으로, 영공(令公)은 재상(宰相)이라 일컫도록 하라.”는 기록에서 처음 나타난다(『세종실록』 16년 4월 8일). 이처럼 의빈이란 기왕의 부마라는 용어 대신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본래 부마란 중국에서 천자의 사위를 지칭하던 ‘부마도위(駙馬都尉)’를 줄인 말이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 건국 직후에 왕실 용어 중에는 중국의 천자가 사용하는 용어들이 상당히 있었다. 부마라는 용어도 그중의 하나였다. 예컨대『신당서(新唐書)』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왕녀에게 장가든 자를 ‘부마도위’라고 불렀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근친혼으로 말미암아 원나라 간섭기 이전 왕의 부마는 대부분이 왕족에서 나왔다. 따라서 왕족을 대상으로 하는 봉작제와 부마를 대상으로 하는 봉작제가 서로 연관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별도의 관서도 존재할 수 없었다.

고려시대의 봉작제는 다음과 같이 시행되었다. 먼저 왕의 장자는 왕태자가 되어 왕의 후계자가 되었다. 나머지 여러 아들들은 일률적으로 후(侯)를 봉해주었으며, 왕의 딸에게 장가드는 부마에게는 백(伯)을 봉해주었다. 고려시대 왕의 아들들이나 딸들은 적서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봉작을 받는 데도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백이나 후에 봉작된 사람들은 후계왕이 즉위하는 등 상황 변화에 따라 공(公)까지 진봉(進封)될 수 있었다. 이들 공, 후, 백의 다음 세대 즉, 아들과 사위에게는 작위를 상속시키기 않고 일률적으로 최고 관직인 사도(司徒), 사공(司空)을 명예직으로 수여하였다. 이처럼 고려조에는 봉작이 당대에 한정되었지만, 왕실의 근친혼으로 말미암아 공, 후, 백의 다음 대인 사도, 사공 세대에서 다시 부마나 태자의 장인이 나오게 되어 봉작이 연속될 수 있었다.

고려는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면서 왕실의 족내혼이 금지되었는데 이로써 왕실 봉작제도 크게 변화하였다. 이성(異姓) 간에 혼인을 함으로써 부마도 이성 출신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이 건국되면서 더더욱 강화되었다. 주자학에 입각하여 건국된 조선왕조에서 왕실은 이성 간의 혼인을 솔선수범해야 했으며, 아울러 조선 건국 직후 왕자, 종친, 부마, 외척들이 병권을 장악하고 조정의 요로를 장악한 상황에서 이들의 정치적, 군사적 실권을 규제해야 하는 문제까지 더해졌다.

조선 태조 때까지만 해도 부마와 외척은 이성제군소(異姓諸君所)에 소속되어 봉군(封君) 등의 특권을 누렸으며 병권과 실권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종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정종은 종친과 부마에게 직사를 맡기지 못하게 하였으며 공신이 아니면서 군(君)에 봉해진 부마, 외척들의 봉군을 철폐시켰다. 이에 따라 종친, 부마, 외척들을 통제하고 회유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졌는데, 이는 왕실 전반을 정비, 편제해야 한다는 문제로 대두되었다.

태종은 부마와 공신이 소속되었던 기왕의 이성제군소를 공신제군부(功臣諸君府)로 바꾸었다. 이는 공신이 아니면서 군에 봉해졌던 부마, 외척들이 정종대에 이미 정리된 상황이므로 이성제군소에 소속된 부마는 모두 공신이었기 때문인데 조선 개국 직후의 부마들이 건국 과정에서 공훈을 세워 공신에 책봉되었던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종 이후 단지 부마라는 사실로 봉군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공신제군부가 부마와 공신 모두를 포괄하기에는 명실이 맞지 않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은 1444년(세종 26) 7월 1일에 “종실 이외의 서성(庶姓)에게 봉군하는 것은 모두 폐지할 것이니 부마의 칭호에 대하여 고전을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전지(傳旨)를 이조에 내렸다. 세종은 종친과 이성의 구별 없이 군으로 봉작되는 것은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되지 못하고 공신이 아니면 후(侯)가 되지 못한다.”는 한 고조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명분을 내세워 종친 봉작과 이성 봉작을 차별화하고자 한 것이었다(『세종실록』 26년 7월 1일). 한 고조의 위 원칙은 종친을 왕으로 봉작하고 이성은 후에 봉작함으로써 종친을 이성에 비하여 우대한 것이므로 세종도 종친 봉작과 이성 봉작을 차별화함으로써 종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세종의 전지에 따라 이조에서는 부마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첫째, 부마의 봉군을 폐지하고 대신 산관(散官)인 정1품 수록대부(綏祿大夫)·성록대부(成祿大夫), 종1품의 광덕대부(光德大夫)·숭덕대부(崇德大夫), 정2품의 봉헌대부(奉憲大夫)·통헌대부(通憲大夫), 종2품의 자의대부(資義大夫)·순의대부(順義大夫)에 제수할 것.

둘째, 기왕의 이성제군부를 부마부(駙馬府)로 개칭하고 관속을 배치하여 독립 아문화할 것.

셋째, 이성제군부에서 관장하던 공신 관련 업무는 충훈사(忠勳司)로 이속시킬 것.

세종이 이조의 건의를 수락함으로써 조선 개국 이후 부마와 외척이 뒤섞여있던 이성제군부는 부마부와 돈녕부 및 충훈부로 나뉘어졌다. 동시에 부마는 봉군되지 않고 단지 종2품에서 정1품에 이르는 산관만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부마들이 단지 산관만을 받게 되자 동일한 산관을 받은 부마는 서로 구별하기가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문종 때에 이르러 부마는 기왕의 산관에 더하여 전일에 봉한 주현(州縣)의 호를 넣어서 모위(某尉)로 칭하도록 하였다. 예컨대 광덕대부연창위(延昌尉), 통헌대부화천위(花川尉)라고 하는 식이었다. 이어서 세조대에 이르러 부마부가 의빈부(儀賓府)로 바뀌면서 세부적인 규정이 마련되었는데 이 규정이 거의 그대로 『경국대전』에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내용 및 특징

1466년(세조 12) 1월 15일에 부마부가 의빈부로 바뀔 때 정1품과 종1품의 의빈, 정2품과 종2품의 승빈(承賓), 정3품의 부빈(副賓), 정3품과 종3품의 첨빈(僉賓) 등 4가지의 빈(賓)이 나타났다. 이를 세종대의 부마 산관에 비정하면 의빈은 정1품 수록대부·성록대부와 종1품의 광덕대부·숭덕대부에, 승빈은 정2품의 봉헌대부·통헌대부와 종2품의 자의대부·순의대부에 대응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의빈은 공주에게 장가든 부마에게 제수되었으며 승빈은 옹주에게 장가든 부마에게 제수 되었다. 따라서 세종대까지 부마는 오직 왕의 사위만을 대상으로 했다고 하겠다.

세조대에 정3품의 부빈, 정3품과 종3품의 첨빈 등이 새로 나타난 이유는 부마의 범위가 왕의 사위에서 세자의 사위까지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세조대의 의빈부 규정은 거의 그대로 『경국대전』에 실렸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시대 의빈의 봉작은 다음과 같이 운영되었다.

의빈부의 직무에 대하여는 ‘공주와 옹주에게 장가든 자들의 관부’라고 하여 왕의 사위만 관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왕세자의 사위도 관장하였다. 실제로 의빈부의 작위를 받는 대상자는 왕의 사위에 더하여 왕세자의 사위도 포함되어 있다. 즉 왕의 적녀(嫡女)인 공주와 혼인한 사람은 1품의 위(尉)를, 왕의 서녀(庶女)인 옹주와 혼인한 사람은 2품의 위를 받았으며, 아울러 왕세자의 적녀인 군주(郡主)와 혼인한 사람은 정3품 당상관의 부위(副尉)를, 왕세자의 서녀인 현주(縣主)에게 장가든 사람은 종3품의 첨위(僉尉)를 받았던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적서 차별의 원칙이 의빈에게도 적용된 결과였다.

의빈부의 의빈들이 받는 산계의 경우 공주와 옹주에게 장가든 사람이 1품에서 2품의 위를 받았음에 비해 공주와 옹주는 품계를 초월해 있었다. 또한 군주에게 장가든 사람은 정3품의 부위를 받았지만 군주는 정2품을 받았으며 현주에게 장가든 사람은 종3품의 첨위를 받았지만 현주는 정3품을 받았다. 이는 왕과 왕세자의 사위보다 왕과 왕세자의 딸들이 더 우대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왕실을 양반보다 우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타난 결과였다.

그와 동시에 의빈들에게 별도로 의빈계를 준 이유는 종친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기 위해서였다. 의빈들이 종친들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부터 봉군되어 오다가 1444년부터 의빈계로 대체된 정치적 배경도 부마와 외척들이 왕실 세력과 결탁하여 정권을 독차지하던 종래의 정치 풍토를 바꾸어 보다 많은 양반 관료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양반 관료 체제를 확립하려는 일환이었던 것이다.

의빈부의 작위를 받은 의빈은 관직을 맡지 못하는 대신 산관에 해당하는 녹과(祿科)를 받았다. 공주에게 장가들어 종1품의 위에 봉작되면 곡식 88석, 포(布) 20필, 저화(楮貨) 10장 그리고 과전(科田) 105결(結)을 받았고 옹주에게 장가들어 종2품의 위에 봉작되면 곡식 76석, 포 19필, 저화 8장 그리고 과전 85결을 받았다. 또한 군주에게 장가들어 정3품 당상관위에 봉작되면 곡식 67석, 포 17필, 저화 8장, 과전 65결을 받았으며 현주에게 장가들어 종3품 위에 봉작되면 곡식 60석, 포 16필, 저화 6장, 과전 55결을 받았다.

본래 조선시대의 양반 관료들은 실직(實職)에 근거하여 녹과를 받았다. 하지만 부마, 국구 등 왕실 구성원들은 사환이 금지되었으므로 실직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봉작을 받은 왕실 구성원들은 실직에 관계없이 품계에 따라 녹과를 받았던 것이다. 의빈들은 일 년에 4차례 춘하추동의 첫째 달에 녹과를 받았다. 의빈들에게 의빈부의 최고급 작위를 주고 그에 따른 녹과를 지급한 이유는 의빈의 사환을 금지하는 대신 그 반대급부로 최고의 명예와 함께 최고의 경제적 풍요를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변천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에서 중앙관제는 왕실 업무를 관장하는 궁내부와 일반 국정 업무를 관장하는 의정부의 2원 체제로 바뀌었다 1894년 7월 18일자에 군국기무처에서 제의한 개혁안에 의하면 의빈부는 종정부(宗正府)에 포함되어 궁내부에 소속되었으므로 의빈들은 종정부에서 관할하게 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궁내부에 소속되어 있던 종정부는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되면서 폐지되기에 이르렀고 의빈을 대상으로 하는 봉작도 없어졌다.

의의

조선시대의 의빈은 의빈부의 작위를 받던 왕의 사위와 왕세자의 사위로서 양반 관료 사회였던 조선에서 사환이 금지됨으로써 정치적 금고를 당한 반면 당대 최고의 사회적, 경제적 예우를 받던 대상자들이었는바 조선왕조의 구조와 그 성격을 잘 보여주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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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당서(新唐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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