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부(開城府)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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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개성부 |
한글표제 | 개성부 |
한자표제 | 開城府 |
관련어 |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 개성유수부(開城留守府), 개성현(開城縣)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조선 |
왕대 | 고려~조선 |
집필자 | 임용한 |
폐지 시기 | 1907년(광무 10)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개성부(開城府) |
고려시대 수도인 개경 인근을 통치하는 중앙 관아이며, 조선시대 개성 지역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개성부는 995년(고려 성종 14)에 성립되어 이후 조선이 개창된 후 1394년(태조 3) 한양으로 천도하기까지 외침, 천도 등과 관련되어 혁거된 시기를 제외한 모든 시기에 도성과 그 인근 지역을 통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로 수도를 옮기자 개성부는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가 되어 고려 왕실의 제사 등 특별한 임무와 대우를 받았다. 조선후기에는 강화, 광주, 화성과 함께 4유수부를 구성하여 한성을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1895년(고종 32) 개성부로 고쳤고, 1907년(광무 10) 개성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개성부는 995년에 960년(고려 광종 11)에 개주(開州)를 개칭하면서 성립된 개경(開京)을 다시 개칭하면서 성립되었고, 도성 내외를 통치하였다. 고려시대의 개성부는 조선의 한성부와 같이 개경과 인근 11현을 통괄하는 중앙 행정 기구였다.
조선 건국 후 수도의 기능을 강화해서 호적, 사법, 치안 기능을 강화했다. 그러나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1395년 개성부를 개성유후사로 개정하고, 개성을 관할하는 지방 행정 기구가 되었다. 그런데 『경제육전』에는 건국 초 개성부를 수도로 삼는 교지가 그대로 수록되어 『조선왕조실록』에는 간혹 한성부를 개성부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있다.
천도 후에도 개성부는 전 왕조에 대한 예우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개성유후는 경관(京官)으로 간주했다. 개성유후는 경기도의 계수관이었으며, 특별히 고려 왕실의 제사와 왕릉의 관리를 맡았다. 1438년에 유후사를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고쳤다. 1466년에는 경기도에 예속시켰다.
조직 및 역할
처음 설치될 때의 개성부에는 정3품 부윤 이하가 있었고, 이후 관제개편과 속현의 편입 등과 관련되어 종2품 판부윤(判府尹)이나 판부사(判府事) 이하가 있었다. 1308년(고려 충렬왕 34) 이후에는 종2품 판부윤 1인, 정3품 윤 2인 중 1인은 겸관, 정3품 소윤 3인 중 1인은 겸관, 정5품 판관 2인, 정7품 기실참군(記室參軍) 2인, 7품 이상 현령(縣令) 1인이 있었다. 1356년(고려 공민왕 5) 이후에는 종2품 윤, 정4품 소윤, 정5품 판관, 정7품 참군, 정7품 현령, 정8품 현승(縣丞)이 있었다. 1362년에 당시까지의 관원에 윤의 위에 종2품 판부사를 두었고, 이 관원이 고려 말까지 계승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 개국 때에는 정2품 판사 2인, 종2품 윤 2인, 정4품 송윤 2인, 정5품 판관 2인, 정7품 참군 2인, 이속인 영사 6명이 있었다. 판부윤이나 판부사는 윤 이하를 지휘하면서 개성부의 행정을 총관하였고, 윤 이하는 판부윤이나 판부사의 지휘를 받아 부내의 토지, 호구, 농상, 학교, 사송, 군사 등의 일을 관장하였으며, 현령과 현승은 개성부 속현을 다스렸다.
조선시대의 개성유후사에는 유후, 부유후, 단사관(斷事官), 경력, 도사, 의학교유(醫學敎諭)와 검률(檢律) 1명씩을 두었다. 1466년 유수, 단사관, 경력, 도사를 파하고 개성윤과 판관 1명씩만 두었다. 『경국대전』에서는 종2품 유수 2명, 종4품 경력 1명, 종5품 도사 1명으로 확정되었다. 서리는 40명이었다. 유수 1명은 경기도관찰사가 겸직했다. 『속대전』에서는 도사 1명을 삭감하고 종6품 교수 1명을 두었다. 교수는 개성부의 문관 중에서 유수가 임명하게 했다. 그러나 다시 종9품 분교관으로 바뀌고 개성부의 생원, 진사 중에서 골라 유수가 임명하게 했다. 나중에는 유학(幼學)도 임명 가능하게 했다.
변천
995년(고려 성종 14)에 개경을 개칭하면서 성립한 개성부는 이후 조선왕조가 개창되고 한양으로 수도가 옮겨지면서 개성유후사로 개칭될 때까지 외침, 경기도의 운영 등과 관련되어 여러 번 혁거되고 다시 설치되면서 운영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거란의 침입으로 개성이 함락되면서 혁거, 1062년(고려 문종 16)에 설치되었다.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고의 침입을 막고자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혁거, 1270년(고려 원종 11) 개경환도로 설치, 1390년(고려 공양왕 2) 경기제의 운영으로 속현인 개성현이 경기우도에 편입되면서 운영되었다. 조선에서는 1392년 개창 때에는 고려 말의 개성부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다가 1394년(태조 3) 개경에서 한양으로의 천도에 따라 개성유후사로 개칭되면서 소멸되었다. 개성유후사는 이후 1438년(세종 20)에 개성유수부로 개칭되어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까지 계승되었다. 『경국대전』부터 개성부는 독립적 지위를 상실하고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지만 개성부의 특혜는 유지되었다. 개성부에는 사학(四學)을 두고 유수가 유생을 시험해서 선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승보생(陞補生)도 4명을 선발했다. 이런 특혜를 지닌 지역은 개성과 제주뿐이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송도지(松都誌)』
- 『경기도읍지(京畿道邑誌)』
- 최정환, 『역주 『고려사』 백관지』, 경인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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