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문(大漢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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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정궁인 경운궁의 정문.

개설

경운궁은 오늘날의 덕수궁으로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정궁으로 삼은 곳이다. 경운궁의 정문은 본래 중화전 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1902년 인화문 대신에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삼았다. 1904년에는 대안문의 명칭을 대한문으로 변경하였다(『고종실록』 43년 4월 25일).

위치 및 용도

대한문은 경운궁 궁역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대한문이 경운궁의 정문이 된 것은, 대한문 외부가 광화문 육조 거리에서 흥례문에 이르는 거리와 연결되고 환구단을 마주하는 광장이 있어서 국가의례를 거행하는 것은 물론 황제의 행차를 대내외에 선전하기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특히 마차와 근대적 교통기관을 사용하는 대한제국기에 인화문의 접근성이 대한문에 비해 떨어졌다.

변천 및 현황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을 새롭게 조성할 때 경운궁의 정문은 인화문이었다. 인화문은 경운궁의 남쪽 궁장(宮墻)에 위치하고 있었다. 인화문의 건립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1897년 1월 19일에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인화문을 거쳐 수안문(壽安門), 의록문(宜祿門)을 통해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인화문이 만들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구한국외교문서』 제15권에는 ‘독일 상인이 인화문 건축 인부를 구타한 데 대한 항의’라는 문서가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새롭게 건립한 인화문을 개와(蓋瓦)하는 도중에 골레즈키(Kalitzky)의 상점으로 흙괴석편[土塊石片]이 떨어진 일이 있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1897년 11월경에 인화문의 기와 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이었다. 대안문은 경운궁의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원래는 경운궁의 정문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다. 1899년(광무 3) 2월 13일 자 관보 1183호에는 1898년 6월 26일에 대안문의 현판서사관으로 의정부 참찬 민병석을 임명했다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대안문은 1898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경운궁의 출입은 대부분 정문인 인화문을 통해 이루어졌고, 주 건물인 함녕전과 경효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화문을 지나고 금천교를 건너 돈례문(敦禮門)을 통과해야만 했다.

대안문이 경운궁의 정문으로 바뀌게 된 것은 1902년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을 건립하면서부터이다. 기존의 궁장에다가 중층의 거대한 중화전을 건립하다 보니 정전 앞마당이 너무 좁아졌다. 이런 연유로 인화문 좌우의 궁장을 남쪽으로 옮겨 쌓았고, 정문인 인화문은 철거하였다. 이때 인화문 내부에 흐르던 금천도 은구(隱溝)의 형태로 가리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인화문을 철거하면서 남쪽 궁장에는 단칸의 건극문(建極門)을 세워 통행이 가능하도록 했다. 인화문을 철거하고 대안문을 정문으로 사용하면서 중문으로 조원문(朝元門)과 중화문(中和門)을 새롭게 만들었다. 조선의 궁궐은 대부분 3문 체제를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복궁은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의 3문을 갖추고 있으며, 창덕궁은 돈화문, 진선문, 인정문을 갖추고 있다. 이때에 비로소 경운궁도 대안문, 조원문, 중화문의 3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1904년 경운궁에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경운궁의 중요 전각이 대부분 피해를 받았다. 조원문과 대안문은 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경운궁 재건 과정에서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경운궁중건도감의궤』의 「시일」조에 따르면 조원문이 원래 자리에서 손(巽)방 즉, 동남쪽 방향으로 옮겨졌다. 대안문의 수리 역시 진행되었다. 음력 1906년 4월 2일 자 『일성록』의 기록에 따르면 대안문은 4월 13일 정시(丁時)에 상량했다. 또한 1906년 4월 25일에는 대안문이라는 이름을 대한문으로 바꾸었고, 5월 1일에는 대한문 상량문제술관으로 영돈녕사사 이근명, 서사관으로 종1품 윤용구, 현판서사관으로 특진관 남정철을 임명하였다.

대한문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이승만 정권기에는 덕수궁이 시민공원으로 이용되면서 그 면모를 상실해 갔는데, 서울의 도시화와 더불어 시청 앞 도로 확장이 진행되면서 경운궁의 궁장은 도시 계획과 마찰을 일으키곤 하였다. 태평로 확장이라는 현실적인 필요성과 문화유산 보존이라는 당위성의 충돌이었다. 여러 논의 끝에 1961년에는 경운궁의 담장을 헐어 내고 궁궐 내부를 밖에서 볼 수 있도록 투시형 울타리로 대신했다. 1968년에 이르러서는 기존 궁장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16미터 후퇴하여 궁장을 다시 쌓았다. 이때 기존의 대한문은 궁장과 분리된 채 확장된 도로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한문 역시 문제가 되자 현재의 자리로 옮겨 다시 궁장에 연결하였다.

형태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을 하고 있다. 다른 궁궐의 정문과 다르게 단층으로 구성된 것이 독특하다. 공포는 다포식으로 꾸몄고, 지붕은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궁궐의 정문을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개칭한 것에 대해 『매천야록』에서는 하나의 일화를 전하고 있다. 전 비서승 유시만(柳時萬)이란 사람은 겸암(謙庵)유운룡(柳雲龍)의 사손으로, 그는 유운용의 비결을 얻어 300년이나 된 묘소를 이장한다고 하면서 또 허위 첨서를 조작하여 남모르게 옛 광내(壙內)에다 묻어 놓았다가 그것을 파내어 은밀히 고종에게 바쳤다. 그 첨서를 대충 말한다면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고치고, 안동(安東)의 신양면(新陽面)으로 천도를 하면 국운이 연장된다는 것이다. 고종은 이 말에 현혹되어 꿈에 그런 징조가 있었다고 말하고, 즉시 대안문의 이름을 바꾸고 또 많은 금전을 유시만에게 주어 행궁을 짓도록 하였다. 이에 유시만은 그 돈을 자루에 담아 가지고 와 졸부가 되었으나 고종은 그것을 불문에 부쳤다는 것이다.

『매천야록』에 수록된 일화 외에도 대한문으로 대문의 명칭을 개칭한 것에 대해 여러 이설이 전하고 있으나 대부분 낭설에 불과하며 사실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실제로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 수록된 「대한문 상량문」에 따르면 대한(大漢)은 소한(霄漢)과 운한(雲漢)의 뜻을 취한 것이니, 덕이 호창에 합하고 무지개가 구름 사이로 나온다고 하였는데, 이 내용이 사실에 적합하다고 본다.

참고문헌

  • 『중화전영건도감의궤(中和殿營建都監儀軌)』
  •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
  •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용어 해설』, 2009.
  • 이민원, 『한국의 황제』대원사, 2001.
  • 이민원, 「일본의 침략과 대한제국의 경운궁」, 『한국독립운동사연구』22, 2004.
  • 小田省吾, 『德壽宮史』, 李王職, 193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