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거(尹元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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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1년(선조 34)∼1672년(현종 13) = 72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유일(遺逸).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자는 백분(伯奮)이고, 호는 용서(龍西)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거주지는 충청도 이산(尼山)이다. 아버지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윤전(尹烇)이고, 어머니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첨지(僉知)윤환(尹晥)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윤창세(尹昌世)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윤돈(尹暾)이다. 윤순거(尹舜擧)·윤선거(尹宣擧) 형제의 4촌이고, 대사헌윤황(尹煌)의 조카이기도 하다,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의 문인으로 남인(南人)권시(權諰)·윤휴(尹鑴)와 절친한 사이였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에 인재를 등용하기 위하여 실시한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초시(初試)의 초장(初場)과 종장(終場)에는 모두 합격하였으나, 때마침 할머니의 상을 당하면서 복시(覆試)에 응시하지 못하였다. 1625년(인조 3) 나이 25세 때 4촌 형 윤순거 형제와 함께 김장생의 문하에 찾아가 수학하였는데, 김장생이 그들을 허심탄회하게 대해 주었다.[『용서문집(龍西文集)』 권하 「용서선생행장(龍西先生行狀)」 이하 「윤원거행장」으로 약칭]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인조는 강화도(江華島)로 피난을 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분조(分朝)를 이끌고 남쪽 전주(全州)로 내려갔다. 그때 윤원거는 고향 이산에 있다가 4촌 형 윤순거와 함께 그 고을 유생(儒生)들을 모아 소현세자 일행을 맞이하였다. 이때 소현세자가 대신 이원익(李元翼)으로 하여금 오랑캐를 방어할 대책을 유생들에게 물었는데, 윤원거는 공주(公州)의 산성(山城)이 천연의 요새이므로 이를 이용하여 적을 방어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이원익이 좌우를 돌아보고 윤원거의 이름을 물어보고, 말하기를, “전에도 그 이름을 들었지만, 오늘 만나보니, 참으로 훌륭한 선비다” 하였다.[「윤원거행장」]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의 양과(兩科)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3세였다.[『방목(榜目)』]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다가, 대과(大科)에 응시하였으나 낙방(落榜)하였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성균관 친구들과 상의하기를, “오랑캐의 선봉은 1백여 기(騎)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들을 공격하여 모두 다 사로잡는다면, 오랑캐들의 기를 꺾을 수 있다”고 하고, 인조를 만나 군사를 얻어 이를 실행하려고 하였다. 이때 아버지 윤전은 세자시강원 필선으로서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을 모시고 먼저 강화도로 피난을 갔는데, 다른 사람들은 가족을 데리고 함께 강화도로 피난 갔지만 그는 가족을 데리고 강화도로 가지 않았다. 대신 강화도로 떠나기 전 아들 윤원거에게 부탁하기를,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이산으로 내려가서 병란을 피하라”고 하였으므로, 윤원거는 가족을 데리고 고향 이산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웃 고을 충청도 논산의 연산(連山)에 살던 스승 김집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가서, 의병을 모집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1637년(인조 15) 1월 강화도가 오랑캐 군사에게 함락되고, 소현세자빈과 봉림대군(鳳林大君) 등이 오랑캐에게 사로잡히자 아버지 윤전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윤원거는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강화도로 달려가서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 이산의 선영에 반장(返葬)하였다. 그리고 묘소 아래 움막집에서 기거하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奠)을 드리고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통곡하였다. 3년 상복을 벗은 뒤에는 오랑캐에게 항복한 조정에 나가서 벼슬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세상에 나갈 뜻을 버렸다.

그는 고향 이산에 있는 노성(魯城)의 동쪽이며, 계룡(鷄龍)의 서쪽이 되는 곳에 새로 터를 잡고 서실(書室)을 지은 후에 여생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4촌 형 윤순거와는 서로 의기가 투합하였으므로, 함께 유교 경전(經典)의 뜻을 토론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들은 집안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으므로, 가끔 밥 한 그릇, 마실 물 한 잔도 없을 때가 있었으나, 윤원거는 하루 종일 꼿꼿이 앉아서 마음을 비우고 책을 읽으면서 하루를 지내기도 하였다. 1646년(인조 24) 충청도 연산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글을 읽는 서실과 거처하는 집이 서로 가까워서 종유(從遊)하기가 더욱 편리하였다.[「윤원거행장」]

효종(孝宗)이 즉위한 후 1653년(효종 4) 제릉참봉(齊陵參奉)이 되었다가, 1656년(효종 7)에는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가 되었다. 그리고 1658년(효종 9) 조복양(趙復陽)의 천거로 공조 좌랑(佐郞)에 임명되고, 1659년(효종 10)에는 공조 정랑(正郞)이 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윤원거행장」]

현종 시대 활동

1659년(현종 즉위년) 5월 효종이 승하하자, 윤원거는 궐문 밖에 나아가 분곡(奔哭)하고 동교(東郊)에서 효종의 상여를 호위하며 곡을 하면서 전송했다. 이때 종부시(宗簿寺)주부(主簿)성균관(成均館) 사업(司業)에 임명되었으나, 숙배(肅拜)하지 않고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윤원거행장」] 이어 그해 10월에도 세자시강원 사업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현종개수실록』 즉위년 10월 21일)

1660년(현종 1) 5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어, 소명(召命)까지 받았으나 사장(辭狀)을 올려 체직되었다.(『현종실록』 1년 5월 25일) 그리고 임금이 또 다시 사헌부 지평으로 불렀을 때에도 그는 변란에서 죽지 못하고 살아남은 사람이므로 벼슬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임금이 윤허하지 않자 다시 상소하여 사양하였고, 현종이 우대하는 비답(批答)을 내리며 거듭 소명하였으나, 그 뜻을 꺾지 않고 계속하여 사양하는 글을 올리니 마침내 체직되었다.

1661년(현종 2)에는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는 글을 올려서 체직되었다.[「윤원거행장」] 고향 이산에는 예전부터 보인당(輔仁堂)이란 전각이 있어서 선비들이 뜻을 품고 수련하던 곳으로 삼았었다. 그런데 오래전에 전각이 허물어져 퇴락하였으므로, 그는 윤순거와 상의하여 이를 중수하면서 동서의 양재(兩齋)를 지었다. 이때에 이르러 동재(東齋)가 완공되니, 그는 마을의 여러 수재들을 모아 이곳에서 거처하게 하면서 규율을 세워 책을 읽고, 매년 봄가을로 이곳에서 숙식하면서 심신을 수련하였다.[「윤원거행장」]

1663년(현종 4) 세자시강원 사업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1664년(현종 5) 네 번째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는 글을 올려서 체직되었다.[「윤원거행장」],(『현종실록』 4년 12월 18일),(『현종실록』 5년 2월 2일) 1665년(현종 6) 충청도 부여(夫餘)에 있는 가림(嘉林)의 입택(笠澤)으로 이사하였는데, 입택은 구졸 민진양(閔晉亮)의 별장이었다. 그는 민진양과 친분이 매우 두터웠으므로 강호(江湖)의 명승지를 4년 동안 빌려서 살다가 고향 이산으로 돌아왔다.[「윤원거행장」]

1667년(현종 8) 현종이 온천(溫泉)에 거둥하면서, 그를 사도시(司䆃寺)정(正)으로 승진시켜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윤원거행장」] 좌참찬(左參贊)송준길(宋浚吉)은 윤원거를 비롯한 윤문거·윤선거 형제가 모두 학행이 있다고 차자(箚子)를 올렸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이를 임금에게 아뢰니, 1668년(현종 9) 12월 현종은 그들 형제를 모두 부르도록 특별히 유시(諭示)하고,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게 그들이 서울로 올라올 때 말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병을 이유로 사양하는 등 모두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다.(『현종실록』 9년 12월 28일) 1670년(현종 11) 4월 세자시강원 진선(進善)에 임명되어 명소(命召)하였으나, 그해 8월 사양하고 세자를 보양하려는 뜻을 소장으로 진달하자 현종이 우대하여 비답하였다.(『현종실록』 11년 4월 16일),(『현종실록』 11년 8월 17일)

1672년(현종 13) 1월 병이 났는데 여러 달이 지나도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이때 4촌 동생인 윤문거가 병문안을 와서 십여 일을 머물며 함께 시서(詩書)를 이야기하고 도의(道義)를 강론하였는데, 그는 병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기뻐하였다. 여름이 지나면서 병이 갑자기 악화되자,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내 나이 금년에 일흔 둘이니, 이제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느냐” 하고 말하기를, “근래에 부허(浮虛)하는 것이 습성이 되어 기록할 만한 행실이 없는데도 반드시 비갈(碑碣)을 세우고, 조금만 문명(文明)이 있어도 꼭 문집(文集)을 내려고 하는데,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절대로 이런 짓을 하지 말라” 하였다. 4촌 조카 윤증이 대답하기를, “저들처럼 헛된 자랑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이런 말씀이 불가할 것이 없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모두 폐기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비록 겸손하셔서 이런 말씀을 하시지만, 후인들이 아마도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그가 머리를 가로 내저으며 기뻐하지 않았다. 7월 12일 이산의 본가(本家) 정침(正寢)에서 운명하니, 향년이 72세였다.[「윤원거행장」]

윤원거는 젊어서 시 짓기를 좋아하였는데, 격조가 높고 운치도 청초하였다. 그러나 시나 문장을 저술하는 것이 공연히 심력(心力)만 허비하는 것으로 여겼으므로, 말년에는 시와 문장을 짓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가 죽은 뒤에 아들들이 시문(詩文)을 수습하여 『용서문집(龍西文集)』 4권 2책을 편찬하여 집에 보관하였다.

호란(胡亂)과 윤전⋅윤원거 부자

1627년(인조 5) 1월 후금(後金)의 아민(阿敏)이 3만 명의 팔기병(八旗兵)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공략한 후, 이어 용천(龍川)과 선천(宣川)을 거쳐 청천강(淸川江)을 넘었다. 광해군(光海君) 때 명(明)나라를 돕기 위하여 원정군을 거느리고 갔다가,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후금에게 항복한 강홍립(姜弘立) 등이 ‘전왕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걸고 후금의 오랑캐 군사를 안내하여, 안주(安州)·평산(平山)·평양을 점령하고 황주(黃州)를 공격하였다. 조선에서는 도원수(都元帥)장만(張晩)이 후금의 아민 군사와 싸웠으나, 오랑캐의 기병(騎兵)을 감당할 수가 없었으므로 평산에서 패배한 뒤 후퇴를 거듭하다가 개성까지 밀리게 되었다. 이에 인조는 비빈(妃嬪)과 신하들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피난 가고, 소현세자는 분조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가서, 후방에서 군사를 조달하고 군량미를 공급하도록 하였다.

그때 윤원거는 고향 충청도 논산의 이산에 있다가 4촌 형 윤순거와 함께 그 고을 유생들을 모아 소현세자 일행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기다려 세자 일행을 맞이하였다. 분조의 대신 이원익이 소현세자의 명령을 받들어 여러 유생들을 인견(引見)하고 시무(時務)에 대해 물으니, 윤원거가 나서서 “공주(公州)에는 장강(長江)의 천연 요새가 있으니, 지금은 공주산성(公州山城)을 굳게 지키고, 군졸을 모집하여 강화도로 나아가서 조정을 후원할 계책을 세워야합니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물러나서 자기의 안전만을 도모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또 그는 군무(軍務)에 대해서도 긴절한 몇 가지 방책을 말하니, 이원익이 좌우를 돌아보고, 그 성명을 물어본 뒤에 말하기를, “전에도 이름을 들었지만, 오늘 만나보니, 참으로 훌륭한 선비이다”고 하였다.[「윤원거행장」]

황주에 이른 후금의 아민은 부장 유해(劉海)를 강화도로 보내 강화 조약을 맺었다. 그 조약의 내용은 먼저 명나라의 연호 ‘숭정(崇禎)’ 대신에 청(淸)나라 연호 ‘천계(天啓)’를 사용하며,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청나라에 보내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兄弟之國]’가 된다는 것 등이었다. 3월 3일 <정묘조약(丁卯條約)>을 맺고 그 의식을 거행한 후 인질은 왕자 대신에 종실인 원창군(原昌君)을 보내자, 후금의 군대도 철수하였다.

1632년(인조 10) 후금의 칸[임금] 홍타지는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공격하면서, 그 배후 세력인 조선을 먼저 쳐서 없애려고 계획하였다. 이에 후금은 조선에 대하여 ‘형제의 나라[兄弟之國]’에서 ‘군신의 나라[君臣之義]’로 호칭을 바꾸고, 막대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 명을 요구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1636년(인조 12) 2월 국호를 ‘후금’에서 ‘대청(大淸)’으로 바꾼 홍타지는 스스로 ‘황제’라고 일컫고 용골대(龍骨大)와 마부태(馬夫太)를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어 인조에게 칭신(稱臣)하기를 강요하였다. 이에 인조는 후금 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 : 싸움을 선포하는 임금의 글)을 내린 후 후금과 싸울 결심을 굳혔다. 당시 집권한 서인(西人)은 명분론(名分論)을 중시하였으므로, 대다수가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였고, 청나라와 화해를 주장하는 소수의 주화론자(主和論者)를 매국노로 몰아붙였다.

이에 후금의 칸 홍타지는, 12월 2일 팔기병(八旗兵) 10만 명을 직접 거느리고 후금의 수도 심양(瀋陽)을 출발하여, 그 달 9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평양성 등을 지나쳐 곧바로 서울로 직행하였다.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는 야망에 불타던 홍타지는 조선을 점령하는 것보다 조선의 항복을 받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인조를 빨리 만나서 항복을 받고 싶어 하였다. 이에 인조는 급히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김경징(金慶徵)을 강화도검찰사(江華島檢察使)로, 강화유수(江華留守)장신(張紳)을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임명하여 강화도와 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神主) 40여 기를 강화도로 옮기고, 비변사(備邊司)의 분사를 설치하여, 원임 대신들이 검찰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또 제 2왕자인 봉림대군과 제 3왕자인 인평대군(麟坪大君)에게 소현세자빈과 원손(元孫)을 비롯한 비빈과 왕자들, 그리고 종실들을 인솔하여 먼저 강화도로 피난하게 하였다.

맏아들 소현세자는 정묘호란 때처럼 분조를 거느리고 전주로 갔는데, 서울과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되면, 후방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적과 싸우도록 계획하였다. 이때 세자시강원 필선윤전은 소현세자의 부탁을 받고 소현세자빈을 모시고 강화도로 따라가게 되었다. 청렴하였던 윤전은 다른 사람처럼 자기 가족을 데리고 함께 강화도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아들 윤원거는 남은 가족을 데리고 고향 충청도 이산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달 14일 밤에 인조도 강화도로 피난하려고 출발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사에 의해 길이 막혀있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인조는 숭례문(崇禮門)의 누각에 올라가 지도를 보고 남쪽의 지형을 살펴보면서, 대신들과 피난갈 곳을 상의하다가 남한산성으로 결정한 후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때 임금의 피난 행렬을 본 도성 안 사람들의 민심이 흉흉하게 들끓었고, 너도나도 서울을 탈출하여 피난을 가려고 아우성을 쳤다. 당시 서울의 대다수 사대부 집안은 강화도로 피난을 갔는데, 나중에 강화도가 오랑캐 군사에게 함락되면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때 윤문거는 성균관에서 친구 유생들과 글을 읽다가, 나라의 임금과 백성들이 도망갈 궁리만 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말하기를, “오랑캐의 선봉은 1백여 기에 지나지 않고, 게다가 추위에 얼고 굶주리고 피로에 지쳐있으므로, 우리가 그들을 맞이하여 공격한다면, 모두 다 사로잡을 수 있다. 또 그들은 오랑캐 중의 정예(精銳) 군사이니, 그들만 사로잡는다면, 오랑캐의 기가 꺾일 것이다. 어찌하여 1백여 명의 굶주리고 피로에 지친 적병을 보고 먼저 도망갈 생각부터 한단 말인가” 하고, 마침내 임금을 만나 직간(直諫)하고자 친구들과 걸어서 숭례문으로 가던 중 아버지 윤전을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 윤전은 소현세자빈을 모시고 먼저 강화도로 피난 가는 중이었다. 윤전이 말하기를, “대가(大駕)는 이미 남한산성으로 향하였고, 나는 빈전(嬪殿)을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으니, 네가 비록 달려간다 하더라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하고, 서울의 가족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병란을 피하라고 부탁하였다.[「윤원거행장」] 그러나 인조가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고, 아버지 윤전은 그보다 앞서 세자빈을 모시고 강화도에 들어갔는데, 이때 이들 부자가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윤증(尹拯)의 「윤원거행장」 기록은 착오가 있는 듯하다.

그달 15일 인조는 백관들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인조는 훈련대장신경진(申景禛) 등에게 남한산성을 굳게 지키도록 하였으나, 산성 안에는 군사 1만 3천여 명이 50일 정도 먹을 수 있는 식량 밖에 없었다. 이듬해 1월 1일 청나라 태종홍타지가 도착한 후,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팔기군 10만 명을 주둔시키고 남한산성을 철통같이 에워싸서 밤낮 없이 공격하였다. 남한산성 안에 있던 인조는 45일 동안 버티면서 오랑캐 군사와 결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수비에만 급급하였다. 각 지방에서 인조를 구하기 위하여 관군과 근왕병이 남한산성으로 집결하였으나, 모두 오랑캐 군사에게 패배당하여 지리멸렬하였다. 이에 영의정김류(金瑬)와 이조 판서(判書)최명길(崔鳴吉)이 적진으로 홍타지를 찾아가 강화를 교섭하게 되었다. 이때 남한산성 안에서는 강화를 주장하는 주화파의 최명길과 이에 반대하는 척화파(斥和派)의 김상헌(金尙憲)이 치열하게 논쟁하였다. 서인의 이조 참판(參判)정온(鄭蘊)·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윤황(尹煌) 등은 척화를 주장하고 오랑캐와의 강화를 반대하였으나. 대다수의 군인들과 관리들은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원하였으므로 강화를 지지하였다. 심지어 군인들은 총궐기하여 인조의 장전(帳殿)앞에서 척화파 대신들을 잡아 오랑캐 진영으로 넘기라고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그런 가운데 고향 논산의 이산으로 내려온 윤원거는 논산의 연산에서 스승 김집이 근왕병을 일으키려 한다고 말을 듣고, 달려가서 함께 의병을 모으는 일을 적극 도왔다.[「윤원거행장」] 1월 22일 강화도가 오랑캐 군사들에게 함락되고, 소현세자빈과 봉림대군 등이 오랑캐 군사에게 사로잡히자 아버지 윤전은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윤원거는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강화도로 달려가서 그 시신을 수습한 후 고향 이산의 선영에서 반장하였다. 그리고 묘소 아래 움막집에서 기거하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을 드리며 통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낮에도 묘소에 올라가서 아버지의 충절을 깊이 생각하였다. 그는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세상에 나갈 뜻을 접었는데, 윤원거가 유일로 남아 평생 벼슬하지 않았던 까닭은 아버지 윤전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강화도가 함락되고 왕자와 비빈들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남한산성의 인조는 마침내 청나라에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청나라 태종홍타지는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청나라 태종홍타지에게 무릎을 꿇고 칭신한 후 척화파 김상헌·정온과 3학사(學士) 등을 잡아 청나라에 넘기도록 하였다. 1월 28일 청나라 태종홍타지가 용골대와 마부대를 보내어 강화조약 11개 조문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르면 조선은 청나라에 군신의 예를 지키고, 명나라의 연호를 폐지한 후 청나라 연호를 쓰며, 조선의 왕세자와 제 2왕자 및 대신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칠 때 원병을 보내며, 정기 사절을 보내어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낸다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침내 인조는 청나라의 요구대로 삼전도(三田渡)에 나가서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무릎을 꿇고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청나라 태종홍타지는 먼저 조선과 몽고를 정복한 다음에 중국 본토로 들어가서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 후, 중국을 완전히 지배하였다. 이때 절의를 지키던 윤원거 같은 선비들은 삼전도의 치욕을 보고, 오랑캐에게 항복한 왕조에 벼슬하기를 거절하고 유일로 남았다.

<기해예송(己亥禮訟)>과 윤원거

1659년(현종 즉위년) 5월 효종이 세상을 떠나고 현종이 즉위한 이후, 효종의 상(喪)에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제 1차 예송(禮訟) 논쟁> 일어났다. 이 논쟁은 기해(己亥)년에 시작되었으므로,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고도 하는데, 서인인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은 기년복(朞年服 : 1년 상복)을 주장하였고, 남인인 윤선도(尹善道)·윤휴(尹鑴) 등은 삼년복(三年服 : 3년 상복)을 주장하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결국 현종은 송시열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기년복을 채택하면서, 남인 윤선도는 삼수(三水)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인은 모두 축출되었다.

기해예송 때 윤선도는 상소하여 송시열을 비난하기를, “종통(宗統)이 명확하지 못하고 군지(群志 : 여러 사람의 뜻)가 정해지지 않았다”고까지 극언하였다. 즉 윤선도의 주장은 송시열의 기년복에 대한 주장을 종법의 왕위 계승권과 연결시키면, 효종의 종통이 애매하게 되고, 소현세자와 그의 자손들만이 적통이 되므로, 여러 사람의 뜻이 당시 효종의 형 소현세자의 3왕자 중에서 아직 살아 있던 셋째아들에게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송시열의 기년복 주장은 효종의 왕위 계승이 종법상 문제가 있는 것으로 비춰져서 자칫 왕위 계승 문제로 까지 비화될 수 있었으므로, 서인은 모두 위기의식을 느끼고 윤선도의 이론을 강력히 배척하였던 것이다.

남인 윤선도의 상소가 서인의 주장을 위험에 빠뜨리는 왕위 계승 문제로까지 비화하려고 하자, 서인들은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윤선도를 탄핵하고 안율(按律)하여 처벌하도록 계청(啓請)하였다. 이때 권시(權諰)가 상소하기를, “윤선도가 비록 남을 심하게 비판한 죄는 있으나 그 말을 가지고 사람을 죄줄 수는 없습니다” 하니, 대간에서는 남인 권시까지 아울러 탄핵하면서 마침내 모두 파출(罷黜)당하였다. 그리자 서인 윤원거가 상소하기를, “권시가 논한 바를 식견의 차이라고 논한다면 괜찮겠지만, 사악한 당파라고 지목한다면 그것은 그 본래 취지와는 다른 것입니다” 하였다.[「윤원거행장」]

윤원거는 비록 서인이었으나, 서인의 논의가 편파적으로 흐르는 것을 항상 비판해 왔으므로, 사람을 등용하는 일을 논하는 상소에서 특별히 권시의 일을 언급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자기 지위를 벗어난 것이라고 여겨 곧바로 중지하고 상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서인의 비방은 빗발쳤고, 이조 정랑(正郞)김만기(金萬基)는 심지어 윤원거가 사헌부 지평에 의망(擬望)되는 것까지 막았다. 그러나 그는 초연한 태도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윤원거행장」]

윤원거는 4촌 윤선거와 같이 유일로 남았는데, 남인 권시·윤휴와 절친한 사이였다. 기해예송에서 서인 윤원거는 남인 권시의 주장을 옹호하였고, 서인 윤선거는 남인 윤휴의 ‘차장자설(次長子說 : 왕위를 계승한 차자가 곧 장자가 된다는 학설)’을 적극 지지하다가, 친구 송시열의 의심과 분노를 샀다. 윤순거의 영향을 받은 윤원거와 윤선거는 송시열의 ‘체이부정설(體而不正說  :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장자는 아니라는 학설)’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윤증의 소론(少論)이 배태하기 전에, 이미 윤원거와 권시, 윤선거와 윤휴의 서인 개혁파와 남인 이론가 간에 학문적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윤증은 19세 때 윤원거의 중매로 권시의 딸과 혼인하였으므로, 서인과 남인의 학문적 영향을 모두 받았다.

성품과 일화

윤원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남보다 뛰어나고 용모가 깨끗하고 빼어났다. 할머니가 무척 사랑하였는데, 한 번은 그가 오는 것을 보고 “아까 한쪽 모퉁이에 빛이 비쳐서 달이 떠오른 줄 알았더니, 그게 바로 너였구나” 하였다. 10세 때에 집안에서 글을 배웠는데 총명함이 뛰어나서 문사(文思)가 빨리 숙달되었다. 차츰 성장하면서 지기(志氣)가 넘쳐나고, 기개(氣槪)가 있었다.[「윤원거행장」]

천품이 고매하고 욕심이 없어서 명예와 이익을 남의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심지어 영욕(榮辱)이나 화복(禍福)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마음이 즐겁고 화평하여, 말을 빨리 하거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사람을 대할 때에는 진실된 마음을 다하고 꾸미지 않았다. 취향이 고상하여 이상한 사물을 보거나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만나면, 어디에서든지 이를 관찰하고 구경하느라 우유자적하였다. 그러나 만년에 항상 아들들을 경계하기를, “나는 젊어서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공허하고 절실하지 않는 분야를 탐구하다가 보니, 진실하게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학문이 크게 성취하지 못하였다. 너희들은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윤원거행장」]

14세에 정시(庭試)에 나가서 ‘문한(問旱)’이란 시제(試題)에 답하기를, “이이첨(李爾瞻)을 베어야만 비가 내릴 것이다”하였는데, 이이첨은 광해군의 총신(寵臣)이었으므로 듣는 이들이 혀를 내두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정자(正字)권경(權儆)이 길에서 그를 만나보고, 그의 재주를 칭찬한 후 그의 딸을 시집보냈는데, 권경은 이수광(李睟光)의 사위이다. 광해군 때에 정치가 문란해지자 아버지 윤전은 벼슬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살았는데, 윤원거도 역시 과거 공부에 마음 쓰지 않고 이수광의 여러 아들들과 어울려 시주(詩酒)를 즐겼다.[「윤원거행장」] 이수광이 그의 재명(才名)을 듣고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서 운(韻)을 띄우고 ‘하늘[天]’을 시제로 삼으니, 그가 일어나서 즉시 노래로 화답하기를, “조화의 성쇠는 초목으로 알고[造化盛衰看草木], 음양의 개합은 곤충으로써 알 수 있네[陰陽開闔識昆蟲]. 사람이 살고 죽는 건 조석간의 일이나[人生人死隨朝夕], 성도(聖道 : 유학)는 길이 존재하여 시종이 없다오[聖道長存與始終].”라고 하니, 이수광이 칭찬하기를, “이치에 통달한 말이다” 하였다.[『용서문집(龍西文集)』 권1]

그는 과거도 보지 않고 또 조정에 나오지도 않았지만 명망이 있었으므로, 남인의 권시·윤휴와 아주 친했다. 이들 두 사람이 윤선도를 두둔하면서 송시열의 비위를 거스르면, 윤원거가 언제나 이 두 사람을 구원하는 말을 하였으므로 동료들로 부터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1635년(인조 13)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할 때 여러 유생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을 논의하고 상소를 올려 청하려고 하였으나, 재랑(齋郞)을 맡은 자가 반대파의 이의(異議)를 듣고 시간을 질질 끌면서 결정을 못 내렸다. 그러자 윤원가가 식당에서 면척(面斥)하기를, “두 분 선생의 도학이 순정(純正)한 것은 일월이 광명(光明)한 것에 비할 만 하므로 일국의 인사들 가운데 존중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마음대로 헐뜯은 자는 정인홍(鄭仁弘)과 이홍로(李弘老) 무리들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정인홍과 이홍로가 모두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그 여론(餘論)을 이어받은 자가 다시는 없을 터인데, 재랑이 어찌 하려고 이토록 유예미결(猶豫未決)하는가” 하였다. 그러자 권귀중(權貴中)이란 자가 이론을 제기하여 말하기를, “성인이라야 능히 성인을 안다. 성혼과 이이가 둘 다 어질다 하지만 지금 의론하는 자가 성혼과 이이같이 어진 자가 있는가” 하자, 그가 말을 가로막으면서 말하기를, “공자(孔子)·맹자(孟子)의 뒤에는 공자·맹자 같은 자가 없고, 정자(程子)·주자(朱子) 뒤에는 역시 정자·주자 같은 자가 없었지만, 후세 사람이 모두 공자·맹자와 정자·주자의 어짊을 알고 있다” 하니, 권귀중 등이 대답을 못하였으므로, 사론(士論)이 통쾌하게 여겼다.[「윤원거행장」]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공주(公州)의 판치(板峙)에 있는데, 윤증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있다.[「윤원거행장」] 연산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향사되었고,[『사계전서(沙溪全書)』 권47] 이산에 있는 윤황(尹煌)서원(書院)에 제향되었다. 1707년(숙종 33) 9월 충청도의 진사(進士)이만성(李萬誠) 등이 상소하여, 그와 그의 아버지 윤전을 이산에 있는 윤황의 서원에 추향(追享)할 것을 청하니, 숙종이 이를 허락하였던 것이다.(『숙종실록』 33년 9월 2일)

첫째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정자(正字)권경의 딸이다. 둘째 부인 연일 정씨(延日鄭氏)는 진사 정유번(鄭維藩)의 딸인데 1남 3녀를 낳았으며, 셋째 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군수김수현(金守灦)의 딸인데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윤주(尹拄)이고, 차남은 참봉윤유(尹揄)이며, 3남은 윤부(尹拊)이다. 딸들은 김화진(金華鎭)·민중재(閔仲才)·김세성(金世聲)·조석우(曺錫禹)·박여성(朴汝聖)와 각각 혼인하였다.[「윤원거행장」]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간재집(艮齋集)』
  • 『낙전당집(樂全堂集)』
  • 『남악집(南岳集)』
  • 『남포집(南圃集)』
  • 『노서유고(魯西遺稿)』
  • 『동주집(東州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명재집(明齋集)』
  • 『봉곡집(鳳谷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송곡집(松谷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담집(龍潭集)』
  • 『용서문집(龍西文集)』
  • 『지봉집(芝峯集)』
  • 『창석집(蒼石集)』
  • 『청음집(淸陰集)』
  • 『포저집(浦渚集)』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