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서(淸西)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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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청서 |
한글표제 | 청서 |
한자표제 | 淸西 |
상위어 | 서인(西人) |
동의어 | 청론(淸論) |
관련어 | 척화파(斥和派), 공서(功西), 김상헌(金尙憲), 산당(山黨) |
분야 | 정치/정치운영/정쟁·정론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기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청서(淸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3년 1월 17일 |
인조반정에 소극적이었던 서인 가운데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분파.
개설
청서는 인조반정 후에 공서파의 소북·남인 포용 정책에 반대하고, 후금과의 척화론을 주도한 김상헌의 의리명분론에 동조한 세력이다. 주요 인물로는 김상헌·김장생·강석기·성문준·윤원거·윤황·이식·정홍명·조경 등이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인조 정권은 광해군 정권이 자행한 ‘폐모살제(廢母殺弟)’즉 어머니를 폐위시키고 동생을 살해한 비윤리적인 행위를 불식시키고, 중립 외교 대신에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려고 했다. 그러나 인조 집권 초기부터 정변 주도 세력 내부의 갈등과 후금의 군사적 압력에 대한 인사 및 외교 정책을 둘러싸고 마찰이 일어났다.
조직 및 역할
정변 후 공신 세력의 일방적인 정국 운영 방식에 대한 비공신 세력의 비판이 제기되면서 서인 내부의 갈등 양상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우선 광해군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을 관직에 등용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제기되었다. 인조와 공서파가 인목대비 폐비 논의에 가담한 인사들을 기용하려 하자 비공신 서인(西人)계 인사인 김상헌이 정변의 명분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인조실록』 2년 12월 18일]. 또한 대북파를 제거한 인조와 공서파 김류 등은 이괄(李适)의 난, 이인거작변(李仁居作變), 유효립(柳孝立) 옥사 등을 이용하여 서인·남인·소북의 3당 연립 정권을 출범시키려 했다. 그러나 남인·소북을 정권에 참여시켜서 조기에 정국의 안정을 꾀하려던 정국 운영 방식을 김상헌이 비판하고 나섰다(『인조실록』 3년 1월 17일).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공서파의 시도를 저지하려는 비공신 청서파 결집이 이루어진 것이다.
다음으로 후금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책을 둘러싸고 주화론자(主和論者)와 척화론자(斥和論者) 간의 대립이 있었다[『인조실록』 5년 3월 13일]. 정국 운영을 주도하는 공서 계열은 현실적인 위협에서 국가의 안위를 감안해 후금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자는 현실론을 펴는 인사가 많았다. 이에 반해서 청서파 인사들은 국민 모두가 끝까지 후금에 저항해 보다가 도저히 어쩔 수 없을 때 강화를 고려해 볼 수 있다는 강경책을 견지했다. 공서파의 후금에 대한 유화책은 정변의 명분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라는 청서 계열 인사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인조 집권 초기에 정국 운영 방안을 둘러싼 공서와 청서의 갈등은 정책 대결의 양상을 보였고 논의에 적극 참가한 사람도 서인 일부 인사에 한정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집단적 정치 활동을 별도의 정파로 분류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인조실록』 7년 10월 16일]. 청서파를 구성하는 주요 인물로는 김상헌, 신흠, 강석기, 김장생, 나만갑, 성문준, 윤원거, 윤황, 이식, 정홍명, 조경 등이 있다.
변천
이들의 정치 노선은 효종 초반에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산당(山黨) 계열 인사들이 계승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0: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8.
- 고영진 외, 「17세기 전반 조선 사상계의 동향과 그 성격」, 『역사와현실』8, 1992.
- 신병주, 「1623년 인조반정의 경과와 그 현재적 의미」, 『통일인문학논총』46, 2008.
- 오수창, 「인조대 정치 세력의 동향」, 『한국사론』13, 1985.
- 이기순, 「‘인조반정’ 공신 세력의 성격」, 『백산학보』38, 1991.
- 한명기, 「17·8세기 한중 관계와 인조반정: 조선 후기의 ‘인조반정 변무’ 문제」, 『한국사학보』13, 2002.
관계망