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진(申景禛)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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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신경진 |
한글표제 | 신경진 |
한자표제 | 申景禛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무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인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군수(君受) |
봉작 |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
시호 | 충익(忠翼)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75년(선조 8) |
사망 | 1642년(인조 20) 3월 11일「신도비」 1643년(인조 21) 3월 11일『실록』 |
본관 | 평산(平山)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
증조부 | 신상(申鏛) |
조부 | 신화국(申華國) |
부 | 신립(申砬) |
모_외조 | 전주 최씨(全州崔氏): 최필신(崔弼臣)의 딸 |
형제 | (동생)신경유(申景祀谷), 신경인(申景䄄) 祀 谷 |
처_장인 | 순창 조씨(淳昌趙氏): 조정현(趙廷顯)의 딸 |
자녀 | (1자)신준(申埈) (2자)신해(申垓) (서1녀)이봉령(李鳳齡)의 처: 영주감(瀛洲監)의 처 (서2녀)이일(李佾)의 처: 창림도정(昌臨都正)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신경진(申景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선조실록』 33년 1월 12일, 『인조실록』 인조 2년 2월 7일 · 2월 16일, 『인조실록』 인조 10년 7월 22일, 『인조실록』 인조 17년 6월 28일 |
목차
총론
[1575년(선조 8)∼1643년(인조 21) = 69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무신. 영의정(領議政)을 지냈고 봉작(封爵)은 평성 부원군(坪城府院君)이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자는 군수(君受)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북병사(北兵使)평양 부원군(平陽府院君)신립(申砬)이고, 어머니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만호(萬戶)최필신(崔弼臣)의 딸이다.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고, 가까운 친구 김류(金瑬) · 이귀(李貴) · 최명길(崔鳴吉) 등과 함께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켰다.
선조 시대 활동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적과 싸우다 패하고 죽은 전망인(戰亡人)의 후손이라고 하여 음사(蔭仕)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27)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군이 재차 침입하자, 선전관으로 있던 신경진은 상소하기를, “종군(從軍)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선조가 의롭게 여겨 이를 허락하였는데, 신경진은 전라도의 복수대장(復讐大將)고종후(高從厚)처럼 싸움터에서 용감하게 왜적과 싸워서 자주 왜군의 수급(首級)과 포로(捕虜)를 바치는 공(功)을 세웠다.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사(都事)로 전임(轉任)하였다.
1600년(선조 33) 1월 신성군(信城君)이후(李珝)를 천장(遷葬)할 때 호상사(護喪使)가 되었다. 이때 선조가 비망기(備忘記)로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죽은 신성군을 천장할 적에 호상사가 의주(義州)로 내려가야 하는데, 행(行) 부사(副使)호군(護軍)신경희(申景禧)와 전 도사(都事)신경진에게 쇄마(刷馬) 4필과 일로(一路)의 초료장(草料狀)을 지급하라.” 하였다.(『선조실록』 33년 1월 12일) 초료장(草料狀)은 말에게 꼴을 주도록 하는 증서이다. 선조의 서출 제 4왕자 신성군이후의 부인이 신립의 딸이었으므로, 신성군을 천장할 때 신립의 맏아들 신경진과 장조카 신경희가 호상사로 의주에 갔다. 신성군이후는 선조가 적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태어나기 전에 광해군 대신으로 왕세자로 지명하려고 하였던 인물이다.
그 뒤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도총부(都摠府) 경력(經歷)으로 승진하였다. 지방 수령으로 나가서 태안 군수(泰安郡守)와 담양 부사(潭陽府使)를 지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57 「평성부원군 신공경진 신도비명(平城府院君申公景禛神道碑銘)」] 1605년(선조 38) 12월 부산진 첨사(釜山鎭僉使)로 있을 때 공인(工人)들을 독촉하다가, 형벌을 가혹하게 주었다고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가 무인(武人)의 소소한 행실을 일일이 책할 수는 없다고 하여, 용서하여 주었다.[『선조실록』선조 38년 12월 12일] 그때 나라에서 일본과 강화(講和)를 허락하니, 부산(釜山)은 실상 일본 상인들의 배가 왕래하는 포구(浦口)였으므로, 신경진이 상소하여 체직되기를 빌면서 말하기를, “차마 어찌 같은 하늘 아래에 함께 살고, 그들과 더불어 서로 접촉하겠습니까.” 하니, 선조가 그 심정을 헤아려서, 1606년(선조 39) 7월 갑산 부사(甲山府使)로 옮기게 하고,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특별히 승품시켰다. 이어 남병영(南兵營) 곧 함경남도병영(兵營)우후(虞候)로 옮겼는데, 체찰사(體察使)이항복(李恒福)이 그의 명성을 듣고 막료로 불러서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가, 그를 천거하여 경원 부사(慶源府使)로 삼았다. 이어서 벽동 군수(碧潼郡守)로 옮겼다가, 파직(罷職)당하였다.[『송자대전』 권157 「평성부원군 신공경진 신도비명」, 『선조실록』선조 39년 7월 20일]
광해군 시대 활동
광해군 초기에 곡산 군수(谷山郡守)로 있다가 개천 군수(价川郡守)로 옮겼다. 1611년(광해군 2) 평안도 병마사장만(張晩)이 관서(關西)에 막부(幕府)를 개설(開設)하고 그를 천거하여 안주 목사(安州牧使)에 임명하였다. 광해군 시대 이이첨(李爾瞻) · 정인홍(鄭仁弘) 등의 대북파(大北派)가 정권을 잡으면서, 서인(西人)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 등이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서 영창대군과 그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기 위하여 대규모 정청(庭請)을 전개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서인들을 모두 숙청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 하면서 동생 신경인(申景䄄) 등과 반정(反正)을 모의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가까운 친척 구굉(具宏)과 손을 잡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추대하기로 정하였다. 가까운 친구 김류 · 최명길 · 이귀 등을 끌어들여 함께 반정을 모의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이귀가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나가자, 신경진은 그의 중군(中軍)이 되기를 자원하여, 군사를 동원하려고 하다가, 이를 눈치 챈 정승 박승종(朴承宗)에 의하여 효성령(曉星嶺)의 별장(別將)으로 쫓겨났다. 이때 신경준은 거사의 계획을 최명길과 동생 신경인 등에게 맡기고, 평안도 박천(博川) 가산진(嘉山鎭)으로 갔으므로, 1623년의 <인조반정(仁祖反正)>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15년 3월 13일]
인조 전반기 활동
1623년(인조 1) 3월 13일 인조가 인목대비의 명을 받아서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다. 인조는 제일 먼저 반정 계획을 세웠던 신경진을 가산(嘉山)의 효성령(曉星嶺)에서 불러와서 공조 참의(參議)에 임명하였다가, 병조 참의로 옮겨서 궁중의 호위를 맡게 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15년 3월 13일, 『인조실록』인조 1년 3월 25일, 『승정원일기』인조 1년 4월 9일] 반정 초기에 불안한 치안을 위하여, 인조는 신경진을 병조 참판(參判)으로 임명하여, 친위병(親衛兵)을 거느리고, 훈련대장(訓鍊大將) · 호위대장(扈衛大將) · 포도대장(捕盜大將)의 3대장(大將)을 겸임하게 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1년 4월 21일 · 7월 7일, 『송자대전』 권157 「평성부원군 신공경진 신도비명」] 인조와 신경진은 가까운 근친 관계였는데, 신경진의 누이가 인조의 백모(伯母)였고, 구굉의 누이가 인조의 어머니였다. 그 해 7월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잠시 나갔다가, 8월에 수도를 방어하기 위하여 호위청(扈衛廳)을 설치하여 숙위(宿衛)의 군사를 늘였는데, 이귀를 경성(京城) 호위대장으로 삼고, 신경진을 부장(副將)으로 삼았다.[『임하필기』 권18] 그 해 윤10월 정사공신(靖社功臣) 53명을 녹훈(錄勳)할 때 신경진은 이귀 · 최명길 등과 함께 1등에 책봉되었다.[『인조실록』인조 1년 윤10월 18일] 그때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품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송자대전』 권157 「평성부원군 신공경진 신도비명」]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난을 가고, 신경진은 금군(禁軍)을 거느리고 이천(利川)의 방어를 맡았는데, 체찰사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수원(水原)으로 후퇴하였다고 탄핵을 당하였다. 이괄의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신경진은 이괄이 추대하려던 선조의 서출 제 10왕자 흥안군(興安君)이제(李瑅)를 아울러 죽였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인조실록』 인조 2년 2월 7일 · 2월 16일) 1625년(인조 3) 2월 선공감(繕工監)제조(提調)로서 창릉(昌陵)을 봉심(奉審)하고 사초(莎草)하였다. 그 해 4월에 형조 판서가 되었고 이어 우림위장(羽林衛將)을 겸임하였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인조실록』인조 3년 2월 27일 · 4월 19일, 『승정원일기』인조 3년 9월 21일] 1626년(인조 4) 3월 공조 판서가 되었는데, 신경진이 상소하여 본직과 겸임한 3대장(大將) 가운데 하나를 줄여줄 것을 간청하니, 인조가 대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충분히 알았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 하였다.[『인조실록』인조 4년 3월 16일 · 3월 22일]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인조가 강화도(江華島)에 피난하였는데, 그때 신경진은 인조를 호종(扈從)한 공로(功勞)로 정1품하 보국(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품되고,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송자대전』 권157 「평성부원군 신공경진 신도비명」] 1627년(인조 5) 9월 예장도감(禮葬都監) 제조로 예장이 끝난 다음에 가자(加資)되었다.[『인조실록』인조 5년 9월 1일] 1628년(인조 6) 1월 ‘정사공신(靖社功臣)’이 잘못 책정되었다고 하여 공훈을 다시 감정하였는데, 신경진은 김류 · 신흠(申欽) · 오윤겸(吳允謙) 등과 함께 2등으로 강등되었다. 그해 9월 정사공신으로서 정1품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진하였으나, 12월 개정되어 다시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로 강등되었다.[『인조실록』인조 6년 9월 26일, 『승정원일기』인조 6년 9월 26일 · 12월 7일] 1630년(인조 8) 10월 내금위장(內禁衛將)을 겸임하였고, 12월 천릉도감(遷陵都監) 제조가 되어 천릉을 끝마치고, 다시 정1품하 보국숭록대부로 승품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8년 10월 14일 · 12월 17일 · 12월 18일]
인조 후반기 활동
1632년(인조 10) 7월 형조 판서가 되었으나, 병을 핑계하고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인조실록』 인조 10년 7월 22일) 1636년(인조 14) 3월 병조 판서가 되었고, 훈련도감(訓練都監) 대장(大將)을 겸임하였다. 전례에 병조 판서가 훈련도감[訓局]을 겸임할 수 없었는데, 신경진이 병조 판서가 되어서 전례를 인용해서 사양하니, 인조가 허락하지 않았다.[『인조실록』인조 14년 3월 22일 · 3월 24일] 그 해 11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청(淸)나라 태종(太宗)홍타지가 오랑캐 군사를 거느리고 대거 침입하여 왔다. 궁중의 비빈(妃嬪)과 왕자들을 먼저 강화도로 피난시키고, 다음날 인조가 백관들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피난가려고 남성문(南城門)을 나오는데, 오랑캐 군사들이 벌써 서교(西郊)에 닥쳤다고 보고가 들어왔다. 인조는 재빨리 회가(回駕)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하였으나, 미처 산성에 들어가지도 못할까 염려가 되었다. 이때 신경진이 나서면서 말하기를, “신이 마땅히 죽음으로써 오랑캐 군사를 항거(抗拒)하겠으니, 원컨대 경기(輕騎)로써 빨리 달려가소서.” 하고, 마침내 산성 밖에다 군대를 나열(羅列)하고 목숨을 걸고 적을 물리칠 각오를 하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서 산성(山城)의 수비(守備)를 의논하고, 급히 그를 불러 들여서 산성의 동쪽 모퉁이를 지키게 하였다. 남한산성에 45일 동안 포위되어 있을 때 신경진은 금병(禁兵)을 이끌고 자주 출병(出兵)하여 오랑캐 군사를 습격하여 참획(斬獲)한 수급(首級)이 매우 많았다.[『송자대전』 권157 「평성부원군 신공경진 신도비명」]
1637년(인조 15) 화의(和議)가 성립되어, 청나라 태종이 오랑캐 군사를 거느리고 물러가자, 다시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송자대전』 권157 「평성부원군 신공경진 신도비명」] 당시 조정에서는 최명길의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尙憲)의 척화파(斥和派)가 팽팽히 대립하고 있었다. 그 해 11월 삼공(三公)의 결원(缺員)이 생기자, 인조가 영의정최명길에게 상신(相臣)의 후보자를 천거하는 문제를 의논하니, 최명길이 대답하기를, “문무(文武) 양쪽으로 후부자[望]를 천거한다면, 장유(張維)와 신경진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인조가 마침내 신경진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삼았다.[『송자대전』 권157 「평성부원군 신공경진 신도비명」] 그때의 인사에 대해 사관(史官)들이 논평하기를, “신경진은 글을 볼 줄도 모르고 성질도 거친데, 훈척(勳戚)으로써 갑자기 정승에 올랐으므로, 조야(朝野)에서 놀라워하고, 한숨을 쉬었다.” 하였다.[『인조실록』인조 15년 11월 7일] 그러나 신경진은 사람들의 걱정과는 달리 문서(文書)의 잘못된 곳을 지적하고, 모든 정무를 제때에 잘 처리하였다. 1638년(인조 11) 1월 사은사(謝恩使)로 심양(瀋陽)에 갔다.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는 최명길을 청나라에 보내서 조선에서 징병(徵兵)하는 일을 그만두고,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을 돌려보내도록 간청하였는데, 최명길이 징병하는 한 가지 문제만을 청나라로부터 허락받고 돌아왔다. 이에 신경진을 사은사로 보내어 청나라 태종홍타지에게 이것을 사례하였다.[『인조실록』인조 11년 1월 18일 · 2월 28일 · 5월 11일] 1638년(인조 16) 우의정신경진이 중국 청나라 북경(北京)에서 돌아오자, 인조가 신경진을 좌의정(左議政)에 임명하였다.[『송자대전』 권157 「평성부원군 신공경진 신도비명」]
1639년(인조 17) 6월 좌의정신경진이 장렬왕후(莊烈王后)의 책봉(冊封)을 주청(奏請)하려고 중국 청나라 북경에 다녀왔다.(『인조실록』 인조 17년 6월 28일) 1640년(인조 18) 평성 부원군신경진이 병이 들어서, 좌의정을 사임하기를 간청하기를 9번이나 하자, 인조가 허락하지 않다가 겨우 허락하였다.[『인조실록』인조 18년 2월 2일] 1641년(인조 19) 인조는 신경진을 영의정(領議政)에 임명하였는데, 이미 신경진의 병이 깊어졌으므로, 인조가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잇달아 치료하고, 또 대군(大君)을 자주 보내어 문병(問病)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보면, “신경진은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외종(外從)으로서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병이 위중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영의정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것은 인조가 글을 읽은 사람이 아닌 신경진이 백관들을 통솔할 수 없을까봐 염려한 때문이고, 한편으로 벼슬을 중하게 아끼는 뜻을 가지고, 그의 공로를 생각하여 죽은 뒤에라도 신하의 최고직을 명정(銘旌)에나마 쓰게 하려고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였다. 인헌왕후는 인조의 생모이다. 그러나 청나라의 요구로 영의정최명길이 파직되자, 신경진이 그 뒤를 이어 영의정에 임명되어 어려운 국사를 맡아서 처리하게 하였던 것이다. 국사에 전념하다가, 피로가 쌓여서 병이 나자, 사임하였다.
1642년(인조 20) 3월 11일 신경진이 노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69세였다.[『송자대전』 권157 「평성부원군 신공경진 신도비명」) 『인조실록』에는 1643년(인조 21) 3월 11일에 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조실록』인조 21년 3월 11일 「신경진 졸기」] 이때 재차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열흘도 못 되어 돌아갔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신경진
1613년(광해군 5) 대북(大北)의 이이첨 · 정인홍 등은 <계축옥사>를 일으켜서,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귀양보내 죽이고, 그 외조부 김제남을 처형하였다 1618년(광해군10) 북인 이이첨 등은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려고 조정의 여론을 일으킬 때, 백관들로 하여금 대궐 뜰에서 광해군에게 소청(疏請)하는 ‘정청((庭請)’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는데, 서인들은 이에 반대하여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이이첨은 서인의 중진 38명을 파직하고 유배하였다.
이에 격분한 신경진은 구굉과 손을 잡았다. 선조의 후비(后妃) 가운데 김인빈(金仁嬪)가 선조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서 4남 5녀를 낳았는데, 둘째 신성군은 신립의 딸과 혼인하였고, 셋째 정원군(定遠君)은 구사맹(具思孟)의 딸과 혼인하여 인조를 낳았다. 그러므로 신경진의 누이가 인조의 백모였고, 구굉의 누이가 인조의 어머니였다. 한때 선조가 신성군을 왕세자로 삼으려고 하자, 광해군을 세자로 받들던 대북의 정인홍과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옹립하려던 서인의 정철(鄭澈)은 김인빈과 그 아들들을 없애버리려고 기도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선조가 신립을 중앙으로 불러들여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하고, 김인빈과 그 자손을 보호하게 하였던 적도 있었다.
선조의 서출 왕자와 혼인한 집안 출신의 신경진과 구굉은 서로 왕가와 가까운 인척 관계이므로, 항상 자주 만났는데, 두 사람은 대북의 소행을 비판하다가 광해군 대신에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 인조)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 능양군은 구사맹의 딸인 인헌왕후의 아들이었므로, 구굉은 인조의 외삼촌이다. 그들은 가까운 친구부터 반정 세력으로 끌어들이고, 또 군사를 동원할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당시 김류는 사림이 존경하는 유학자였는데, 신경진과는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 신경진의 아버지 신립이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전사할 적에 종사관김여물(金汝岉)과 함께 달천(達川에 뛰어들어 순절(殉節)하였는데, 김류는 바로 김여물의 아들이었으므로, 신경진과 어릴 때부터 형제처럼 매우 가깝게 지냈다.
하루는 신경진이 김류에게 찾아가서 글을 배우기를 자청하면서 그 의중(意中)을 떠보았다. 중국 은(殷)나라 때 신하 이윤(伊尹)이 왕 태갑(太甲)을 추방한 일에 대하여 물어보기를, “신하로서 임금을 내친 것을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김류가 그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이 일은 부득이한 것이었다.” 하였다. 신경진이 묻기를, “지금은 어떠한가?”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양자가 서로 같을 것이다.” 하므로, 신경진이 말하기를, “천하에 어찌 어머니가 없는 나라가 있겠는가? 우리는 나라가 망하는 것을 차마 가만히 앉아서 볼 수 없는 일이다.” 하고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일을 빗대어 말하였다. 그러자 김류도 찬성하기를, “내 생각도 그러하다. 다만 신인(神人)의 촉망을 받는 사람을 알지 못할 뿐이다.” 하므로,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으니, 김류가 곧바로 찬성하였다.
이에 신경진과 구굉은 김류를 반정군의 대장(大將)으로 내정하였다. 신경진은 지략이 풍부한 최명길을 끌어들였는데, 그의 아버지 최기남(崔起南)은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되어, 문외 출송(門外出送)되어 가평(加平)에 나가서 살고 있었다. 최명길은 신경진을 통하여 구굉과 그 조카 구인후(具仁垕)를 만나서,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모의하는 데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구굉은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이서(李曙)를 설득하여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추대하기로 합의하였다. 또 최명길은 친구 이시백(李時白)을 통하여 이귀를 설득하였는데, 일찍이 최명길이 이항복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장유와 함께 이귀의 맏아들 이시백과 가장 가까이 지내던 친구였기 때문이다.
처음에 신경진은 체찰사장만(張晩)의 종사관이 되어, 그들이 거사할 계획을 은밀히 말하니, 장만은 위험하다고 끝내 군대를 움직이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장만은 최명길의 장인이다. 때마침 구굉과 절친한 사이였던 조옥건(趙玉乾)이 호남 지방의 병력을 거느리고 수원에 주둔하자, 그에게 군대를 동원시켜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조옥건도 거절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이귀가 평산 부사로 나가자, 신경진은 그의 중군(中軍)이 되기를 자원하여, 군사를 동원하려고 하다가, 이를 눈치 챈 정승 박승종(朴承宗)에 의하여 효성령의 별장으로 쫓겨났다. 이때 신경진은 거사의 계획을 최명길에게 맡기면서 “힘써 주기를 바란다.” 하고, 평안도 박천 가산진으로 갔으므로, 1623년의 <인조반정>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였다. 효성령은 가산읍(嘉山邑)의 진산(鎭山)으로 길이 꼬불꼬불하고 가팔라서, 말을 탄 사람도 말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하고, 또 숲이 무성하고 울창하여 대낮에도 이따금 호랑이가 출몰하는 곳이었다.[『계산기정』 권1] 신경진이 떠날 때 잠저(潛邸)에 있던 능양군을 찾아가서 고별인사를 하자, 능양군이 친히 보검(寶劒) 한 자루를 주면서, “표숙(表叔)이 이제 먼 곳으로 가게 되니, 삼가 이것으로써 나의 정을 표합니다.”고 하니, 신경진이 갑자기 뜰 아래로 내려가서 절을 넙죽 하고 칼을 공손히 엎드려 받았는데, 이미 군신(君臣)의 예의를 갖춘 것이다.
이서가 장단 방어사(長湍防禦使)에 임명되자, 구굉과 이서는 장단의 군사를 동원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때 최명길은 거사할 날짜를 당겨서 1623년(광해군15) 3월 12일 밤중으로 정하여, 모두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기로 정하였다. 예정한 날 밤중에 장단 방어사이서가 장단부의 군사 7백 명을 이끌고 몰래 홍제원으로 왔고, 대장김류 등도 소수의 군사를 거느리고 홍제원으로 집결하고, 나머지 사람들도 소수의 군사를 데리고 모였는데, 군사의 규모가 1천 4~5백여 명 정도가 되었다. 반정군은 달빛이 밝은 한밤중에 광해군이 있는 창덕궁(昌德宮)을 급습하여, 마침내 정변에 성공하였다. 3월 13일 대장김류가 서궁으로 가서 인목대비를 모셔 와 복위(復位)시키고, 인목대비의 명령을 받아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인조가 즉위하였다.
호란 이후 주화파와 척화파의 싸움
조선은 건국할 때부터 몽고족의 원(元)나라를 물리치고 중국의 명(明)나라를 섬기는 친명(親明) 사대주의(事大主義)를 외교 정책으로 삼았다. 더구나 주자(朱子)의 성리학(性理學)을 받아들이면서 중국의 유교(遺敎) 문화에 대한 사대주의가 유학자들에게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렸다. 또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두 차례나 도와주면서부터 조선의 사회에서는 명나라를 은인(恩人)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왜란이 끝나고, 두 차례의 호란(胡亂)을 겪으면서, 여진족의 후금(後金), 즉 만주족의 청(淸)나라가 무력으로 조선을 석권하고, 명나라에 행하던 사대의 예(禮)를 청나라에 행하도록 강요하였을 때, 유학자는 물론 사대부 양반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은 명나라에 사대주의를 주장하고, 여진족의 후금을 배척하다가, 두 차례나 호란을 겪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인조반정>을 주도한 신경진 같은 무신(武臣)들은 청나라 세력과 타협하자는 주장을 하기 시작하였으나, 김상헌 같은 유학자들은 청나라와의 타협을 반대하고 끝까지 오랑캐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반정 이후에 서인은 훈서(勳西)와 청서(淸西)로 나뉘게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최명길의 주화파와 김상헌의 척화파가 팽팽히 대립하고 있었다. 양반 사대부 사이에는 척화파가 우세하였으나, 일반 서민과 무사들은 전쟁을 하지 않고 타협하려는 주화파를 지지하였다. 말하자면, 척화파의 명분론과 주화파의 현실론이 팽팽히 대립하였던 것이다. 청나라의 태종홍타지도 이러한 조선 조정의 대립을 간파하여 주화파를 지원하고, 척화파를 청나라에 압송하게 하여, 청나라를 섬기도록 협박하고 회유하였다.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 45일 동안 청나라 태종홍타지와 싸우다가, 주화파 최명길의 주장에 따라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하고, 명나라를 선기는 대신에 청나라를 섬기기로 맹세하였다. 양국의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 태종은 오랑캐 군사를 거느리고 물러갔다. 그해 1월 훈련도감의 장졸과 어영청(御營廳)의 군병이 대궐문 밖에 몰려와서, 화친(和親)을 배척한 척화파(斥和派) 김상헌 등과 같은 신하들을 잡아서 오랑캐 진영에 보낼 것을 주장하였다. 『인조실록』에는 이 사건을 두고 “당시 신경진이 훈련도감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동성(東城)을 지켰으며, 구굉은 남성(南城)을 지켰고, 구인후는 수원 부사(水原府使)로서 남문(南門)을 지켰는데, 세 사람이 홍진도(洪振道)와 은밀히 모의하고 군졸들을 선동하여 대궐문 밖에 몰려와서 조정을 협박하는 변고를 일으켰다. 그때 사람들이 모두 이를 위태롭게 여기면서 앞으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몰라서 불안해하였다.”고 하였다.[『인조실록』인조 15년 1월 26일]
1641년(인조 19) 1월 신경진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청나라에서 척화파 인물도 함께 강제로 압송하게 하고, 또 그들을 심문하는 데에 신경진을 참여시켰다. 전 판서김상헌, 전 지평조한영(曺漢英), 학생(學生) 채이항(蔡以恒) 등이 심양에 도착하자, 목에 철쇄(鐵鎖)를 씌우고 두 손을 결박한 채 형부(刑部)의 문밖으로 끌고 갔다. 청나라 대신 질가왕(質可王) · 용골대(龍骨大)와 명나라 투항한 대신 범문정(范文程) 등이 부중(府中)에 늘어앉고, 소현세자와 사은사신경진을 동참하게 하였으며, 형관(刑官) 등은 문밖에 나열해 서 있었다. 척화파의 인물들을 차례로 심문하여 청나라에 항복하도록 권유하였으나, 김상헌 등은 항복하지 않아서 심양의 감옥에 갇혔다. 이때 신경진은 김상헌 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또 척화파 윤집(尹集) · 오달제(吳達濟) · 홍익한(洪翼漢) 등 3학사(三學士)는 심양에 붙잡혀 가서 청나라 태종에게 끝까지 항복하지 않다가, 심양성 서문 밖에서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당시 청나라는 중원(中原)을 석권하려고 명나라와 사활을 건 싸움을 중국 본토에서 벌이고 있었는데, 조선의 조야(朝野)에서 명나라와 서로 내통할까봐 염려하여, 정탐꾼을 풀어서 조금이라도 그런 낌새가 보이면, 그들을 청나라로 강제로 압송하게 하여 주살(誅殺)을 행하였다. 임경업(林慶業)이 바로 그 대표적인 희생자였다. 그때 신경진이 말하기를,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는 끝내 민멸(泯滅)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끊어지면, 사람이 금수(禽獸)가 될 것이고, 나라가 이적(夷狄)이 될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완성군(完城君)최명길과 더불어 조선의 사정을 명나라에 사적으로 통보할 방도를 찾다가, 마침 중 독보(獨步)를 만났는데, 독보는 실지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명나라 장수의 사자(使者)가 되어 실정을 정탐하려고 조선에 온 자였다. 신경진과 최명길은 독보를 명나라로 돌려보내면서. 지난 <병자호란> 때 사리에 궁박하고 힘이 모자라서 청나라에 ‘사대(事大)의 예(禮)’를 행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이것은 만부득이 했다는 사실을 은밀히 문자(文字)로써 자세히 써서 진달(進達)하였다. 중 독보가 명나라의 회보(回報)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독보는 잇달아 명나라에 왕래하였으나, 그 사연을 비밀에 붙여서 이것을 아는 자는 드물었다.[『송자대전』 권157 「평성부원군 신공경진 신도비명」]
성품과 일화
신경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꿋꿋하였다. 모습이 웅장하고 지혜가 깊었으며, 위엄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키가 크고 힘이 세어서 놀이를 할 적에는 반드시 여러 아이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글을 읽기를 싫어하고 놀이를 즐겨하였으므로 집안 어른들이 이를 걱정하자, 아버지 신립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스스로 마땅히 큰일을 할 것입니다.” 하였다.[『송자대전』 권157 「평성부원군 신공경진 신도비명」] 일찍이 신경진이 변방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그 치적이 드러났으므로, 사람들은 무신 중에서 제일 으뜸 되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인조실록』인조 1년 3월 25일]
나중에 재상이 되어서 조정에서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논의할 때 중론(衆論)이 서로 엇갈리면, 그는 갑자기 한마디로 결단하였는데, 모두 그 중론(重論)에 합당하니, 사람들이 그 말을 가볍게 여기지 못하였다. 비록 문자(文字)를 배우는 데에 힘쓰지는 않았더라도, 주문(奏文), 자문(咨文), 사명(辭命)에 있어서 그가 갑자기 지적하여 말하기를, “무엇은 첨가하고 무엇은 삭제하라.” 하면 사액(詞掖) 곧 글을 맡은 사람을 맡아보는 사람들이 물러 나와서 모두 말하기를, “과연 훌륭합니다.”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자기가 훌륭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인조가 항상 수찰(手札)로써 비밀히 국가기밀에 해당하는 문제를 물으면, 그가 자상하게 조목별로 대답하여 임금을 보필(輔弼)한 것이 많았으나, 또한 집안사람들에게 일절 말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또 인조가 일찍이 옛날에 살던 집을 방문하여 친족들을 불러서 만나볼 적에 그는 홀로 가지 않고, 말하기를, “인신(人臣)이 감히 사사로이 임금을 뵐 수가 있겠는가.” 하니, 우복(愚伏)정경세(鄭經世)이 이를 듣고 훌륭하다고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여느 사람도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송자대전』 권157 「평성부원군 신공경진 신도비명」]
김상헌의 형인 선원(仙源)김상용(金尙容)이 호란 때 강화도에서 화약을 터뜨리고 뛰어들어 죽었는데, 인조가 그 실상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의아하게 여겼다. 신경진이 그 충절(忠節)이 뛰어난 사실을 애써 자세히 진언(陳言)하자, 인조가 비로소 사실을 깨달아서 추후하여 전례(典禮)를 행하였다. 일찍이 역적 김자점(金自點)이 청나라에게 우리 조정을 무함(誣陷)하자, 조정의 대신들이 구금되어 청나라에 끌려가서 힐문을 당하게 되었는데, 조정에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화난(禍難)을 무마시킬 만한 자가 아무도 없었다. 신경진이 자신이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겠다고 자청하니, 인조가 반가워하고 직접 위로하기를, “경의 재주와 지략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임기응변하여 마침내 무사하게 되었다. 그가 전후하여 여러 차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청나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익히 듣고서 반드시 ‘대장군(大將軍)’이라 일컫고,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송자대전』 권157 「평성부원군 신공경진 신도비명」]
일찍 아버지를 여읜 까닭에 언제나 봉양하지 못한 것을 원통하게 여기고 제사를 지낼 때마다 지극히 슬퍼하였다. 어머니를 섬길 때에도 그 마음을 즐겁게 하기에 힘썼으며, 사재(私財)와 관록(官祿)을 사용할 때에도 반드시 어머니의 허락을 받은 다음에 사용하였다. 형제들과 더불어 거마(車馬)와 의식(衣食)을 서로 함께 사용하고 따지지 않았다. 동생인 동평군(東平君)신경유(申景祀谷)가 먼저 돌아가자, 그가 슬픔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여 공청(公廳)에서 물러나오면 반드시 날마다 사당에 가서 한 차례 통곡하였다. 막내누이가 과부가 되어 홀로 지냈는데, 특별히 불쌍하게 여기기를 더하고, 혹시 전염병을 앓게 되면 친히 스스로 병을 구료하였다.[『송자대전』 권157 「평성부원군 신공경진 신도비명」]
반정 이후 서인이 훈서와 청서로 나누어지자, 김류 · 이귀 · 김자점 등과 함께 훈서의 영수가 되었으나, 무신이라고 하여 조정의 시비에 간여하기를 적극 피하였다. 송시열(宋時烈) 등을 천거하고 장려하였다. 한편으로 자기 공훈을 믿고 남의 재산을 빼앗고 대궐 같은 큰 집에 살았다는 등 탐오한 면이 있다고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651년(효종 2)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사계전서』 권47] 묘소는 처음에 충청도 청주(淸州)에 있었는데, 뒤에 경기도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으로 옮겼다.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57 「평성부원군 신공경진 신도비명(平城府院君申公景禛神道碑銘)」]
부인 순창 조씨(淳昌趙氏)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조정현(趙廷顯)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두었다. 장남 신준(申埈)은 정사공신(定社功臣)으로서 평흥군(平興君)에 봉해졌고, 형조 판서를 지냈다. 차남 신해(申垓)는 돈녕부(敦寧府)도정(都正)을 지냈다. 측실(側室) 소생의 딸들은 영주감(瀛洲監) 이봉령(李鳳齡)과 창림 도정(昌臨都正) 이일(李佾)에게 각각 시집갔다.[『송자대전』 권157 「평성부원군 신공경진 신도비명」]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광해초상록(光海初喪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동계집(桐溪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만기요람(萬機要覽)』
- 『명재유고(明齋遺稿)』
- 『묵재일기(黙齋日記)』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서계집(西溪集)』
- 『서애집(西厓集)』
- 『속잡록(續雜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순암집(順菴集)』
- 『약천집(藥泉集)』
- 『연도기행(燕途紀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평일기(延平日記)』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종묘의궤(宗廟儀軌)』
- 『청성잡기(靑城雜記)』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해사록(海槎錄)』
- 『계산기정(薊山記程)』
- 『고담일고(孤潭逸稿)』
- 『오리집(梧里集)』
- 『추탄집(秋灘集)』
- 『선원유고(仙源遺稿)』
- 『인재집(訒齋集)』
- 『월사집(月沙集)』
- 『상촌고(象村稿)』
- 『북저집(北渚集)』
- 『학곡집(鶴谷集)』
- 『월당집(月塘集)』
- 『지천집(遲川集)』
- 『용주유고(龍洲遺稿)』
- 『낙전당집(樂全堂集)』
- 『백헌집(白軒集)』
- 『백주집(白洲集)』
- 『양파유고(陽坡遺稿)』
- 『석호유고(石湖遺稿)』
- 『시남집(市南集)』
-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
- 『노서유고(魯西遺稿)』
- 『야당유고(野堂遺稿)』
- 『지호집(芝湖集)』
- 『서하집(西河集)』
- 『서파집(西坡集)』
- 『명곡집(明谷集)』
- 『만정당집(晩靜堂集)』
- 『도곡집(陶谷集)』
- 『북헌집(北軒集)』
- 『학암집(鶴巖集)』
- 『풍서집(豐墅集)』
- 『번암집(樊巖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석재고(碩齋稿)』
- 『면암집(勉菴集)』
- 『낙서집(洛西集)』
- 『설정집(雪汀集)』
- 『만오집(晩悟集)』
- 『죽소집(竹所集)』
- 『묵수당집(嘿守堂集)』
- 『석병집(石屛集)』
- 『무하당유고(無何堂遺稿)』
- 『춘소자집(春沼子集)』
- 『송계집(松溪集)』
- 『경암집(絅菴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