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화문(敦化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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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정문.

개설

1405년(태종 5) 창건된 창덕궁은 규모가 작고, 아직 완벽한 모습을 갖추지도 못한 상태였다(『태종실록』 5년 10월 13일). 궁궐의 한계를 정하는 궁장(宮墻)도 1412년(태종 12) 5월 22일에서야 모두 갖추어졌다(『태종실록』 12년 5월 22일).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의 이름은 이때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돈화문의 건설을 거론하는 기사가 이때 처음 나오지만, 창덕궁의 동·서·남·북 문은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돈화문은 『중용(中庸)』의 “소덕천류(小德川流) 대덕돈화(大德敦化)”에서 따온 이름이다. ‘작은 덕은 흐르는 시내 같아도 큰 덕은 가르치고 이끄는 교화를 돈독히 하니 천지가 위대해진다.’ 하는 뜻이다. 왕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과 돈독하니, 궁궐을 드나드는 모든 관료들의 백성을 대하는 태도 또한 ‘덕(德)’을 잃지 말기를 당부하는 의미일 것이다.

위치 및 용도

궁궐 제도의 규범은 정문에서 주요 전각이 일직선상에 놓이고, 국왕은 남면해야 하므로 남향한 전각을 짓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더욱이 궁궐의 정문은 중앙에 놓여 전체적인 배치 구도상, 좌우 대칭의 무게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궁궐의 서남쪽에 치우쳐 놓여 있다. 궁궐의 정문에서 남쪽으로 뻗어 나간 주작대로가 형성되는 것 또한 고대부터 내려오는 궁궐 제도의 규범이다.

그러나 창덕궁은 궁궐 제도와는 무관한 배치 개념으로 궁궐을 놓았다. 창덕궁 창건 이전에 이미 종묘가 제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북쪽에 창덕궁이 들어앉은 만큼, 협소한 대지를 운용하는 방식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돈화문이 궁궐의 서남쪽으로 치우쳐 위치하게 된 것은 돈화문 앞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가야 하는 대로가 종묘를 관통해 나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살려 낸 운용의 묘였다고 추측된다. 궁궐문의 이용에 있어서도 운용의 묘가 있었다. 돈화문의 동쪽 가까이 단봉문(丹鳳門)이 위치해 있고 동쪽 가까운 곳에는 금호문(金虎門)이 위치해 있었다. 창경궁을 경계로 창덕궁의 동문은 건양문(建陽門), 서문은 경추문(景秋門)이다. 조정의 신료들은 금호문으로 드나들었지만, 대관은 반드시 돈화문으로 출입했다.

태종대 창건된 돈화문에는 종을 궁문에 달아 놓아 새벽에 종을 울려 신하들의 조회하는 일을 엄격히 하였다(『태종실록』12년 9월 15일). ‘새벽을 알리는 종이 울리니 닭이 울기 전에 왕은 벌써 일어나, 궐문이 열리고 왕이 어좌에 나오시니 조신들이 엄숙히 뜰에 엎드려 절하고 있다.’ 하는 윤회(尹淮)가 지은 「돈화문신종(敦化門晨鍾)」은 이러한 궁궐의 아침을 잘 표현하고 있다.

돈화문은 궁궐의 정문일 뿐 아니라 궁궐의 모든 행사에서 궁궐의 안과 밖을 나누는 기점으로 사용되는 공간이었다. 돈화문 안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고 병사들에게 음식을 내려 주기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태종 연간, 창덕궁 완공 후에 조영되었으며 이때에는 문루에 공덕을 새긴 종을 주조하여 매달았다. 이후 1450년(문종 즉위) 6월, 창덕궁에서 왕이 죽은 신하를 위한 사제(賜祭)를 행하면서 돈화문을 수리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6월 13일). 이때 명나라 사신이 조선으로 와 사제에 참례하였기 때문이었다. 1495년(연산군 1) 6월, 연산군은 돈화문 밖 좌우 행랑 가까이에 있는 집을 모두 철거시켜 담을 쌓고 돈화문의 규모를 장대히 하였으며, 모퉁이에 하마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을 비롯한 궁궐이 모두 소실되었을 때 돈화문도 함께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 창덕궁 복원과 함께 복원되었다.

1620년(광해군 12)에는 평상시와 같이 종을 주조하여 돈화문에 매달아 두라는 전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여전히 돈화문의 종은 유지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광해군일기』 12년 11월 15일). 1628년(인조 6)에는 돈화문이 기울어져 개수를 위해 살폈더니 추녀가 손상되어 수리가 시급한데, 추녀를 수리할 만한 큰 재목의 수급이 어렵다고 토로하고 있다. 1721년(경종 1)에는 돈화문의 동쪽 부연 위·아래층이 무너져 급히 수리하였다(『경종실록』 1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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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비원(祕苑) 정화 계획의 일부로 돈화문 해체 수리가 있었는데 이때 광해군대의 상량문을 발견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돈화문의 기단과 월대를 지표면과 동일하게 묻어 마차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평지로 만들었는데, 1996년 돈화문 복원 사업으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따라서 광해군대에 복원된 돈화문의 형태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형태

돈화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 우진각지붕에 다포식 가구를 한 장대한 문이다. 정면 5칸 중 가운데 3칸은 두 짝 판문으로 되어 있고 양쪽 칸은 벽으로 마감해 출입할 수 없도록 하였다. 「동궐도(東闕圖)」상의 돈화문 좌우에 놓인 행각은 문을 지키고 입직하는 군관들이 사용했던 수문장청인데, 지금은 궁장으로 바뀌었다. 또 「동궐도」에서 보이는 팔작지붕과 현재의 우진각지붕은 차이가 있는데, 광해군대의 돈화문 형태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궐도」의 돈화문을 그리면서 생긴 착오라 여겨진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24년(인조 2) 인조반정 초기에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이 유린당했다. 이괄은 돈화문을 도끼로 찍어 열고 들어갔는데 이후 인조는 이러한 위태로움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도끼 자국 난 돈화문을 개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1758년(영조 34), 평양 사람 권이형(權以亨)이 인장을 위조한 죄로 옥에 구속되어 10년이 되어 갔다. 사형이 내려지자 그의 아내 홍조이(洪召史)가 한양으로 와서 남편을 위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화문 밖에 엎드렸다. 한 달이 넘어가자 영조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조는 돈화문 밖에 여인이 엎드린 것을 이상히 여겨 승지(承旨)에게 물었고, 남편의 용서를 청하는 부인의 갸륵한 마음을 가상히 여겨 부인을 정려(旌閭)하고 남편은 사형을 감해 정배토록 하였다. 은혜를 입은 홍조이는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장례 때 흙을 져 날랐고,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제사 때도 돈화문 밖에서 엎드려 있었다. 영조는 뜻을 가상히 여겨 여인에게 후한 상을 내려 주었다(『영조실록』 34년 3월 25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궁궐지(宮闕志)』
  • 『담헌서(湛軒書)』
  • 『동문선(東文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심리록(審理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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