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英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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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과 비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합장릉.

개설

영릉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능으로, 합장릉의 형식으로 조성된 조선 최초의 왕릉이다. 세종은 먼저 승하한 소헌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나중에 자신도 함께 안치될 수 있도록 미리 수릉(壽陵)을 만들어 두었다.

조성 경위

1446년(세종 28)에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능인 헌릉(獻陵)의 서쪽 기슭에 영릉을 조성하였다(『세종실록』 28년 5월 5일). 영릉은 조선시대 왕릉 가운데 최초로 합장릉의 형식으로 조성했는데, 봉분 아래에 두 개의 석실을 만들고 그중 동쪽에 소헌왕후를 안장하였다. 그리고 서쪽에는 나중에 세종이 승하하면 안치할 수 있도록,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해 두는 무덤인 수릉을 두었다. 수릉을 이용한 합장릉의 형식은 이후 장릉(章陵), 융릉(隆陵), 건릉(健陵), 인릉(仁陵) 등에도 사용되었는데, 특히 조선후기의 왕릉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후 세조 연간에 영릉의 터가 좋지 않으므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대두되었으나, 서거정(徐居正)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 예종은 영릉을 천장할 편부를 의논하게 하고 1469년(예종 1)에 천장하였다. 이때 세조가 원릉의 석실이 유해무익(有害無益)하다 하여 유명으로 석실과 사대석을 쓰지 말라고 하였기에 영릉 또한 광릉(光陵)의 제도를 따르게 되었다.

조성 상황

옛 영릉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라 조성된 능으로, 조선시대 전기 능제(陵制)의 기본이 되었다. 다만 능의 석물은 병석(屛石) 가운데 영저(靈杵), 영탁(靈鐸), 지초(芝草) 문양을 배제하고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만 조각하였으며, 혼유석(魂遊石)의 고석(鼓石)을 5개에서 4개로 줄였다.

1469년에 여주군으로 자리를 옮긴 영릉은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과 석실을 두지 않고,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지는 회격릉(灰隔陵)으로 조성하였다. 『능원지(陵園誌)』에 따르면, 능 아래 35보(步) 거리에 정자각이 있었으며, 정자각 서쪽 8보 지점에는 수라청(水刺廳)이, 동쪽 8보 지점에는 수복방(守僕房)이 있었다. 망료위(望燎位)는 정자각 서북쪽 15보 거리에 세워졌으며, 홍살문은 안향청(安香廳)에서 252보 거리에 건립되었다. 또한 오늘날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자리에 연지(蓮池)가 조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홍살문 남쪽에 하나, 재실 앞 동남쪽 13보 거리에 또 하나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지의 규모는 길이 12보, 폭 11보이다. 안향청은 3칸이며, 재실은 6칸으로 전사청 앞에 있었다.

변천

합장릉은 대개 하나의 봉분 아래에 두 개의 현실(玄室)을 만들어 동쪽에는 왕후를, 서쪽에는 왕을 안치하는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영릉의 경우 소헌왕후가 세종보다 먼저 승하하였으므로 동쪽에 왕후를 안치하고, 서쪽은 뒷날 세종을 안치하기 위해 수릉으로 마련하였다.

옛 영릉의 석실 구조는 『세종실록』「오례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먼저 광중에 설치하는 지석(支石)은 석실을 축조하는 데 기초가 되는 부재(部材)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서는 길이는 1자 5치, 높이는 1자로 하되, 너비는 상황에 맞추어 적당히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 지석 위에는 동망(銅網)을 놓았는데, 양실(兩室)에 하나씩 두었다. 또 양쪽에 방석(旁石)을 설치했는데, 합장릉인 까닭에 단릉이나 쌍릉의 경우보다 약 2배나 컸다. 북우석(北隅石)은 단릉과 쌍릉의 경우 하나만 사용했으나, 영릉과 같은 동봉이석실에서는 두 개의 부재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그밖에 문비석과 문역석, 문의석 등도 설치하였다.

1469년에 여주로 천릉할 때는 병풍석과 석실을 두지 않고, 회격릉으로 조성하였다. 이후 단종의 장릉(莊陵)부터 세조의 광릉(光陵), 예종의 창릉(昌陵), 성종의 선릉(宣陵), 중종의 정릉(靖陵)에 이르기까지 여러 능이 이와 같은 회격릉으로 축조되었다. 그러나 회격릉의 제도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며, 다만 『주자가례(朱子家禮)』,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등에 단편적인 설명이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 왕릉의 부속 건물은 일반적으로 외금천교, 외연지, 재실, 지당, 금천교, 홍살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원보감(璿源寶鑑)』에 따르면 영릉의 경우에도 능역 입구 밖에 외연지가 있었으나, 현재는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관련 사항

세종 연간에는 『주자가례』를 비롯해 각종 유교 의례를 정비하였다. 특히 예치주의를 표방한 조선에서는 제례를 가장 중요한 의례로 인식하였으며, 건국 이후부터 세종대까지 정비된 예제를 『세종실록』「오례의」를 통해 일차적으로 집대성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유교 이념과 의례를 바탕으로 궁궐을 비롯한 종묘, 문묘, 왕릉 등을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능원지(陵園誌)』
  • 『선원보감(璿源寶鑑)』
  • 『영릉보토소등록(英陵補土所謄錄)』
  • 『주자가례(朱子家禮)』
  • 『증보사례편람(增補四禮便覽)』
  • 『춘관통고(春官通考)』
  • 목을수, 『고려·조선능지』, 문성당, 1991.
  • 은광준, 『조선왕릉석물지 상편』, 민속원, 1985.
  • 은광준, 『조선왕릉석물지 하편』, 민속원, 1992.
  • 김상협, 「조선 왕릉 석실 및 능상구조의 변천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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