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폐(歲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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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조선이 청에 정기적으로 바치는 공물.

개설

조공(朝貢)은 제후가 황제를 알현하는 의식이자 절차였다. 이 중 ‘조(朝)’는 제후가 황제를 알현하는 의식이고, ‘공(貢)’은 제후가 황제에게 바치는 예물, 즉 공물(貢物)을 의미하였다. 공물은 제후가 다스리는 지방의 토산물을 바친다는 의미에서 흔히 방물(方物)이라 불렀다. 또한 매년(해마다) 바치는 공물·폐백이라는 의미에서 연공(年貢)·세공(歲貢)·세폐(歲幣)라고 불렀다. 조선 왕은 명 황제를 직접 찾아가는 친조(親朝)를 하지 않았으므로, 청에 대해서도 신하가 이를 대행하였다.

세폐의 품목과 수량은 1637년(인조 15) 청 태종의 유지(諭旨)에 의해 정식으로 규정되었다. 『통문관지』에도 1637년에 처음 세폐를 정하였다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인조 16년(1638) 3월 9일자에 보면, “국가의 존망이 세폐에서 판가름 난다.”라고 할 정도로 세폐의 부담이 무거웠다. 그러나 실제 세폐를 바친 것은 1639년(인조 17)이었다. 물론 병자호란 이후에도 후금이 세폐를 요구한 적이 있으나, 이는 정례화된 것이 아니었다.

명에 대한 조공품은 방물이었으나, 청에 대한 조공품은 방물에 세폐가 추가되었다. 청에 대한 세폐가 만들어지면서, 세폐를 가져가는 사신인 세폐사(歲幣使)가 새로 생겼다. 1637년에 호조 산하에 세폐를 담당하는 세폐색(歲幣色)이라는 새로운 직책이 생겼다.

1644년(인조 22) 청은 수도를 심양(瀋陽)에서 북경(北京)으로 옮겼다. 청에 가는 정기사행 가운데는 삼절행(三節行)과 연공행(年貢行)이 있었다. 삼절행은 동지(冬至)를 축하하는 동지행, 새해 첫날을 축하하는 정조행, 황제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행이고, 연공행은 세폐를 내는 사행이었다. 삼절행과 연공행이 합쳐서 삼절연공행이 되었다. 두 사행이 합쳐진 것은 청나라가 북경으로 천도한 이듬해인 1645년(인조 23)부터였다. 그러나 1644년 9월에 동지겸세폐사(冬至兼歲幣使)가 북경에 갔다.

매년(해마다) 정기적으로 바치는 세폐와, 각종 사행이 파견될 때마다 가지고 가는 방물로 인해 두 나라 상인들 간에 조공무역이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청 관계는 조·명 관계와는 달리 조공품이 세폐와 방물로 이원화되는 변화가 있었다. 청과 조선의 조공 관계는 청 태종이 조선을 항복시키고 내린 11개조의 유지(諭旨)에 근거하였다. 여기에는 세폐의 품목과 수량이 적혀 있었다.

인조 15년에는 황금 100냥, 백은 1,000냥 등을 정식으로 삼는다고 규정하였다(『인조실록』 15년 1월 28일). 세폐 내용은 『통문관지』(권3) 「사대편」 방물수목에도 들어 있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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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문관지』 내용은 『인조실록』과 약간 차이가 있다. 실록에는 녹피 100장은 없고, 순도 20파는 10파로, 각색세목면은 각색세포로 되어 있었다.

세폐는 품목의 종류나 수량이 많았다. 방물의 주요 품목으로는 저포(苧布)·마포(麻布) 등 의류, 백면지(白綿紙) 등 종이가 속하였고, 표피(豹皮) 등의 가죽류, 화문석과 같은 돗자리류는 세폐에 다량 포함되었다. 품목별 수량도 상당히 많았으며, 같은 품목이 방물과 세폐에 모두 포함될 경우에는 세폐가 압도적으로 수량이 많았다.

황금·백은·수우각(물소뿔)·소목 등은 방물에는 없고 세폐에만 있는 물품이었다. 이 물품은 조선 토산품이 아니었다. 특히 조달하기 힘든 것은 황금과 수우각이었다. 세폐가 방물보다 다양하고 수량이 많은 것은 청의 경제적 필요 때문이었다. 세폐는 경제적 필요가 높은 물품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현지 수요가 줄면 품목과 수량이 급격하게 감소될 가능성이 높았다.

세폐를 바치기 시작한 초기에는 호조의 재정을 통해 마련되었다. 1639년(인조 17)에는 주로 호조의 비축 재정을 이용하였고, 잡세(雜稅)를 통해서도 충당하였다. 그러나 호조의 재정 부담이 컸기 때문에, 1640년(인조 18)부터 물품을 민간에 부과하여 비용을 마련하였다.

세폐목(歲幣木)은 직접 세폐로 쓰이는 질 좋은 목면인 상목(上木)과, 가죽류와 주류(紬類)를 비롯한 각종 잡물을 구매하는 데 쓰는 차목(次木)으로 나뉘었다. 상목은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하삼도에, 차목은 하삼도와 강원도·충청도에 부과되었다. 대호지와 소호지는 현물로 분정되었다. 세폐목과 종이류 등 세폐 마련가가 민간에 부과되면서 각종 폐단이 생겨났다. 이후 세폐 마련가는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대동세에 흡수되었다.

세폐 마련가가 대동세에 흡수되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다. 세폐 재원을 담당하는 관청이 호조와 선혜청으로 이원화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호조에서 세폐를 준비하는 데 차질이 생겼다. 호조에서 결포(結布)를 징수할 수 없게 된 대신 선혜청으로부터 대동목을 받아야 하는데, 선혜청이 제대로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호조와 선혜청이 세폐를 두고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그 결과 세폐를 은으로 대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당시 대청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호조가 매년 상당한 양의 은을 수세하고 있었던 것이 그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은 대납은 실행되지 않았다.

은 대납은 실패하였지만, 대신 각 도에서 거둔 대동미를 선혜청을 거치지 않고 호조로 직접 납입하는 제도적 정비가 추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로써 호조는 세폐를 안정적으로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세폐의 품질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품질 문제가 발생할 경우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소지가 많았다. 검사를 소홀히 하여 문제가 생겼을 경우 처벌이 가해졌다. 세폐 물품을 수납할 때 질이 좋지 않을 경우 물건을 도로 물리쳤으며[點退], 심한 경우 해당 수령을 추고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세폐에 쓸 목면을 공물로 바치는 공인계인 세폐계·세폐계공인도 존재하였다. 세폐계는 생상목(生上木)의 일부를 조달하였다. 백상목(白上木)은 백목전(白木廛)이 전담하였다. 생상목은 은계·자기계·돈삼계·세폐계·금계 등이, 녹피와 수달피는 구피계(狗皮契), 백주(白紬)·홍주(紅紬)·녹주(綠紬)는 면주전(綿紬廛)이 조달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시전이나 공인이 일부 세폐 품목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변천

민간에 큰 부담을 주었던 세폐는 1641년(인조 19)부터 1728년(영조 4)까지 11차례에 걸쳐 감액되었다. 1645년(인조 23)에는 차와 마포가 전면 감면되었다. 수우각과 황금은 1653년(효종 4), 1692년(숙종 18)부터 각각 면제되었다. 11차례의 조정을 거치면서 세폐의 대부분 품목은 면제되거나 감소되었다. 청의 경제가 안정되면서 세폐의 일부 품목이 교역품으로 대체되었고, 이로써 세폐가 감소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종이류는 수량이 증가하였다. 그것은 청에서 종이의 수요가 많았으며, 조선산 종이의 품질이 뛰어나 종이류를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1728년(영조 4) 정해진 세폐의 품목과 수량은 1893년(고종 30)까지 변화가 없었다. 이때 정해진 세폐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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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폐는 17세기~18세기 초에 감액되기도 하고 다른 물품으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처음 정해진 세폐의 총 비용에 비해 1/5정도로 크게 줄어들었다. 세폐는 조선과 청의 조공책봉관계가 끝나는 1893년(고종 30)까지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통문관지(通文館志)』
  • 『동문휘고(同文彙考)』
  • 『탁지지(度支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세폐공안(歲幣貢案)』
  • 유승주·이철성, 『조선후기 중국과의 무역사』, 경인문화사, 2002.
  • 張存武 지음, 김택중 외 옮김, 『근대한중무역사』, 교문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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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江嶋壽雄, 「崇德年間における朝鮮の歲幣について」『史淵』108 , 九州大學 문학부, 1972.
  • 이홍두, 「17세기 대청교역에 관한 연구」, 『국사관논총』 81집 , 국사편찬위원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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