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위(忠義衛)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충의위 |
한글표제 | 충의위 |
한자표제 | 忠義衛 |
상위어 | 오위(五衛) |
관련어 | 삼공신(三功臣), 오대손(五代孫), 충좌위(忠佐衛)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김종수 |
폐지 시기 | 1894년 갑오개혁 무렵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충의위(忠義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2년 2월 9일, 『세종실록』 12년 2월 19일, 『세종실록』 12년 1월 22일, 『숙종실록』 12년 6월 3일, 『영조실록』 18년 11월 23일 |
조선시대에 3공신 자손을 우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중앙군으로서 오위(五衛)의 충좌위(忠佐衛)에 소속되었던 병종(兵種).
개설
1418년(세종 즉위) 11월에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佐命) 등 3공신 자손들이 소속하도록 만들어진 병종(兵種)이다. 근무 연한은 18세 이상 60세까지였으나 자신들이 원하면 더 근무할 수 있었다. 이들은 주로 국왕의 측근에서 시위·호종하는 업무에만 종사했으며, 다른 관직을 겸대(兼帶)하기도 했다. 충의위의 가장 큰 특혜는 과거와 입사(入仕)에 있었다. 성균관의 생원·진사 들은 원점(原點) 300점을 받아야 문과초시인 관시(館試)에 응시할 수 있었는데, 충의위에 입속한 생원·진사들은 100~150점만 따면 가능했다. 문과에 합격하는 것보다 충의위를 통하는 것이 출세가 빨랐으므로 생원·진사들은 여기로 몰리기도 하였다. 재능에 따라 거관(去官) 후에 정3품까지 오를 수 있었는데, 관직이 부족했기 때문에 성종 이후부터는 수문장(守門將)·능참봉(陵參奉) 등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충의위는 충찬위(忠贊衛)·파적위(破敵衛)와 함께 5위 가운데 충좌위에 속했다. 충의위는 장번(長番)으로서 체아직(遞兒職)은 종4품부터 종9품까지 53과(窠)가 설치되어 있었다.
내용 및 변천
충의위는 3공신 자손을 위하여 설치한 군사 조직이다. 3공신 자손 중에 유능한 사람들은 양반 관료로 즉시 발탁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충의위의 체아직을 받아서 그 체아록(遞兒祿)을 받다가 기회를 보아 다른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충의위에는 18세 이상의 공신 자손이면 누구나 무시험으로 입속(入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 공신 자손의 충의위 입속 규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공신 첩자손(妾子孫)의 충의위 입속 여부가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1430년(세종 12) 2월 한 달 동안 왕과 신료들 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세종은 공신의 적처(嫡妻)에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비록 천첩자(賤妾子)라도 충의위에 입속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고, 신료들은 그렇게 되면 족속이 섞이고 존비(尊卑)가 문란하게 되므로 불가하다는 주장이었다(『세종실록』 12년 2월 9일) (『세종실록』 12년 2월 19일). 세종과 신료들 간의 논란 끝에 공신 적실(嫡室)에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양첩자(良妾子)가, 양첩자도 없을 경우에는 천첩자승중자(賤妾子承重者)가 충의위에 입속할 수 있도록 결정되었다.
충의위는 체아직을 받는 군인이므로 국왕의 시위(侍衛)와 호종(扈從) 등 중앙군으로서 일정한 임무를 수행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충의위를 설치함은 군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신의 후손을 비호(庇護)하고자 함이었다.”(『세종실록』 12년 1월 22일)라고 한 세종의 말과 같이 충의위는 공신에 대한 보공(報功)을 위하여 설치된 병종이었으므로 어려운 군무(軍務)는 맡지 않았고, 국왕 측근에서 시위하는 영예로운 업무에만 종사하였다. 또 충의위는 다른 관직을 겸대하기도 하고, 국가에서는 이들의 편의를 고려하여 시위·호종의 임무마저 면제해주기도 하였다. 즉 충의위는 공신 자손이라는 이유로 여러 가지 특전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공신 자손들은 충의위에 들어가 시위 업무에 종사하여 자급(資級)을 올려 받고 이것을 근거로 과거에 합격하거나 다른 관직으로 옮겨 갈 때는 거기서부터 직급을 올려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문과에 합격하는 것보다 충의위를 통하는 것이 출세가 빨랐으므로 생원·진사들은 여기로 몰리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군역 제도의 모순 속에서 충의위로 들어오려는 자들이 폭증하였다. 문서를 위조하고 신분을 속여 충의위로 들어오는 모속(冒屬)이 대거 발생하여 사회의 고질적 병폐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686년(숙종 12)에 국왕은 “공신(功臣) 봉사손(奉祀孫) 외의 중자(衆子)로 충의위에 있는 자는 5대(代)를 한도로 하여 구전(口傳)으로 제수케 하라.”(『숙종실록』 12년 6월 3일)라는 왕명을 내렸다. 봉사손 외에는 공신의 5대손에 한하여 충의위 입속을 허락한다는 것이다. 3공신의 5대손은 이 무렵이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규정은 영조대에 들어와 조금 완화되었다. 1742년(영조 18)에는 충의위 입속 공신 자손의 범위를 9대로 변경하였던 것이다(『영조실록』 18년 11월 23일). 19세기 이후에도 충의위는 존속하다가 갑오개혁 무렵 없어지게 된다.
의의
충의위는 3공신의 자손을 위하여 만든 병종이다. 이들이 충의위에 입속하는 것은 자원(自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입속 여부는 자격을 구비한 공신 자손 자신이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공신 자손들에게 많은 특전을 주면서 충의위에 입속하게 한 것은 양반에게 특권을 보장하고 그들로 하여금 양반사회를 유지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閔賢九, 『朝鮮初期의 軍事制度와 政治』, 韓國硏究院, 1983.
- 閔賢九, 「近世朝鮮前期軍事制度의 成立」, 『韓國軍制史-近世朝鮮前期篇-』, 陸軍本部, 1968.
- 車文燮, 「鮮初의 忠義·忠贊·忠順衛에 대하여」, 『史學硏究』19, 1967.
- 千寬宇, 「朝鮮初期 五衛의 兵種」, 『史學硏究』18, 196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