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관(分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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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를 평가하여 3~4곳의 문한관서에 나누어 임시직에 제수하던 인사제도.

개설

분관은 문과 급제자 중 실직에 제수된 자를 제외한 모두를 그 재품 등을 평가하여 문한관서인 승문원(承文院)·성균관(成均館)·교서관(校書館)이나 이에 추가하여 홍문관(弘文館)의 임시직인 권지(權知)에 제수한 인사제도였다. 분차된 관인은 이 권지직에 재직하다가 전임관이 승진하거나 다른 관아로 이동된 후 차하위 관직자가 차례로 승진된 후에 결원이 된 관직에 제수되었다. 권지 재직 기간은 조선초에는 그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지만, 세조대 이후에는 급제자가 증가하고 인사 적체가 점차 증가하면서 10여 년이나 실직에 제수되지 못하고 퇴관하기도 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경제육전』 원전에서는 33명의 문과 급제자 중 1등인 을과(乙科) 1명은 종6품직을 주고 2명은 정7품, 3명은 종7품을 주게 하였다. 병과(丙科)는 모두 정8품과 종8품을 주고, 진사는 정9품과 종9품직을 주어 모두 경관(京官)과 외관직(外官職)에 등용하게 하였다. 이 법은 신진 관리의 등용문으로서 과거의 역할을 크게 확대하는 동시에 조선건국 초기 신진 사류를 대거 등용함으로써 정계 개편을 이루고, 정도전·조준 파가 추진하는 개혁정책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기성 정치 세력의 반발을 야기하였다. 관직이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급제자 모두를 등용한다는 것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장기적인 제도로 운영하기도 불가능하였다. 이에 즉시 서용하는 을과 3명 외에는 삼관(三館), 즉 성균관·예문관·교서관의 임시직인 권지에 나누어 소속시켜 근무하게 하는 법을 세웠다. 이 법이 곧 분관-삼관분관이었다. 이 법의 제정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1410년(태종 10) 좌사간대부유백순(柳伯淳) 등이 올린 상소에 과거 급제자가 삼관의 권지로 분관해서 6·7년이 지난 후에 9품을 제수하고 성균관은 8년, 예문관과 교서관은 다시 4년이 지나야 6품에 승진시킨다고 언급하고 있었다(『태종실록』 10년 10월 29일). 이 기사는 분관법이 시행된 지 거의 10년 이상이 되었음을 암시하므로 정종이나 태종이 즉위하던 초에 분관법이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내용

1440년에 이조(吏曹)에서 분관의 기준으로 나이가 젊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으로 골라 임명하자는 건의를 하였다. 그 후 급제자의 나이와 재능을 고려해서 분관하였다. 나이가 젊고 총명한 급제자는 일차적으로 승문원에 배정하였다. 나이가 있고 성숙한 인물은 성균관에, 박식하고 고사(古事)에 달통한 인물은 교서관에 배정하였다. 경학에 뛰어난 인물은 홍문관에 배정하였다.

인물을 평가해서 분관할 때에는 급제자 명단을 한 줄로 쓴 다음 삼관의 박사 세 사람이 채점하게 하였다. 여기서 3점을 얻으면 승문원, 2점을 얻으면 성균관, 1점을 얻으면 교서관에 보냈다. 이것을 다시 도제조가 검토해서 수정하고, 이조에 보내면 이조에서 왕에게 아뢰고 삼관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합격자 모두가 분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분관에서 불합격한 사람은 다음을 기다리는데, 이들은 미분관인이라고 하였다.

변천

분관은 처음에는 삼관 권지에 분차되었지만, 1478년(성종 9) 홍문관이 설치되면서 홍문관이 분관 관아로 추가되었다. 이로써 삼관분관이 홍문관·성균관·승문원·교서관의 사관(四館)분관으로 변경되었고, 이것이 조선말까지 그대로 계승되었다. 조선후기가 되면 문벌이 작용하면서 분관도 문벌에 따라 출세에 유리한 관서를 배정받게 되었다. 문과의 경우는 홍문관·승문원·성균관·교서관 순이 되었고, 교서관은 모두가 꺼렸다. 이처럼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당파와 문벌이 중시되면서 심사원이 과거 급제의 공정성을 문제 삼거나 인물의 평가, 분관에 의견 대립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기한 내에 분관을 시행하지 못하거나 심사 자체가 깨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다. 이런 경우 관원을 처벌하였지만 잘 해결되지 않았다. 분관이 된 다음에도 분관이 공정하지 않다고 개정 요청이 올라오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분관이 3년씩이나 지체되는 사례도 발생하자 영조는 1727년 급제자가 삼관 권지로 복무하지 않으면 청직(淸職)에 등용할 수 없다는 법을 세웠다(『영조실록』 3년 9월 25일). 하지만 이 규정은 법전에 수록되지 못하였다.

19세기가 되면 분관에 대한 신분제적 제한을 완화하여 1851년 문벌가의 서얼이 문과에 급제하면 승문원에 분관하고, 무과에 급제하면 선전관으로 임용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는 『대전회통』에 수록되었다. 평민 세력이 성장하고 양반층이 확대되면서 문벌이 없는 사람이 중국에서 도래한 성이라는 것을 내세워 분관 대상이 되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이에 분관을 받지 못하고 적체되는 인원이 더 심해졌다. 1864년에 이를 금지시켰으나 잘 시행되지 않았다. 결국 분관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과거제가 폐지될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이렇듯 분관법은 조선후기에는 처음 실시될 때 ‘과거 급제자의 재품을 보아 분관시키고, 급제자의 관직 적체를 해소한다.’는 목적과는 달리 급제자의 재품보다도 문벌과 가문을 살펴 분차하고 실직에 제수하는 등으로 변질되어 운영되었다. 이에 이르러 분관은 가계가 불확실한 사람이나 평민의 관직 진출을 제약하고 반면에 양반 자손의 관직 진출과 특권을 조장하는 한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이성무, 『개정증보 한국의 과거제도』, 집문당, 1994.
  • 이성무, 『조선 초기 양반 연구』, 일조각, 1980.
  • 임용한, 『조선 전기 관리 등용 제도 연구』, 혜안,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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