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사화(甲子士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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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친어머니인 윤씨의 폐비(廢妃)·사사(賜死) 문제로 인해 훈구파와 사림파가 화를 당한 사건.

개설

갑자사화는 1504년에 연산군의 친어머니인 윤씨를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사약(死藥)을 내려 죽게 한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한 사건이다.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원통함을 풀어 준다고 하여 화의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고, 피화인(被禍人), 즉 사화(士禍)에서 처벌된 사람도 무오사화(戊午士禍)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이를 계기로 신구재상(新舊宰相)인 훈신(勳臣)이 제거되고 이미 무오사화로 처벌 받은 인물에게도 벌이 더해졌으며, 아직 조정에 남아 있던 사림도 축출되었다. 『경국대전』의 법 운용 변질과 능상(凌上) 또는 불경죄(不敬罪)를 죄목으로 하여 신료들에 대한 탄압이 진행되는 가운데 갑자사화를 통해 명실상부한 연산군의 친위 체제가 구축되었다. 이후 연산군은 경연 중지, 홍문관과 사간원의 혁파 등을 통해 언관(言官)의 언론 기능을 대폭 축소하였고 궁금(宮禁) 세력과 척신(戚臣) 세력을 본격적으로 등용해 갔고 노골적으로 황음적(荒淫的) 성향을 드러냈다.

역사적 배경

갑자사화가 일어나기 직전에 특지(特旨)의 형식으로 임사홍(任士洪)에 대한 임용과 봉군(封君) 조치가 이루어졌다. 언론 기관인 삼사(三司), 즉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논박에 의해 무오사화 직전 두 차례나 임사홍의 가자(加資)를 빼앗았던 정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양상이었다. 이후로는 흔히 궁금(宮禁)으로 일컬어지는 척신 세력이 대간(臺諫)·홍문관의 별다른 논박 없이 등용되었다. 그리고 능상 또는 불경죄를 빌미로 한 신료들의 탄압은 예조 판서이세좌(李世佐)와 경기관찰사홍귀달(洪貴達)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11일). 예조 판서이세좌의 불경죄는 양로연(養老宴)에서 왕이 내린 어사주(御賜酒)를 엎질렀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경기관찰사홍귀달의 불경죄는 연산군이 왕자의 빈(嬪)을 간택할 때 그의 손녀가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입궐(入闕)시키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이세좌는 몇 차례 유배지를 옮기다가 성종 때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간 담당 승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사(賜死)되었다. 또한 홍귀달은 유배된 뒤 갑자사화의 여파가 계속되는 가운데 처형되었다.

발단

1504년 연산군은 전교(傳敎)를 통해, 지금까지의 중요 정사를 담당해 온 기존의 대신과 새로 재상이 된 삼공육경(三公六卿)이 서로 비호하면서 붕당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불경한 자에 대한 대간의 논계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아 군주가 고립되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능상의 풍조를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3월 13일). 주목할 만한 것은 능상의 풍조를 조성한 중심 세력을 신·구 재상으로 간주하고 이들이 붕당의 형세를 이루고 있다고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연산군이 즉위한 이래 그와 더불어 정치 운영을 주도해 온 재상들을 이 시기에 이르러 붕당을 형성하여 능상을 조장한 중심 세력으로 간주하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붕당 혁파를 위해 또 다른 형태의 사화가 준비되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대간이 이세좌 등의 불경을 제대로 논박하지 않았다는 지적은 곧바로 당시의 대간과 홍문관원에 대한 논죄로 이어졌다. 불경죄를 전제로 한 대간·홍문관원에 대한 논죄였으나, 연산군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논계 여부 자체가 결정되었다. 즉, 삼사의 언론이 연산군의 의도대로 행사되고 있었다. 이러한 능상과 불경 풍조의 혁파 과정이 이른바 갑자사화였다.

갑자사화는 이러한 일련의 정치 상황이 중첩되는 가운데 구체적으로는 연산군 생모 윤씨의 폐비·사사 문제를 둘러싸고 1504년 3월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 전개 양상은 한편으로 폐비 윤씨에 대한 추숭(追崇)과, 또 한편으로는 당시의 폐위 과정에 관여한 신료들에 대한 탄압으로 나타났다. 즉 연산군은 20년 만에 알게 된 생모의 비극에 대한 원통함을 푼다는 이유로 여기에 관련된 모든 신료들을 논죄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연루자의 범위가 그만큼 넓었고 피화의 실상이 유례없이 참혹하였다.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통해 신료들을 이와 같이 탄압해 갔지만 실제로는 생모 윤씨의 폐비·사사의 전말을 즉위 직후부터 알고 있었다.

경과

사화로 인해 가장 먼저 화를 당한 인물은 폐비·사사 당시의 재상을 비롯한 승지·주서·사관·언서번역자(諺書飜譯者), 성종의 후궁인 엄씨(嚴氏)와 정씨(鄭氏), 이들의 아들인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 폐비 윤씨의 추봉존숭(追封尊崇)을 반대한 언관 등이었다. 또한 윤필상(尹弼商), 영의정성준(成俊), 좌의정이극균(李克均) 등 이 시기까지 연산군대의 정치 운영에 영향력이 지대했던 훈구 재상들도 화를 당했다.

갑자사화로 화를 당한 범위는 이미 무오사화로 처벌을 받은 인물에까지 확대되었다. 1504년 9월, 김굉필(金宏弼) 등 유배된 무오사화 피화인에게 벌을 더하여 참형(斬刑) 또는 중도부처(中途付處)에 처하였다. 이로 인해 강백진(康伯珍)·김굉필·성중엄(成重淹)·강겸(姜謙)·최부(崔溥)·이원(李黿) 등이 피화되었다(『연산군일기』 10년 9월 26일).

이와 같이 갑자사화와 관련된 신료의 처벌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폐비 윤씨의 원통함을 갚는다고 하여 피화의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고 피화인도 무오사화에 비해 크게 늘었다. 이를 계기로 신·구 재상을 축출하여 명실상부한 연산군의 친위 체제가 구축되었다. 군신 권력 관계의 파탄을 통해 극단적인 폭정을 드러낸 것이었다.

갑자사화 이후 무엇보다도 『경국대전』 체제의 개정과 변통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변통이라기보다는 변칙적인 법 운용이었다. 연산군은 한 시대의 제도는 시의(時宜)에 맞추어 고쳐야 한다는 적극적인 체제 변통의 입장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입장이 갑자사화 이후 정치 운영의 기본 전제가 되면서 무엇보다 언관의 언론 기능을 대대적으로 축소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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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28: 조선 중기 사림 세력의 등장과 활동』, 국사편찬위원회, 1996.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0: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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