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崔逸)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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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최일 |
한글표제 | 최일 |
한자표제 | 崔逸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숙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일지(逸之), 대은(大隱)『방목』 |
호 | 석헌(石軒), 석은(石隱)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15년(광해군 7) 5월 21일 |
사망 | 1686년(숙종 12) 정월 23일 |
본관 | 화순(和順) |
주거지 | 경기도 양성(陽珹): 경기도 양주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진위현(振威縣) 득면리(得冕里) |
증조부 | 최효원(崔孝源) |
조부 | 최잠(崔潛) |
부 | 최상현(崔象玄) |
모_외조 | 창녕조씨(昌寧曺氏): 조흥효(曺興孝)의 딸 |
처_장인 |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인(朴潾)의 딸 →(자녀)2남 2녀 |
자녀 | (1자)최봉거(崔鳳擧) (2자)최봉채(崔鳳采) (1녀)이상백(李相伯)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최일(崔逸) |
총론
[1615년(광해군 7)∼1686년(숙종 12) = 72세]. 조선 중기 인조~숙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병조 참의(參議)이다. 자는 일지(逸之)·대은(大隱), 호는 석헌(石軒)·석은(石隱)이다. 본관은 화순(和順), 거주지는 경기도 양성(陽珹: 양주)이다. 아버지는 좌참찬(左參贊)에 증직된 최상현(崔象玄)이고, 어머니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충의위(忠義衛)조흥효(曺興孝)의 딸이다. 증조부는 삼례 찰방(參禮察訪)최효원(崔孝源)이고, 조부 사재감(司宰監)주부(主簿)최잠(崔潛)은 양성(陽城) 의병장(義兵將)이었다. 최일은 구인후(具仁垕)의 조카사위이고, 천파(天坡)오숙(吳䎘)에게 배우다가, 계곡(谿谷)장유(張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33년(인조 11) 18세로 사마시(司馬試)에서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였다. 1636년(인조 14)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그해 겨울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만나서, 충청도 괴산(槐山)으로 피난 갔다가, 한 해가 지나 고향으로 돌아왔다.(『서계집(西溪集)』 권14「형조참판 최공일 묘갈명(刑曹參判崔公逸墓碣銘)」 참고. 이하 「묘갈명」 약칭.) 1646년(인조 24) 음보(蔭補)로 효릉참봉(孝陵參奉)이 되었다가, 그해 겨울에 정시(庭試)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2세였다. 1647년(인조 25)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에 보임되었다가,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로 옮겼다. 1648년(인조 26) 승문원(承文院)에서 아뢰기를, “본원의 참하관(參下官)은 현재 1원도 없습니다. 따라서 정시와 식년시(式年試) 양방(兩榜)에 급제한 사람들을 분관(分館)할 수가 없으니, 설서최일, 검열이후(李垕)·신혼(申混) 3인에게 우선 본원의 임무를 겸임하여 수행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분관시키게 하소서.” 하니, 인조가 그대로 따랐다.(『인조실록(仁祖實錄)』 참고.) 1649년(인조 27) 다시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었다. 그때 효종(孝宗)이 동궁(東宮)에 있었는데, 그의 강설을 좋아하여, 서연(書筵)에서 반드시 “설서는 앞으로 나와서 강설하라.”고 하였으므로, 일시의 동료 관원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묘갈명」 참고.) 그해 여름에 병조 좌랑(佐郞)으로 옮겼다가,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로 돌아왔는데, 세자 때 효종이 그의 강설(講說)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1649년 5월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 1650년(효종 1)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었는데, 유계(兪棨) 등이 묘호(廟號)에 대해 논하다가 귀양을 가게 되자, 대사헌(大司憲)남선(南銑)과 같이 그 명령을 거두도록 청하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그해 홍천현감(洪川縣監)에 임명되어, 5년 동안 홍천 수령으로 있었는데, 그 고을 백성들이 그를 추모하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1654년(효종 5)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에 임명되었다가, 1655년(효종 6) 충청도 추쇄 어사(忠淸道推刷御史)로 나가서 주인을 배반하고 내수사(內需司)에 투탁(投託)한 노비를 추쇄하여 그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런데, 내수사에서 크게 반발하여, 1656년(효종 7)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 1659년(효종 10) 한산군수(韓山郡守)에 임명되었는데, 그 고을의 생도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고, 부모의 장례를 치르면서 술을 마시는 것을 금지하였다.(「묘갈명」 참고.)
현종 시대의 활동
1660년(현종1) 사헌부 헌납(獻納)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는데,『효종실록(孝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61년(현종 2) 전라도 장성부사(長城府使)가 되었는데, 흉년이 들자 죽을 쑤어 기민(饑民)에게 먹였으나, 굶주리다가 병든 사람 두 명이 장성 고을의 경내에서 죽었다. 어사(御史)김수흥(金壽興)이 이것을 조사하여 보고하니, 파직당하여 경안역(慶安驛)에 장배(杖配)되었다. 1664년(현종 5)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으로 나갔다가, 1665년(현종 6) 사간원 헌납으로 소환되어, 종부시(宗簿寺)정(正)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참고.) 1666년(현종 7)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을 거쳐, 제용감(濟用監) 정이 되었다. 각 관청의 물품출납을 서리(胥吏)에게만 맡기기 때문에 미포(米布)를 출납하면서 아전들의 농간을 부리므로, 그는 반드시 책임자의 입회 아래 출납하도록 하였다. 그 뒤에 통례원(通禮院)에 들어가서 우통례(右通禮)·상례(相禮)를 역임하였다.(「묘갈명」 참고.)
1667년(현종 8)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사복시(司僕寺) 정을 거쳐, 다시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 이때 안추원(安秋元)이란 자가 청(淸)나라에 포로 되었다가 본국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다시 몇 년이 안 되어 다시 청나라로 달아났는데, 그 일이 발각되어 청나라 사신이 와서, 청나라 포로를 받지 않겠다는 약속을 저버렸다고 위협하므로, 현종이 책임을 지고 벌금으로 금화(金貨)를 보내기로 합의하였다. 대간(臺諫)의 언관(言官)들이 삼공(三公)의 책임을 탄핵하였는데, 최일은 스스로 반성하기를, “내 자신이 그때 언관의 직책에 있으면서 그 일을 바로잡지 못하였는데, 다른 사람을 탓할 것이 없다.”고 하고, 대간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간의 동료들이 그가 일부러 회피한다고 탄핵하여, 해운판관(海運判官)으로 좌천되었다.
현종이 최일을 보호하여, 동궁(東宮)을 책봉(冊封)한 관원이라고 하여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하고, 특별히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 그러나 대간에서 또다시 최일을 탄핵하니, 현종이 노하여 거론한 자를 배척하였다.(「묘갈명」 참고.) 1668년(현종 9) 어버이를 봉양하려 한다 하고 대간의 탄핵을 피하여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나갔으나, 그 고을 토호(土豪)에게 무함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1671년(현종 42) 돈녕부(敦寧府)도정(都正)이 되었다가, 다시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현종개수실록』 참고.) 1672년(현종 13) 호조 참의가 되었다가, 1673년(현종 14) 어버이 봉양을 위해 자청하여 서산군수(瑞山郡守)로 나갔다. 그때 해안의 방어에 유의하여 배를 만들고 병기를 수리하여, 해안의 방비를 빈틈없이 하였다.
숙종 시대의 활동
1675년(숙종 1) 순무사(巡撫使)최관(崔寬)이 서산 군수최일의 치적(治積)을 보고하니, 숙종이 특별히 옷감 한 벌을 하사하고, 근무 기간을 1년 연장하였다.(「묘갈명」 참고.) 1677년(숙종 3)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우승지(右承旨)·좌승지(左承旨)로 전직되었다, 그 뒤에 형조 참의가 되었는데,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다. 그때 3년 동안 벼슬하지 않고 상중에 있으면서, 처음에 김포(金浦)에 살다가 1679년(숙종 5) 파주(坡州)로 이사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양근(楊根: 양주)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떠돌아다니면서 생활하느라고 생계가 쪼들려서 거친 음식의 끼니마저 제대로 잇대지 못하였다.
1680년(숙종 6) 3월 형방(刑房)승지(承旨)에 임명되었는데, 밤중에 변고(變告)의 글이 들어왔다. 서인(西人) 김석주(金錫冑)가 남인(南人)영의정허적(許積)의 아들 허견(許堅)이 종실 복창군(福昌君) 3형제와 같이 역모(逆謀)한다고 고발하여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사건이 워낙 창졸간에 발생하여, 계사(啓辭)가 급하게 자주 들어왔으나, 형방승지최일이 차분하게 대응하여 끝내 적체된 일이 없었다. 이때 사람들이 일을 잘 처리 한다고 그를 칭찬하였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허적과 윤휴(尹鑴) 등이 죽음을 당하고, 남인 정권은 실각하였다. 서인이 정권을 잡아, 김수항(金壽恒)이 영의정이 되고, 김석주가 우의정이 되었다. 최일이 <경신대출척> 때 형방 승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죄인을 국문(鞫問)할 때 죄인을 심문하면서 숙종을 대신하여 죄인을 심문하고, 또 죄인의 공초(供招)를 임금에게 바로 보고하였다. 그 뒤에 그는 병이라고 핑계하고 승지를 사임하였다가,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1681년(숙종 7) 중궁(中宮)이 가례(嘉禮)를 치렀는데, 그때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 특진관(特進官)이 되어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니, 숙종이 특별히 담비가죽 모자를 하사하였다. 1682년(숙종 8) 병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는데, 영부사(領府事)송시열(宋時烈)이 효종 대왕을 높이도록 상소하면서 최일 등과 의논하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 참고.) 1684년(숙종 10) 경연에 입시하였을 때 숙종이 한재(旱災)를 구제하는 방책에 대해 묻자, 최일이 대답하기를, “김환(金煥)의 죄를 처벌하지 않고, 어떻게 인심을 승복시켜서 하늘의 뜻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서인의 과격파 김환의 처벌을 촉구하였다. 그 뒤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참판으로 옮겼다. 1685년(숙종 11) 숙종의 특명으로 형조 판서이사명(李師命)과 참판최일을 함께 파직하였다.(『숙종실록』 참고.) 1686년(숙종 12) 정월 23일 가벼운 감기 증세로 누워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2세였다.(「묘갈명」 참고.)
성품과 일화
최일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키가 크고 수염이 성글며, 머리털을 길러서, 묶은 머리털을 풀면 발뒤꿈치까지 닿았다. 성품은 우아하고 중후하며, 말이 적었다. 지조가 확고하여, 이익이나 세력 때문에 자신이 지키는 신념을 바꾼 적이 없었다.(「묘갈명」 참고.)
그는 나이 8세 때에 『18사략(十八史略)』을 배웠는데, 얼마 안 지나서 스스로 구두(句讀)를 뗄 줄 알아서 가르치는 스승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다. 나이 12세 때에 천파오숙에게 수업하였는데, 오숙이 그의 뛰어난 재주를 사랑한 나머지 그의 아우 오핵(吳翮)과 함께 학업을 닦도록 하였다. 그 뒤에 진사 시험과 대과(大科)에 응시하였을 때 두 사람이 모두 같은 방(榜)에 합격하였다. 나이 17세 때 계곡장유를 찾아가서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세 때에 성균관에서 제술(製述)을 시험볼 때 「상한사부(上漢槎賦)」를 지어서 1등을 차지하여, 유생들이 한때 그 글을 돌려가며 애송(愛誦)하였으므로, 그 명성이 크게 드러났다. 그 이듬해에 사마시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였다.(「묘갈명」 참고.)
효성(孝誠)과 우애(友愛)를 천성으로 타고나서, 어머니를 봉양할 때 정성을 다하였고, 여러 아우들을 독실이 사랑하였고, 친족과 돈독히 화목하였다. 본래 집안이 빈한하고 몸소 검소하여, 방안에 헤어진 돗자리와 질그릇 동이뿐이었고, 집안에 좋은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으나, 의복과 음식이 서민과 다름이 없었다. 관직을 그만두면, 쌀이 떨어져서 죽으로 나날을 보냈지만, 태연히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번 주군(州郡)의 수령을 지냈지만, 식량을 남에게 꾸어서 조석의 끼니를 꾸려나갔고, 자기의 집 한 칸도 마련하지 못하고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조정에 나가서 벼슬한 지 40년 동안 청렴한 지조가 한결같아서,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옷상자에 남아있는 옷 한벌이 없었다. 그는 노복(奴僕)을 너그럽게 대하여 집안에 종을 매질하는 소리가 나지 않았고, 노복들도 매를 맞는 것을 수치로 여기었다. 그의 문전에는 청탁(請託)하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묘갈명」 참고.)
그는 항상 『심경(心經)』이나 성리학(性理學) 등에 관한 글을 손수 썼다. 일찍부터 재주가 있다는 소문이 나서, 그와 사귀고 싶어 하는 선비들이 많았으나, 시종 그와 함께 사귄 사람은 오직 이경휘(李慶徽) 형제, 서필원(徐必遠)·이상진(李尙眞) 등 몇 사람뿐이었다. 독서를 좋아하여, 유교의 육경(六經) 등 여러 서책(書冊)들을 어느 하나라도 정밀히 익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찍이 경연에 입시하여, 『주역(周易)』을 강론(講論)하였는데, 이것을 들은 청성(淸城)김석주가 경연에서 물러 나와서 감탄하기를, “최일의 경학(經學)은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다.(「묘갈명」 참고.)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진위현(振威縣) 남쪽 득면리(得冕里)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서계(西溪)박세당(朴世堂)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서계집(西溪集)』 권14「형조참판 최공일 묘갈명(刑曹參判崔公逸墓碣銘)」) 최일이 세상을 떠난 지 9년 뒤에 1695년(숙종 21) 조정에서 청백리(淸白吏)를 선발할 때 현석(玄石)박세채(朴世采)가 4촌 박세당에게 편지에다 최일의 이름을 써서 보내면서 “의당 청백리 선발에 들어갈 것으로 믿는다.”고 하였다. 그때 반대파가, “최일이 가끔 죽을 먹은 것은 집안이 빈한하여 그런 것이지, 그가 특이한 지조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선발되지 못하였으므로, 당시의 여론이 이를 애석하게 여기며, “경대부(卿大夫)가 빈한하게 살면 청렴결백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묘갈명」 참고.)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는 첨정(僉正)박인(朴潾)의 딸이고, 구인후의 질녀(姪女)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낳았다. 큰아들 최봉거(崔鳳擧)는 진사이고, 둘째 아들 최봉채(崔鳳采)는 남의 후사(後嗣)로 나갔으며, 둘째 딸은 통덕랑(通德郞)이상백(李相伯)에게 시집갔다.(「묘갈명」 참고.)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백호전서(白湖全書)』
- 『서계집(西溪集)』
- 『약천집(藥泉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정재집(定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