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궁(慶運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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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정궁(正宮)으로 사용되었고, 현재 덕수궁이라 불리는 궁궐.

개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에 선조가 피난지인 의주에서 서울로 돌아와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에 머물면서 행궁으로 사용하던 곳을 1611년에(광해군 3) 광해군이 처음 경운궁이라 이름 붙였다(『광해군일기』 3년 10월 11일). 1623년(인조 1)에는 인조반정 뒤에 인조가 경운궁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하였으며(『인조실록』 1년 3월 13일), 이후 1748년(영조 24)에는 영조가 인조의 즉위처를 확인하기 위해 경운궁에 임어하기도 했다(『영조실록』 24년 1월 27일). 고종 이전까지 명례궁(明禮宮)이 자리하기도 했다.

고종대 황폐한 이곳에 새롭게 궁궐을 조성했다. 1893년(고종 30)에는 고종이 즉조당에서 선조 환도 300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을 치렀다(『고종실록』 30년 10월 4일). 1896년(고종 33)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는 을미사변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한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정궁으로 삼고자 경운궁을 영건하였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환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경운궁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자 경운궁은 황궁(皇宮)으로 격상되었다. 1907년(융희 1) 고종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퇴위된 이후 고종의 호를 덕수(德壽)로 하였기 때문에 경운궁은 덕수궁(德壽宮)으로 불렸다. 속칭 정릉동 황궁(皇宮)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고종 사후인 1921년에는 경운궁선원전(璿源殿), 순종 비의 혼전인 의효전(懿孝殿)을 창덕궁으로 이건한 뒤, 궁역 서북부가 분할·매각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의 사무소와 미소공동위원회의 회의장으로 석조전(石造殿)이 사용되었으며, 1948년에는 정부 수립과 광복 3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이 거행되는 등 정치의 중심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후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통칭되며 시민공원으로 활용되거나 음악공연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석조전과 그 별관은 국립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이용되면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위치 및 용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위치하며 임진왜란기와 광해군대 임시 궁궐인 행궁으로 사용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폐기되었다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궁으로 이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경운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 즉 사저(私邸)이었다. 임진왜란 때 수도 한성을 탈환한 뒤 돌아 온 선조는 이곳을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였다. 이후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 경운궁으로 격상되었다. 이후 이 궁의 별당인 즉조당에서 인조가 즉위하였고, 임진왜란의 뼈아픈 경험을 되새기려는 역대 왕의 행차가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 때 창덕궁과 창경궁이 중건된 뒤로는 더 이상 궁궐로 사용되지 않았다.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 주목받게 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된 19세기 말이다. 1895년(고종 32) 일본인들이 경복궁 안에까지 침투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1896년 2월 고종은 경복궁을 떠나는 파천을 감행했다. 당시 외국 공사관들이 밀집해 있던 정동 지역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1897년에 고종은 조선 왕조를 대한제국으로 격상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8월 16일에는 새로운 연호인 ‘광무(光武)’를 반포하였다. 10월 2일에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할 환구단(圜丘壇)을 회현동 소공방에 축조하고, 10월 12일에는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다음 날 황제위(皇帝位)에 오른 것과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한 사실을 조서로 선포하였다. 경운궁은 이때부터 황궁으로 격상되어 새로이 단장되었다.

경운궁을 황제의 치소(治所)로 만드는 일은 1896년에 시작되어 1902년(광무 6) 진전인 선원전의 중건과 법전인 중화전(中和殿)의 창건을 끝으로 일단락되었다(『고종실록』 39년 10월 19일). 가장 먼저 1897년 4월에는, 경복궁 선원전에 봉안되어 있던 어진을 봉안할 진전(眞殿)을 세웠다. 이어서 경복궁 문경전(文慶殿)을 옮겨다가 명성황후의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또 그해 6월에는 경복궁 만화당(萬和堂)을 옮겨다 국왕의 침소인 함녕전(咸寧殿)을 지었다. 1898년(광무 2) 2월에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와 진전과 빈전에서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 다음 날 고종은 각국 공사·영사들을 접견하였는데, 이로써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 되었다.

1900년 4월에는 태조의 어진을 봉안한 흥덕전(興德殿)이 세워졌다(『고종실록』 37년 3월 6일). 이 밖에도 청목재(淸穆齋)·대유재(大猷齋)·구성헌(九成軒) 등의 건물과 궁성의 여러 문인 인화문(人化門)·포덕문(布德門)·평성문(平成門)·영성문(永成門) 등이 완공되었다. 이 시기에는 인조가 즉위한 건물인 즉조당을 정전으로 삼았으나, 1902년 9월 13일에 2층 법전(法殿)인 중화전을 완공하였다. 이로써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견줄 만한 체제를 비로소 갖추었다. 이때 복랑(復廊) 형식의 행각 128칸, 중화문(中和門)·조원문(朝元門)·용강문(用康門), 그리고 경희궁 통로로 사용된 다리인 운교(雲橋) 등이 완공되었다. 그밖에 궁성을 남북으로 확장하고 궐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세웠다. 진전을 지을 때나 법전인 중화전을 새로 지을 때에는 큰 규모의 공사 조직인 도감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경운궁 중건 과정에서 세 차례의 화재가 일어났다. 1900년(광무 4) 10월 14일 진전에서 화재가 있었고, 1901년(광무 5) 10월 16일에는 수옥헌(潄玉軒), 1904년(광무 8) 4월 14일에는 함녕전에서 시작된 불이 궁궐 전역을 태우는 화재가 발생하였다.

1900년 화재의 경우, 10월 14일 밤 진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은 물론 숙종 이하 일곱 왕의 어진이 소실되었다. 이에 진전중건도감(眞殿重建都監)과 영정모사도감(影幀模寫都監)을 설치하고 새로운 건물 자리를 정하여 확대된 규모로 진전을 늘려 지었다. 10월 24일에는 영성문(永成門) 안 서쪽이 부지로 결정되었고 10월 30일에 치목(治木)이 시작되었으며 다음 해 7월에 가서야 완공되었다. 이때 세워진 건물은 이안청(移安廳)·숙경재(肅敬齋)·내재실(內齋室)·어재실(御齋室)·좌우배설청(左右中排設廳)·제기고(祭器庫)·내외주방(內外廚房)·생물방(生物房)·별군관처소(別軍官處所)·병정처소(兵丁處所) 등 모두 228칸이었다. 그 가운데 54칸은 먼저 있던 진전의 이안청·어재실·행각·별군관처소 등을 옮겨 지은 것이었다. 이들 건물 주위로 담장 70여 칸, 출입문 15개소, 축대·은구(隱溝)·제정(祭井) 등도 조성되었다.

1904년 4월 14일에는 함녕전 온돌 아궁이를 수리하던 중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때 함녕전은 물론 중화전·즉조당·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 등 궁궐 중심부의 전각들과 관아 및 궁성문마저 모두 타 버리고 말았다. 이 화재는 일본인의 방화로 추정되고 있기도 하다.

고종은 복잡한 내외 정세 때문에 다른 궁궐로 옮기지 않은 채, 신속하게 경운궁을 중건하였다. 화재 이튿날 경운궁중건도감(慶運宮重建都監)을 설치하여 중건 의지를 보였다. 그리하여 1904년 5월 14일부터 1906년(광무 10) 5월 17일 사이에 즉조당, 석어당, 준명당(浚明堂), 함유재(咸有齋), 흠문각(欽文閣), 중화전, 함녕전, 영복당(永福堂), 함희당(咸喜堂), 양이재(養怡齋), 경효전, 중화문, 조원문, 대한문(大漢門) 등이 차례로 중건되었다. 이때 중층이던 중화전은 단층으로 재건되었고, 대안문(大安門)은 수리 후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계속된 공사에서 중화전·함녕전·경효전·준명당·석어당·영복당·함희당 등에 딸린 행각, 경효전에 딸린 시설인 내재실·어재실·이안청·중배설청·돈례문·장방처소(長房處所), 덕경당(德慶堂)·삼축당(三祝堂)·유호실(攸好室) 등의 건물, 광명문(光明門)·건극문(建極門)·봉양문(鳳陽門)·연광문(延光門) 등의 문, 궁내부(宮內府)·시강원(侍講院)·태의원(太醫院)·비서원(秘書院)·공사청(公事廳)·내반원(內班院)·남여고(藍輿庫) 등이 갖추어졌다. 이밖에 위 건물들 주위에 용덕문(龍德門)을 비롯한 일각문(一脚門) 33개소, 화초장(花草墻) 202칸, 장원 113칸, 문 옆 샛담 44칸, 금천교(禁川橋) 등도 조성하였다. 아울러 양복당(養福堂), 의효전(懿孝殿), 명덕당(明德堂), 수옥헌(漱玉軒), 홍원(紅園), 흥덕전 등 기존 건물도 수리하였다.

이처럼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고종황제가 서세동점(西勢東漸)과 일본의 침략 앞에 황실의 마지막 부흥을 위한 노력이 담긴 궁궐이었다. 경운궁은 1897년 2월 16일부터 1907년 2월 12일까지 10여 년의 기간에 걸쳐 소실과 재건을 거듭하면서 건설되었다. 그러나 왕조 부흥의 터전이 되지 못하고 외세에 의하여 퇴위당한 고종이 상왕(上王)으로서 울분 속에 거처하다가 생애를 마감한 비운의 궁궐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한 뒤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조정의 정무를 행하는 궁궐이 아니라 태황제(太皇帝)의 궁전으로서 순종황제와 그 신하들이 문안 인사차 들르는 알현소(謁見所)로 전락하였다. 한일합방 이후인 1911년에는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어머니인 귀비엄씨(貴妃嚴氏)가 즉조당에서 별세하였다. 1919년에는 고종황제마저 별세하자 경운궁은 태황궁의 역할도 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1년에 선원전 일곽, 의효전 일곽, 가정당(嘉靖堂) 일곽 등이 창덕궁으로 옮겨졌다.

일제는 곧바로 경운궁을 폐궁(廢宮)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여 부지를 잘라 도로를 만들거나 일본인 학교와 방송국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전각은 철거되어 통째로 또는 재목으로 일본인에게 팔렸다. 궁장 서쪽과 진전 자리에 도로를 신설하였고, 이 도로 서쪽에는 1922년에 경성제일여자고등학교가 세워졌고, 도로 동쪽에는 1923년에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가 세워졌다. 해방후 경성제일여자고등학교는 경기여자고등학교로 개명되었고,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는 덕수국민학교로 개명되었다. 1926년에는 궁의 동쪽 높은 곳에 경성방송국이 세워졌다. 일제강점기에는 고종이 서거한 이후 석조전은 일본인들의 미술품을 진열하는 곳으로 변경되었다. 1936년 8월부터 1937년 사이에 석조전 옆에는 2층 석조 건물이 증축되어서 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으로 사용되었다.

경운궁의 궁역은 원래 서쪽은 주한 미국 대사관의 남쪽 길을 따라 전에 러시아 공사관이 있었던 언덕 일대와 신문로 일대에 해당한다. 북쪽은 영국 대사관을 거쳐 성공회 앞길을 따라 덕수초등학교 담장 위쪽을 지나 신문로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 중인 「덕수궁평면도(德壽宮平面圖)」를 토대로 당시의 궁역과 배치 형식을 살펴보아도 당시의 궁역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첫째, 궁역의 동남쪽은 현재 정문인 대한문을 비롯하여 중화전·함녕전·석어당·즉조당·준명당·정관헌 등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곳은 당시에 정전·편전·침전·궐내각사 등이 갖추어져 있었던 궁궐의 중심부였다. 경운궁은 다른 궁궐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전통적 형식을 갖추지 못하였다. 일곽의 서쪽에 미국 영사관과 러시아 영사관, 북쪽에 영국 영사관 등이 이미 자리 잡고 있어서 전통적인 궁궐 제도에 입각한 배치 형식이나 지형에 따른 자유로운 배치 형식을 다 따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석조전과 분수 정원이 조성되면서 정전인 중화전의 행각이 헐려 나갔고 그 결과 전통적인 법전 체재의 중심성이 무너지게 되었다.

둘째, 궁역 서쪽 미국 영사관과 러시아 영사관 사이에는 중명전 일곽과 환벽정이 있었다. 중명전은 현재에도 존재하는 건물로서, 서양식 2층 건물이고 당시 접견실과 연회장으로 쓰였다. 또한 정자가 있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경복궁의 경회루 영역과 같은 성격이 부여되었던 곳으로 해석된다.

셋째, 궁역 북쪽에는 선원전과 혼전(魂殿)이 있었다. 이는 마치 경복궁 서북쪽에 왕실 내 제사를 위한 영역이 마련되어 빈전과 혼전을 세우고, 동북쪽에 진전인 선원전이 세워졌던 것을 연상시킨다.

위 세 영역 가운데 현재 궁역 안에 포함되어 있는 곳은 오로지 중화전 일곽뿐이다. 고종 사후 조선총독부에 의한 분할·매각이 진행된 결과이다. 현재 대한문과 광명문, 중화문·중화전과 행각, 즉조당·석어당·준명당 일곽, 함녕전·덕홍전(德弘殿) 일곽 등이 남아 있으며, 서양식 건축으로는 석조전 일곽과 부속 정원, 정관헌 등이 남아 있다. 이밖에 서쪽 궁장 외부의 미국 대사관 옆에 중명전(重明殿)이 남아 있다.

형태

중화전 일곽은 전통적인 궁궐 제도에 입각한 배치 형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주변부에는 서양식으로 정원을 갖춘 궁전을 배치하여 동·서양 건축이 절충된 특이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정전을 즉조당과 석어당 일곽의 남쪽에 배치한 점, 정전 동쪽에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을 배치한 점,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이나 황실 일가의 침전을 정전 동쪽에 벌여 놓은 점, 진전인 선원전이나 순종 비의 혼전인 의효전 등을 석조전 서북부 별도의 지역에 배치한 점 등은 경운궁 터가 애초에 민가와 외국 공관 등으로 둘러싸인 조건에서 건설되었기 때문에 드러난 특징으로 보인다.

관련사건 및 일화

1912년 덕수궁에서는 60세인 고종과 복녕당(福寧堂) 양씨(梁氏)와의 사이에서 덕혜옹주(德惠翁主)가 출생하였다. 고종은 덕혜옹주가 5살 때 준명당에 유치원을 만들어 주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
  • 『궁궐지(宮闕志)』
  • 『중화전영건도감의궤(中和殿營建都監儀軌)』
  • 『진전중건도감의궤(眞殿重建都監儀軌)』
  • 『한경지략(漢京識略)』
  • 강경숙 외, 『미술사, 자료와 해석: 진홍섭 선생 하수 논문집』, 일지사, 2008.
  • 김순일, 『덕수궁(경운궁)』, 대원사, 1991.
  •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편,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 1987.
  • 이민원, 『명성황후 시해와 아관파천』, 국학자료원, 2002.
  • 항산안휘준교수정년퇴임기념논문집 간행위원회 편,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항산안휘준교수정년퇴임기념논문집 1~2』, 사회평론, 2006.
  • 小田省五, 『德壽宮史』, 李王職, 193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