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崇禮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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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남문.

개설

조선시대 한양의 도성에는 사대문으로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을 두었고, 사소문으로 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을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파루(罷漏)와 인정(人定)에 맞춰 성문을 열고 닫아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숭례문은 한양의 남문으로 개설된 이후 몇 차례 수리를 거쳤지만, 처음 한양 성곽이 조성될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위치 및 용도

숭례문은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4가에 위치한 남쪽 대문이다.

변천 및 현황

태조는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성곽을 조성하기 시작했으며 성곽이 완성된 것은 1396년(태조 5)에 이르러서였다(『태조실록』 5년 9월 24일). 이때 각 문이 위치할 곳에 월단누합(月團樓閤)을 지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홍예를 틀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숭례문의 해체 보수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이때 숭례문에서 여러 묵서명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2층 중도리받침 장혀에서 ‘홍무이십구년병자십월초육일(洪武貳拾玖年丙子十月初六日)’로 시작하는 묵서명이 발견되었고, 2층 종도리 즉, 이중도리 하측 상면에서 ‘홍무이십구년병자십월초지일상량(洪武二十九年丙子十月初之日上樑)’으로 시작하는 묵서명이 발견되었다. ‘홍무 29년 병자년’은 1396년에 해당하여 이 묵서명이 숭례문 최초 건립 당시의 기록임을 알 수 있다. 공사 관계자의 명단에는 최유경, 이무, 손흥종, 이지호, 석숭, 윤을휴, 경렴 등이 기록되어 있다.

세종조에 들어서 숭례문의 개축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당시의 논의는 숭례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경복궁을 포함한 도성 전체에 대한 개축 논의였다. 이들 중 상당히 많은 부분이 풍수의 관점과 연관된 것들이었다. 세종은 숭례문에 대해 “경복궁의 오른쪽 산세가 낮고 넓게 트여 포국(抱局)하는 형태가 아니어서 예전에 남대문 밖에 연못을 파고 문 안에 지천사(支天寺)를 세운 일이 있다. 나는 남대문이 이렇게 낮은 이유가 처음에 굴토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번에 높이 쌓아 올려 산맥에 연하게 만든 다음 그 위에 문을 만들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너무 많은 공사가 일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하나씩 차례로 진행하자는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1447년(세종 29)에 가서야 진행되었다(『세종실록』 29년 8월 30일). 그러나 이내 추위가 찾아와 공사를 일시 중지하고 다음 해에 공사가 진행되었다. 당시의 숭례문 중수와 관련된 묵서명도 1961년에 확인되었다. 2층 종도리 즉, 이중도리 상측 하면에서 발견된 묵서에는 ‘정통십삼년무신삼월십칠일임인손시립주상량(正統十三年戊辰三月十七日壬寅巽時立柱上樑) 제조정헌대부의정부좌참찬판호조사정분(提調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判戶曺事鄭苯) 자헌대부형조판서민신(資憲大夫刑曺判書閔伸)’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중수한 숭례문은 1448년 3월 17일에 입주와 상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에는 숭례문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기록되었지만 이때 공사는 성곽을 더 높이 축성한 후에 기존 건물을 옮겨 지은 것으로 판단된다.

성종조에도 숭례문의 중수가 있었다. 1478년(성종 9)에 숭례문이 기울어 허물어질 지경에 이르자 중수가 시급함을 알았으나, 이때에는 공주의 재택을 짓는 중이라 중수하지 못하고(『성종실록』 9년 7월 19일) 1479년에 중수가 진행되었다. 숭례문을 중수하면서 옹성(甕城)을 부가해 건설하자는 의견도 제시되었지만, 성종은 옹성을 쌓으려면 인근의 민가를 철거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실시하지 않았다(『성종실록』 10년 1월 17일). 이때의 중수 공사와 관련된 묵서명 역시 1961년에 확인되었다. 2층 북측 하중도리 받침장혀에서 ‘계성화십오년세차기해사월정해초이일무자(繼成化十五年歲次己亥四月丁亥初二日戊子) 지중추부사한계순근봉교지감소고우(知中樞府事韓繼純謹封敎旨敢昭告于)’로 시작하는 한계순이 지은 상량문이 발견되었으며, 2층 북측 하중도리 즉, 하면에서 ‘성화십오년기해사월초이일묘시립주상량(成化十五年己亥四月初二日卯時立柱上樑)’이라는 묵서명이 발견되었다. 이것으로 입주와 상량이 4월 2일에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명종조에는 한양 성곽의 문에 옹성을 쌓자는 의견이 다시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주변 민가의 철거에 어려움이 있다는 의견을 들어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조조에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성곽에 군사 시설이 필요하다고 느낀 신하들이 옹성의 필요성을 다시 제기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한양의 모든 성곽을 군사로 지킨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면서 옹성을 짓지 말도록 하였다.

이렇게 전해져 온 숭례문은 1907년 성곽 일부가 철거되면서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일본 황태자 대정천황이 한양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숭례문의 문루를 통과해 지나갈 수 없다고 하여 문루 북측 성벽을 허물고 이곳으로 통행하였다. 이후에도 문루를 제외한 좌우 성곽이 총독부의 도시 계획으로 헐려나갔고 결국 도로 한가운데 문루만 남게 되었다. 이후 문루는 1961년에 대대적인 수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가 『서울 남대문 수리보고서』에 수록되었다. 2008년 2월 10일에는 숭례문에 방화 사건이 발생해 문루가 소실되었는데, 2010년 2월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13년 5월에 복구가 완료되었다.

형태

숭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평면을 하고 있고 중층으로 건립되었다. 지붕은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다. 지붕에는 양성을 발랐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사용했고,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올려놓았다. 가구는 5량으로 구성했는데 중앙에 심고주를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5량 건축물을 만들 경우 공간 활용을 고려해 심고주를 사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숭례문은 성문인 관계로 중앙보다 가장자리의 공간 활용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심고주를 사용한 것이다. 심고주를 사용해 건물을 구성했기 때문에 하층과 상층 모두 맞보를 이용해 건물을 구성했다. 공포는 다포식으로 꾸몄는데 하층은 내외 2출목으로 만들어졌고, 상층은 내 2출목, 외 3출목으로 구성했다. 초선초기 건축물에 걸맞게 공포의 쇠서는 수서형으로 만들어졌고, 주심공포에는 매우 거대한 삼분두형 보머리를 갖추고 있다. 주간포의 경우 다포 건축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운공이 사용되지 않아, 다포 공포의 고식 수법을 확인할 수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460년(세조 6)에 가뭄이 심하여 기우제(祈雨祭)를 행하면서 고사(古事)에 의거하여 숭례문을 닫고 저자를 옮기고 북[鼓]을 치지 말도록 하였다(『세조실록』 6년 5월 19일).

참고문헌

  • 고고미술동인회 간, 『한국고건물상량기문집』, 1964.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편,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 1987.
  • 서울특별시, 『숭례문 정밀실측조사보고서』, 2006.
  •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서울 남대문 수리보고서』,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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